청솔 남서호 박사의 상담심리 코너

미국 전쟁 포로들을 가득 실은 한 열차가 독일을 탈출하려고 하였다. 그들을 이틀간이나 대피소에서 굶긴 후에 독일 군인들은 적십자의 "전쟁포로 구급낭"을 던져 주었다. 그들은 포로들이 그것을 가지고 서로 싸워 서로 죽이리라고 생각하였다. 머리에 피묻은 붕대를 감은 블론드 머리칼을 지닌 한 소년이 그 구급낭을 움켜 쥐고 말하였다.

"여러분들 이것을 성만찬을 나누듯이 나누자"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동등하게 분배되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즉 다툼을 성례전이 되게 하였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생명의 떡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아니하리라"(35절). 떡은 우리에게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인간은 떡이 없이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생명이란 물질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참여하는 것, 신뢰, 순종, 사랑을 근거로 하는 관계를 말한다. 예수님을 이 생명의 떡이라 함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그분의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존속을 위한 떡이 되는 것이다.

박해를 받을 때에 인간은 목숨을 걸고 성만찬을 하려 한다. 백년 전 프랑스 혁명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 의회에 의해 종교는 폐기되었고 주일은 사라져 버렸으며 목사는 짐승의 밥처럼 숲속으로 내쫓겼고, 그리하여 아무도 죽음의 형벌을 초래할 예배를 행하거나, 혹은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은총의 수단이 없이 지냈겠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심부름꾼이 비밀 암호를 가지고 집집마다 뛰어다녔다. 그는 "검은 습지요."라고 말하고는 인사나 작별도 고하지 않고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를 알아 들었다. 자정 직후에 남자와 여자들은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동네 아래에 있는 검은 습지 옆에 조용히 모였다.

거기에서 그들은 조심스럽게 빛을 가진 등불을 비추고 추방당한 목사 중 한 분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신실한 이웃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모두 어느 때든지 군인들이 자기들을 덮치고 일제 사격을 가하여 자기들이 들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갈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인간은 그들의 육체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나 예수님의 마지막 날에 그들을 일으키시리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초대 교회부터 성만찬은 예배의 중심적 순서였다. 세례를 받고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이 성만찬의 성례전에 의무적이면서도 특권적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의 역사 속에 중심적 위치를 지켜 온 만찬은 때때로 지나친 해석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예전에서의 그 소중한 의미는 지금까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자들 역시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바르게 선포되고 집례되어지는 곳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이 신앙적 전통으로 우리에게도 계속 전수되어 왔다.

이에 비추어 오늘의 한국 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만찬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때, 과연 우리는 초대 교회가 추구하고 경험했던 그 감격을 소유하고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스럽게도 여기에 대한 답변을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일 년에 한두 번으로 끝나는 성만찬의 회수에서 그렇고, 그 내용에서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성만찬의 성례전은 "나를 기념하라"는 언어적인 뜻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 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더우기 그 현장에 만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개신교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조차 없는 지극히 형식적 순서로써 끝마쳐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 집례자와 참여자 모두가 성례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문제의 시급성이 요청되며,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의미의 발굴을 서둘러야 할 필요성을 갖게 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구태의연하고 형식적인 성만찬 의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여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는 단순히 말씀만 듣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 가운데서 경험하고 깨달은 신앙으로 주님과 연결된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말씀과 성례전이 이상적으로 살아 집례되어지는 교회로서의 바른 출발을 위해 우리는 보다 세심한 관심과 적극성을 가지고 성만찬을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니 성례의 감동을 초대교인들처럼 경험하고 싶다.

(남서호 박사의 페이스 북 페이지에서 인용하였다. 남서호 목사는 기독교치유상담교육연구원 원장(대표, Ph.D)이며, 총신 신대원, 고려대학교 대학원, Liberty University, Ashland University, Bethany University(Ph.D)에서 상담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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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호 목사는 기독교치유상담교육연구원 원장(대표, Ph.D)이며, 총신 신대원, 고려대학교 대학원, Liberty University, Ashland University, Bethany University(Ph.D)에서 상담학을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