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는 구원을 회심 체험으로 축소시키지 않았다. 구원의 감격과 함께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성취하고 일궈내고자 분투노력했다”(31 페이지)

“오늘 날 현대 교회는 값싼 복음을 남발하고 있다. 구원을 너무나 좁게 해석하면서, 그저 입술로만 다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가볍게 취급한다. 거룩한 성도가 되고자 성화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교훈들은 청교도의 경건 생활에서 찾아야 한다.”(32 페이지)

김재성 교수는 청교도들이 구원을 회심 체험으로 국한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회심 체험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후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청교도들의 신앙과 삶이 매우 신실했고 아름다웠을 것으로 상상되게 하는 말이다. 지금도 청교도 목회하는 교회에 나가는 신자들이 종종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들의 삶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들의 비성경적 신앙의 문제들이 쉽게 발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회심 사상부터가 성경에서 벗어난 개념이었음을 앞의 글에서 살펴보았다. 청교도들의 회심 사상을 쉽게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 한의사가 그의 발가락에 큰 침을 꽂았다. 그랬더니 죽은 사람에게 의식이 생겼다. 그러나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몸에 수의가 입혀지는 과정을 슬픔 가운데 지켜보아야 했고, 곧 이어 관속으로 자신의 몸이 들어가는 것도 다 인식했다 ... 관이 화장장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직원들이 실수록 관을 떨어뜨렸는데, 그 충격으로 인해 입이 열리고 외치게 되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화장장에 들어가기 싫어!’ ... 그 소리를 듣고 그의 아들 딸들이 다시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좋은 약들을 썼더니 그는 다시 살 수 있었다.”

조금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되는 비유인데, 청교도들의 회심 개념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구원 받지 못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지옥에 갈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으로 향하는 능력이 가진 특수한 사람들 이었기 때문이다. 문론 처음부터 그런 능력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영혼의 의사들인 청교도 목회자들이 율법과 하나님의 저주를 잘 배합하여 만들어 내는 특이한 설교 약사발을 자주 받아 마셔야만 그렇게 되었다.

청교도 목회자들이 신자들에게 주는 그 약사발은 '행위언약'-'은혜언약'이라는 비성경적인 언약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생을 받아야 할 불완전한 생명으로 창조된 아담은 율법의 완전한 행위를 통해 구원의 자격을 만들어야 했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했다고 한다. 그것이 청교도들의 행위언약 사상이다.

그런데 아담이 그리하지 못하여 영생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아담 대신 율법의 완전한 행위를 성취하시어 자신의 영생과 아담과 그의 아담의 후손들의 영생의 자격, 즉 의로움을 얻으셨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자기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자신이 율법의 행위를 통해 얻으신 의로움을 전가하여 주신다. 그것이 은혜언약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아무런 자격이 없을지라도 율법의 행위를 성취하시어 의로움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의로움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이론이다. 

은혜언약이라는 것이 참 좋은 것 같으나, 그 속에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얻으신 의로움이라는 성경이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신앙을 왜곡하는 거짓 신학이다.

문제는 또 있다. 행위언약의 저주 하에서 태어나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불행과 비참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은혜언약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것이 청교도들의 목회의 핵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또 하나의 이상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회심 개념이다.

청교도들은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태어날 때 이미 자기의 뜻과 상관없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아담의 저주 안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보통의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알 수없다. 영적 각성이 일어나야만 인간은 행위언약 안에서 저주를 받은 자기의 죄악와 비참과 슬픔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언약으로 들어가는 찾아나서게 된다. 영적 각성은 구원이 아니다. 단지 이간이 자신의 죄와 구원에 대해 스스로 인식하게 되는 단계이다. 영적 각성이 일어났을지라도 영혼의 의사들인 청교도 목사들이 바르게 인도하여 주지 않으면 다시 지옥으로 향하는 보통 인간의 상태로 떨어져 버린다.

청교도들이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방법은 죄인을 향한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는 것이다. 신대륙의 마지막 청교도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했던 이유, 그리고 에드워즈의 부흥을 대각성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사실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함으로 나타난다는 영적각성은 일종의 세뇌일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와 지옥의 불행, 그리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 운명에서 헤어나올 수 없음에 대한 슬픔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이 영적각성인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침을 맞고 자기의 죽음을 느끼기 시작한다는 것과 같은 웃기는 이야기이다. 그게 가능하다면 왜 신약의 사도들이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성령을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만 하는 미련한 방법을 택했는가?

영적 각성과 함께 청교도들의 회심 과정이 시작된다. 스스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 영혼의 비참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살아왔음을 뉘우치고 ... 그러면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 줄 그리스도를 향하여 몰고 간다는 것이 그들의 회심 개념이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자기의 영적 상태를 스스로 인식하고 진단하면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신을 이끌어 간다는 가르침은 없다. 그런 일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믿어 영혼이 중생되고 난 후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경적 회개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데, 청교도 신앙의 회심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면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회심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대신 준수하시어 얻으신 의로움이 그 사람의 것으로 인정되는 은혜가 주어진다. 회심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언약으로 들어가게 만는 이런 과정을 청교도들은 회심준비론 목회라고 했다.

여기까지가 청교도들의 회심을 통한 은혜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은혜언약으로 들어간 청교도 신자들과 아담이 지키지 못한 율법은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으므로 청교도들의 신앙이 율법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신대륙의 저명한 청교도 존 카튼의 말을 보자.

“만일 은혜언약의 교리를 반율법주의로 고소하여 그것이 모세의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르친다고 말한다면 ...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비방인가를 알 수 있다 ... 은혜언약의 자녀들은 율법의 언약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율법의 명령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존 카튼, 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110)

청교도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후에도 여전히 율법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존 카튼을 비롯한 많은 청교도들은 율법을 못 지키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을 못 지켰을 때 받아야 정죄에서는 해방되었을지라도, 하나님 백성으로서 율법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율법준수가 구원 받은 성도에게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 점을 생각하며 김재성 교수의 청교도들의 구원 이후의 거룩한 삶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말들을 다시 읽어보자.

“청교도는 구원을 회심 체험으로 축소시키지 않았다. 구원의 감격과 함께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성취하고 일궈내고자 분투노력했다”(31 페이지)

“오늘 날 현대 교회는 값싼 복음을 남발하고 있다. 구원을 너무나 좁게 해석하면서, 그저 입술로만 다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가볍게 취급한다. 거룩한 성도가 되고자 성화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교훈들은 청교도의 경건 생활에서 찾아야 한다.”(32 페이지)

청교도들의 비성경적인 율법주의가 아름답게 미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론 청교도들의 율법주의는 사람에 따라 모양과 정도가 달랐다. 그러나 그것이 청교도 개혁운동의 전반의 문제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국교회를 더 이상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청교도 교회를 시작했던 분리주의자들은 ‘교회언약’이라는 독특한 제도를 시행했다. 신자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내용을 서약하는 사람만 교인으로 받았는데, 그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겠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영국 국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청교도 교회를 최초로 세웠던 로버트 브라운이 1582년에 출판한 책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양식을 보여주고 그들이 투르크족과 교황주의자들과 그리고 이교도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책>(A Book Which Sheweth the Life and manner of all true Christian, and how unlike they are unto Turkes and Papistes and Heathen folke)에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 하에 들어가는 자들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ㅓ었다.(원종천,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142-45)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과 통치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의 자발적 동의이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조건에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거하고 그 분의 율법을 순종하는 한, 그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말이다."

신약 백성이 다시 구약의 율법을 구약 백성들의 방식으로 지키는 것은 사도가 저주 받는다고 선포한 이단사상이다. 그러나 그 저주받는 이단사상이 청교도 회중교회의 조상들이 가장 중시했던 신앙의 원리였다. 김재성 교수가 말하는 청교도들의 신앙의 실천을 바로 거기에 뿌리는 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에게 구원의 증거로서, 또는 구원 유지의 방법으로 다시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서 매이게 하는 것은 율법주의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를 전하는 자들을 저주받을 이단으로 선포했다. 아담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성도의 증거이고 열매라는 청교도들의 가르침은 사도들이 저주한 이단사상이 아니었을까? 이런 청교도들의 신앙의 특징을 생각하면서 청교도들이 회심만 중시하지 않고 그 이후의 실천도 중시했다는 김재성 교수의 말을 다시 읽어보자.

“청교도는 구원을 회심 체험으로 축소시키지 않았다. 구원의 감격과 함께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성취하고 일궈내고자 분투노력했다”(31 페이지)

“오늘 날 현대 교회는 값싼 복음을 남발하고 있다. 구원을 너무나 좁게 해석하면서, 그저 입술로만 다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가볍게 취급한다. 거룩한 성도가 되고자 성화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교훈들은 청교도의 경건 생활에서 찾아야 한다.”(32 페이지)

그러면 율법의 겉모양과 정신이 이루어지면서도 사도가 저주했던 율법주의 이단사상에 빠지지 않는 성경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을 설명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성도에게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면서도 율법주의 이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길은 성경 전체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선포하고 가르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 8:4)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사도는 성경의 말씀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적용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적용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에게서 율법의 내용과 정신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몰랐다. 구원 받은 자의 삶의 거룩과 열매를 위해 다시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갔다. 다시 율법에 매여서 육신의 의지와 힘으로 율법을 지키게 만들어다. 그래서 청교도하면 율법주의가 생각나게 만들었다. 이 내막을 파악하지 못하는 많은 신학박사님들이 청교도들이 회심만 중시하지 않고 이후의 삶에서의 실현을 위해 애썼다고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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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