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훈 교수(고신, 신학과)
우병훈 교수(고신, 신학과)

고신의 우병훈 교수는 자신의 논문 <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능동적 순종의 교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고,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을 비롯한 교회사의 유수한 신학자들이 인정했으며, 현대 개혁신학자들 대다수에 의해서 지지받는 소중한 교리이다.”(우병훈, 고신 조직신학)

우병훈은 능동적 순종의 교리의 성경적 근거가 분명하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능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가 아담이 지키지 못한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율법의 의, 율법준수자에게 율법이 주는 의로움을 얻었다는 이상한 주장이다. 


1. 그리스도의 율법준수 행적

능동순종 교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방식에 관계되는 신학이다. 구원의 원리에 대한 내용이므로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즉, 능동순종 신학이 진리이면 반드시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영생의 의를 얻기 위해 모세의 계명들을 지키시고자 노력하신 흔적이 많이 나와야 한다. 성경에서 모세의 계명들을 지키시려고 노력하신 그리스도의 행적을 찾을 수 없다면 능동순종 교리는 완전히 허구이다. 

마치 도서관에 드나드는 모습이 한 번도 포착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법고시에 패스하여 유명해지고 벼락 출세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의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율법 준수에 매진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면, 능동순종 주장이 그런 것으로 결론나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율법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실천하시려고 신경쓰신 모습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눅 2:21,22)

그리스도께서 태어난지 8일 되었을 때 어머니의 품에 안기어 성전에서 율법에 정해진 어떤 의식을 했다고 성경에 나온다. 이것이 율법의 의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신 행위로 볼 수 있을까? 이 사건은 그리스도 자신이 의도를 가지고 율법준수하신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차라리 이 일은 그리스도의 부모님들의 율법준수 신앙의 사례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구를 비롯하여 여러 능동순종 주장자들이 그리스도의 율법준수 사례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이 내용이다. 성경의 어떤 사건을 그리스도가 영생의 의를 얻기 위하여 율법준수하신 것으로 분류하려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가 자신의 의지로서 하신 일이어야 마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율법준수 사례가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에 나타났다면 능동순종 교리의 정당성의 근거로서 가장 좋을 것이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눅 2:41,42)

이 내용을 영생의 의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키신 것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내용도 그리스도가 자신의 의지와 목적을 따라 율법을 준수하신 행적이라고 분류하기 어렵다. 차라리 그리스도의 부모님들의 율법을 지키신 신실한 삶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라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의 내용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의를 얻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내용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미리 율법을 보내시어 자기 백성들의 구원의 길을 예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성전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따라 세워지고 운영되는 구약의 성전의 주인이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스스로 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9,50)

그리스도의 율법준수 행위로 거론되는 사례들은 이 정도이다.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승구, 김병훈, 김재성, 김효남, 권경철, 우병훈 교수 등이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여 자신과 우리의 영생에 필요한 의(자격, 권리)를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영생의 의를 얻고자 율법을 준수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모래 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어렵다.   

이런 주장을 하는 신학교 교수들의 고집을 보면, 신학이 성경과 무슨 상관인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학교 교수들에게 성경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우리에게 물려줄 영생의 의(자격)를 얻으셨고, 심지어 그리하심으로 그리스도 자신도 영생에 들어갔다는 것이 신학교 교수들이 고집하는 무서운 주장이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리스도가 율법준수에 힘쓰시는 모습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다. 성경에서 근거를 볼 수 있는 구원론 주장은 결국 이단으로 가는 길이다.  


2. 능동순종의 성경적 근거

“여러 성경적 근거 중에 가장 자주 제시되었던 핵심구절은 롬 5:19와 갈 4:4~5이다. 롬 5:19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와 대조를 보여주는 맥락에 위치한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한다.“(우병훈)

우병훈은 로마서 5:19절과 갈라디아서 4:4,5절이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의 근거라고 하였다. 과연 그럴까?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이 구절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우리의 영생의 자격이 되는 의로움을 얻었다는 능동순종 교리의 성경적 근거인가? 우병훈은 성경을 띄엄띄엄 보는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보았으면, 이런 이상한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천국 영생의 자격,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얻었졌다고 말했다. 성경은 우리가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의로움, 칭의)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우병훈이 인용한 롬 5:19절은 아담의 선악과 반역죄와 아담의 그 죗값을 그리스도가 자기의 목숨으로 완전하게 지불하심으로 아담의 죄가 무효화되었다는 내용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아담의 반역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언제나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해결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우병훈은 교묘하게 아담의 선악과 반역죄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로 치유된 것처럼 조작하려고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심을 바꾸는 행위, 즉 이단사상 주장이나 마찬가지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또한 우병훈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로 인한 칭의획득 거짓 신학의 성경적 근거라고 하였다. 우병훈이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내용도 바로 그 앞부분을 보면 의미가 분명하게 해석되어진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갈 4:1-3)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보내어 사람이 자기의 죄를 알게 하고, 사람이 율법을 배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방법으로 자기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노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죄를 지적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 자기를 구원받게 만드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이 스스로 죄를 이기려는 환상에서 벗어나 자기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자를 고대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그리스도가 오시어 율법이 지적하는 사람의 죗값으로 자기의 목숨을 대신 드리셨다. 그리스도가 오시어 자기 목숨으로 사람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었으므로 더 이상 육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려는 부질없는 행동을 하지 말고, 오직 대신 죽으심으로 영생의 의를 선물하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지적하는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대신 율법의 정죄를 받으심으로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서 더 이상의 율법의 저주가 없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같은 성경 앞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핍박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인 바울이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지적하는 죄를 가진 사람이 받아야 할 저주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심으로 죄인들을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게 만드셨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죄인들을위해 대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여 의로움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 즉 범죄자는 죽어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를 그리스도가 대신 당하셨다.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redeemed, 되찾다)되는 것이다. 죄에서 해방됨으로 영생을 위해 필요한 자격, 즉 '의로움'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신학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을 강조하는 두 구절을 다시 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두 구절의 핵심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갈 3:13),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갈 4:5)이다. 과연 무슨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했는가? 우병훈이 갈 4:4,5절이 능동순종 교리의 근거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가 완전한 율법순종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갈 4:4,5절이 능동순종의 근거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는 방법은 율법준수가 아니었다. 율법대로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갈 3:13)

이와 같이 성경은 죄와 무관한 출생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완전한 순종으로 아담의 불순종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대신 저주 받아 우리의 죗값을 완전하게 지불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우병훈이 무엇이라 주장하는지 보자.

“많은 성경해석자들이 말한 것처럼, 여기에서 ‘율법 아래’라는 것은 ‘율법의 규율 아래’를 뜻한다. 따라서 롬 5:19와 갈 4:4~5를 종합하면, 전생애에서 율법을 지키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수동적 순종이 함께 우리의 의가 되어 속량 곧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우병훈)

우병훈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의 수동적 순종이 함께 우리의 의가 되어 구원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하였다. 우병훈이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수동적 순종이 함께 우리의 의가 되어’라고 말하므로 많은 독자들이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지금 우병훈은 결국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는 적극적인 의로움을 얻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둘이 절대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기존의 그릇된 신학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만 있으면 천국에 가게 하는 적극적인 의로움이 없고,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만 있으면 적극적인 의가 있을지라도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죄 사함이 없으므로 둘이 떨어져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들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하고 이 둘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요약해 보자.

1)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영생의 의를 얻기 위해 율법준수하려고 의도적으로 행동하신 흔적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라고 주장되는 내용들은 단지 그리스도가 유대인 남자로 태어나셨으므로 거치신 유대인들의 의례와 율법적 관습 수준의 사건들이었다고 보아야 맞다.

2) 우병훈이 능동순종 교리의 근거로 주장한 롬 5:19절과 갈 4:4,5절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칭의를 얻었다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두 구절은 단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 율법의 정죄가 사라졌고 죄사함과 의로움이 주어졌다는 내용이다.

3) 우병훈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함께 우리의 의가 되어 속량 곧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내린 결론은 우리에게 혼동을 주는 여전히 위험한 주장이다. 저들이 사용하고 고집하는 ‘능동적 순종’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그리스도가 율법순종으로 영생의 의를 획득했고 전가했다”라는 거짓 교리가 내포되었다.

저들은 결코 이 거짓 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저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은 죄 사함을 주었으나 천국에 들어가게 만드는 칭의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우병훈이 십자가에서 칭의가 주어졌다고 믿으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면, 우병훈이 신자의 의의 기원을 율법과 십자가 두 개로 본다는 것이므로 더욱 위험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된다.

“죄와 무관한 방식으로 사람이 되신 의로우신 그리스도는 첫 아담과 달리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셨다. 우리를 죄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율법대로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심으로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율법의 정죄가 떠나고 사라짐이 곧 의로워짐이다. 왜냐하면 죄의 담이 허물어지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로 연합시키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다음에는 우병훈이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이 능동순종을 지지했다고 설명하는 그릇된 내용들을 살퍼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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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