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는 설교로 듣거나 따로 읽어본 적이 거의 없는 책이다. 성경통독하면서 몇 번 읽어보았고 다양한 해석도 들어보았지만 별로 공감되지 않았다. 계시록과 함께 가장 난해한 책으로 꼽히는만큼 이해가 어려운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솔로몬에 대해서 내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친히 경험한 자였고 누구보다도 큰 은혜를 받은 자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를 지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이방여인들을 아내와 첩으로 맞아들여서 그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 백성들도 타락시켰다. 화려한 궁전을 지으면서 금 666달란트라는 과도한 세금징수와 고된 노동으로 백성을 혹사했다. 수많은 아들들이 있지만 하필 몰록을 섬겼던 아람여인에게서 낳은 르호보암을 후계자로 해서 그를 통해서 우상숭배가 이어지게 했다.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결국 우상숭배로 멸망하게 된 데에는 솔로몬의 책임이 막중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솔로몬의 책들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했다. 잠언이나 전도서의 짧막하고 결론적인 가르침들보다는, 역사서나 선지서가 주는 지혜나 도전이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고 슬프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승리하는 삶인지를 가르치며 결단하게도 해주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도 너무나 깊은 사랑을 보여주며 소망과 기쁨으로 가슴을 뛰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구태어 솔로몬의 책들을 읽어야 하나 하고 혼자 질문하곤 했다. 그들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잘 납득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율법과 은혜의 관점에서 해석한 김 목사님의 아가서 강해를 듣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읽어보니, 솔로몬은 자신을 술람미에 비유하고 있었다. 자신은 율법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은혜로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한 것이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데 누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 시편이라면, 죄인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노래하며 응답해주신 것이 아가서였다. 아가서는 율법시대에 기록되었지만 복음의 은혜를 너무나 아름답게 노래한 신약의 메시지였다. 그의 아가서 강해에 도움을 받아 다시 정리해 보았다.
 

자격없이 사랑받는 술람미 여인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술람미는 얼굴이 검은 노예 여인입니다. 술람미와 대조되어 예루살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저마다 재색을 겸비한 훌륭한 외모의 여자들입니다. 그들은 왕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보입니다. 한편 술람미는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많은 여인들을 제치고 술람미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희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여인들은 포도원 밭의 검고 못난 술람미 앞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합니다. 술람미는 자신이 유목민의 검고 거친 게달의 장막처럼 못생겼지만 왕의 휘장처럼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왕이 그렇게 보아주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겠다고 애씁니다. 한편 술람미는 은혜를 입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 병자나 고아나 과부와 같은 비천한 자들로서 감히 왕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왕이신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술람미를 신부로 선택하고 사랑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자식들은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로마서 9:11)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신랑이 신부를 선택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포도원의 검고 못생긴 노예였을 때,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묻지 않으시고 신랑이 와서 날 선택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한 신부를 목숨걸고 사랑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사랑받으려 애쓰는 예루살렘 여인들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받을 근거를 찾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려고 열심히 애씁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외모 가꾸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신이 되어버린 우리들은 외모와 행위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고 사랑받으려 합니다. 그리고 열심과 노력을 서로 인정해 주면서 “당신이야말로 신랑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신부”라고 추켜 세웁니다. 마귀는 온갖 감언이설로 우리 행실의 아름다움과 훌륭함과 위대함을 칭찬하며 비위를 맞춰 줍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비위를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자기의’의 행위들을 다 부정해 버리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실히 보게 하십니다. 제발 감추어 주었으면 하는 그 비밀스러운 것까지 다 까발려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고백을 하십니다!

신앙생활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것이기 이전에, 창녀같이 더럽고 추악한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는 고통스러운 현장입니다. 그 속에 말씀이 떨어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이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이 힘쓰고 애써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며 교만의 자리로 갑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에 미달되었다고 생각하며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내 모습으로는 절대로 신랑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움에 떨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매 순간을 헉헉대며 삽니다.

그게 양심있고 겸손한 자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고 폄훼하고 불신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별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8-19)
 

 

포도원의 여우 내쫒기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를 격동시킵니다. 너 같은 시커먼 노예가 어떻게 위대하고 위대한 솔로몬 왕의 신부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아무리 담대했을지라도 예루살렘 여자들의 비아냥 속에서 마음편했을 리가 없지요.

마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우리를 비아냥 거릴 때 마음이 뜨끔한 것과 같습니다. 아가서 기자는 그러한 율법주의의 공격을 '포도원을 허는 여우'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여우를 잡으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그런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신랑이 떠나가 버릴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두려움이 꿈 속에서 나타납니다. 꿈에서 신랑이 어디로 떠나 버립니다. 술람미는 안타깝게 신랑을 찾아다닙니다. 곧 신랑이 나타납니다. 신랑은 늘 신부의 곁에 있었던 겁니다. 신랑은 예루살렘 여인들 앞에서 보란듯이 술람미를 꼭 껴안아 줍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었을까요?

그때 술람미는 신랑을 꼭 붙들고 `내 어미의 집,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은 자신 존재의 근본, 즉 사랑받음의 근본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은 외모가 훌륭하거나 행위가 근사하거나 무슨 자격이 있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신랑의 일방적인 선택과 사랑에 의해 신부로 간택된 것임을 재확인 받습니다.

이제는 여우들의 참소가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술람미는 자신을 참소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외칩니다.

“이제 나를 흔들지 마, 나를 방해하지 마. 난 알았어. 나의 처음 자리가 어디인지를.. 난 신랑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해 신부가 된 사람이야. 그러니까 자꾸 나의 자격이나 조건을 들춰내며 날 격동시키지 마.”

우리는 고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신랑 호세아(헬라어로 ‘예수’)가 그토록 열심히 사랑해 주는데도 고멜은 열심히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지요. 그러다가 단물이 다 빠지고 나니까 노예 시장에 팔려 버립니다. 그때 신랑 호세아가 은 열 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은 열 다섯과 같은 가치)으로 그 창녀 같은 신부를 사옵니다.

우리도 신랑 아닌 다른 남자들(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 등)에게 기웃거리다가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던 자였습니다. 호세아가 예표가 된 것처럼 예수님은 유다에게 은 삼십에 팔려서 우리의 속전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자들을 자신의 신부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죽었어야할 창녀의 자리에서 왕의 신부의 자리로 옮겨앉은 대박 맞은 인생들입니다. 그걸 실존적 경험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성화와 순교

천지만물의 창조주께서 흙을 신부로 선택하셨습니다. 그 흙은 자꾸 땅의 세상에 동화되려 합니다. 땅에 대한 연정을 못버린 것입니다. 흙이니까요. 거기서 나왔으니까요. 그래서 흙의 삶을 추구하며 흙의 삶을 누리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신랑은 신랑 나라의 통치 원리를 신부 나라의 생활 원리로 적용해서 훈련시키십니다. 신랑은 신부의 삶을 차압해 버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가십니다.

성도는 자기가 받은 것이 확인되면 반드시 그 받은 것을 내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성화는 그런 겁니다! 무작정 열심히 노력해서 기를 쓰며 선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이 확인될 때 그 받은 것이 나에게서 흘러나가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 이것이 진짜 성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이 주신 것만 내놓으라고 하세요.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내놓으라고 하신 것은 이삭입니다! 이삭은 원래 아브라함의 것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후손이란 말입니다. `없음`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있음`이 되어 아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주신 것을 도로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내가 생산해 낸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상환을 요구하는 상대방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아는 이들은 아낌없이 그것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왕이 되었습니까? 솔로몬은 원래 `없음`입니다. 우리야의 죽음을 먹고 은혜에 의해 탄생한 자입니다. 다윗의 간음과 살인죄로 인해 하나님이 솔로몬의 형을 죽게 하셨을 때, 다윗도 함께 죽이셨다면 솔로몬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로 탄생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솔로몬이 잉태된 자리는 어디입니까? 간음한 여인 밧세바의 태입니다. 솔로몬은 그렇게 어미의 태에서부터 죄 덩어리로 존재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여디디야)을 입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술람미도 그런 사랑을 입은 자였습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을 `어미의 집, 자신을 잉태한 이의 방` 으로 데리고 갔다는 어구 속에 그런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교회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사랑하심으로 인해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술람미가 왕의 사랑을 깨닫고 왕을 사랑하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알고 사랑하게 될 때 가장 귀한 생명까지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힘써 알라고 권면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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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옥 선교사는 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 산호제바이블컬리지에서 신학, 산호제주립대대학원에서 소셜웤을 전공했다. 서울과 산호제에서 다년간 직장을 다녔고 산호제에서는 교회에서 전도사로도 일했다. 현재는 예수님과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세상이 갖는 수많은 오해들에 대해 답변하며 인터넷을 통해 전도하고 있다.
저서 <예수신화?예수실화!>는 성경은 신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에서 기록된 역사서며, 예수님은 성인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변증한다. <시대읽기>는 기독교를 왜곡하거나 혼합해서 파괴하려는 반기독교적 세상의 정체와 그것의 반인륜적인 역사를 폭로한다. 이들 내용을 요약하고 추가해서 <예수는 실화다>와 <성경적 시대읽기>를 다시 출간했다. 최근 출간된 <다시살다>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된 개인 이야기를 간증한다. 번역서로는 <당신은 괜찮습니까?>와 <회복프라소>가 있는데 성경적 회개와 용서와 예수 안에서의 치유와 회복을 주제로 한다. joookki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