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도마의 한반도 선교에 대한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도 도마의 한반도 선교 주장에 대한 신학적 입장과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편집자 주>
 

 

사도 도마는 누구인가

도마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성경에는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도마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도마는 예수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최초로 고백한 제자였다. 이 고백을 통해 도마는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가장 먼저 정확하게 인식하고 믿음을 보인 최초의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가 예수의 제자요 사도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tory) 3권에서, 전승에 따르면 도마가 파르티아(Partia)를 선교 지역으로 할당받았다고 기록에 남기고 있다. 도마의 한반도 선교 가능성은, 그가 파르티아 뿐 아니라 파르티아에 인접한 인도까지 와서 선교하였다는 데서 비롯된다.


사도 도마의 국내 선교 가능성에 대한 입장 

이와 같은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를 추적한 대표적 국내 학자로는, 한신대 명예교수를 지낸 이장식 교수와 침례교의 정학봉 목사가 있다. 이장식 교수는 자신이 고대 한반도 기독교 전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1955년 캐나다 퀸스(Queen's)대학 유학 중 교회사 과제물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동양에 전파된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책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도 도마에 대한 관심도 그 일련의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목회와 신학교 교수직을 병행한 정 박사는 침례교 목회자이면서 장로교 신학교 교수를 지낸 독특한 이력을 가진 학자이며, 다작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사도 도마의 인도 선교를 다룬 자신의 저서에서 도마의 한반도 선교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사도 도마가 순교하기 전 제3차 선교여행 또는 동아시아 선교 과정에서 중국의 깊은 곳까지 선교하고 인도로 돌아왔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중국의 깊은 곳을 바로 한반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중등 역사교사를 지낸 유우식 장로가 최초 발견하였다는 두 지역을 소개한다. 바로 경북 영주시 평은면 왕유리의 바위석상(일명 분처 바위)과, 경북 청송 주왕산 기암(旗岩) 주변의 초대 기독교 유적지라고 주장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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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분처바위 모습(KAIST 박진호 연구원 제공)


위 사진의 분처 바위는 필자의 지인이며 최근에는 디지털 복원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진호 연구원(전 KAIST, 현 광주과기원)이 필자가 알려 준 정보를 바탕으로 호기심을 갖고 1990년대 초반 입대를 앞두고 직접 관련 장소를 답사하여 사다리를 이용하여 이끼를 제거하고 촬영한 것이다.

유우식 장로는 분처 바위 인물상 우편에 있는 4개의 정방형 문양이 바로 도마와 그의 신체를 나타내는 히브리 문자이고, 청송 주왕산 바위 유적에서 '예수'(禮需)라든가 주님을 상징하는 '주왕'(周王)이라는 글들이 새겨진 것을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정 박사는 이 유적들이 발견된 지점이 가야 연맹의 북쪽 끝인 점과, 김수로 왕이 김해 가야를 세운 주후 42년이 사도 도마가 당시 세계의 끝인 동쪽 끝에서 선교했던 시기였을 것이라는 추정 아래, 이들을 확실한 도마 관련 유적으로 보고 있다.

유우식 장로는 1986년 분처 바위 유적을 발견하기 전, 이미 1984년 6월 2일 한국미술사학회가 주관한 제27회 전국역사학대회 한국사부(韓國史部)에서 "중원고구려비와 관련사의 고찰"의 요지(要旨) 발표를 통해 하환인(桓因)을 아브라함으로, 환웅(桓雄)을 야곱으로, 호태(好太)를 태신(太信)으로, 개구리를 비유(譬喩)된 부활 신앙으로, 노객(奴客)을 ‘여자의 아이(子)를 구주(救主)로 섬기는 사람’으로, 현묘지도(玄妙之道)를 기독교로, 신라매금(新羅寐錦)을 실성(實聖)으로, 실성의 실을 성신숭배(즉 기독교신자)의 뜻으로, 충주 노은면과 앙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국망산(國望山)을 호태왕(광개토대왕)이 바라본 산으로, 고모루(古牟婁) 성을 중원고구려비가 위치한 입석(立石) 마을의 뒷산에 있는 장미산성(薔薇山城)으로 비정하여, 발표 도중과 이후에 학회 참석자들에게 강한 반발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우식 장로가 주장하듯 호태왕이 기독교 신자인 노객주(奴客主)였고 선교에 열심이었으며 전쟁 수행이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필자의 고향인 충주 지역 주변에 중원고구려비 뿐 아니라 많은 기독교 유적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 또한 중국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나 삼국사기에도 그런 사실의 편린이라도 나와야 한다. 그런 증거는 전혀 없다.

유우식 장로는 "분처 바위"를 찾기 위해 1986년 2월 23일 밤 열차편으로 청량리역에서 출발하여 영주역에 도착했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평은면사무소에 들러, 기도 응답으로 '바위로 유명한 곳'을 찾아 왔노라고 수소문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시작된 분처 바위에 대한 답사와 연구에 있어 유 장로는 수시로 "주님께 땀 흘린 기도와 성령의 가르침으로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하여, 실증사학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연구의 신뢰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 같은 서술 방식이 개인의 신앙적 열성과 노고를 증거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관련 학자들에게는 신뢰감을 떨어뜨리기에 안타까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히브리 문자 명문도 어떤 문헌이나 구전을 따른 추적 발견이 아닌, 금식기도원에서 성령의 감동과 명령을 받아 영주로 내려가 확인하였다는 식의 서술은 역사 교사답지 않은, 신앙을 전제한 진술로 보여 정통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외면하는 동기가 되는 듯하여 안타깝다.

다만 1986년 2월 23-24일부터 1988년 8월 15일에 이르기까지 13회에 걸쳐 분처 바위를 비롯해 영주-안동을 답사한 유 장로의 열성만큼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사가 이장식 교수도 도마의 인도 선교와 관련하여 유 장로의 발견 주장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다만 유 장로가 탁본으로 확인하였다는 "명전행"(明全行)이나 "야소화왕인도자도마·명(耶蘇花王引導者刀馬·明 )이라는 글자에 대해, 눈으로 보이지 않으며 다른 탁본에서는 이 같은 한자(漢字)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자 문화권인 한반도에서 석상을 조각한 사람이 한자에 매우 서툴다는 점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이 교수는 유 장로가 석상에서 찾았다는, 나귀 탄 예수의 모습이나 막달라 마리아의 뒷모습도 고증이 쉽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본 초기 기독교의 한반도 선교 평가

기독교는 기독교적 문화나 문명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국내에서 기독교적 흔적이 발견된다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또한 그를 찾기 위한 인간적 노력이나 열매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기독교의 본질은 계시에 따른 말씀과 믿음이다. 문화와 문명과 유물의 증거는, 반드시 말씀과 믿음에 대한 전파의 흔적과 함께 나타나야 한다. 즉 어떤 식으로든 단순한 기독 유물이 아닌 신앙고백 공동체에 대한 구전이나 문헌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통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형상숭배 종교는 아니다. 때로 기독교는 성유물(聖遺物)조차 신앙의 바람직·유익한 도구로 보지 않는다. 성유물이란 것은 결국 인간을 유물 자체를 섬기는 형상 숭배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남미(南美) 기독교의 경우에서, 바로 이런 토착화된 형상숭배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칼빈은 성유물에 대한 꼼꼼한 비판을 통해,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그릇된 성유물들이 만연하였는지를 우리들에게 알려 준다. 칼빈은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고 암흑과 어리석음의 지배 아래 있는지를 알려 주는 증거일 뿐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체를 숨기신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법궤의 소재가 지금까지 여전히 오리무중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확인이 쉽지 않은 일부 개연성이 있는 유물만으로는 기독교 전파에 대한 구체적 실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만에 하나 기독교 전파에 대한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하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가진 사도 도마의 복음이 아니라 논란이 많은 유물로 도마의 흔적을 확인하려는 시도는, 이장식 교수의 말대로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겠지만 판단을 앞세우고 접근할 때는 과학적이지 못할 수도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같은 유물이 사실로 판명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증거는 분명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조덕영 박사(조직신학)
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전 김천대-안양대-평택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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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다. 강남대, 개신대학원, 건양대, 명지대, 서울신(예장 합동), 서울기독대학원, 백석대와 백석대학원, 피어선총신, 한세대신대원에서 가르쳤고, 안양대 겸임교수, 에일린신학연구원 신대원장을 역임했다. <과학으로 푸는 창조의 비밀>’(전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공저), <기독교와 과학> 등 30여 권의 역저서를 발행했고, 다양한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한다.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비축하고 있는 인터넷 신학연구소'(www.kictnet.net)을 운영하며, 현재 참기쁜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김천대, 평택대의 겸임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