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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청교도 회심준비론은 공포와 불안을 유발하는 율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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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즈-청교도 회심준비론은 공포와 불안을 유발하는 율법주의
  • 정이철
  • 승인 2021.06.02 23:0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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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용식 목사와 ‘한국 기독교 이단 상담소 협회’가 지난 5월 21일 성산교회(인천, 고광종 목사)에서 청교도 신학의 회심준비론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필자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환영하였다.

최근 한국교회에서 필자 이상으로 청교도 신학 연구에 힘을 쏟았던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 자부한다. 필자의 인생에서 지난 2년은 청교도 신학 연구에 깊이 헌신된 시간이었다. 이제 곧 청교도 신학의 역사를 조망하는 책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이 출판된다. 이어서 청교도 개혁운동 내부의 다양한 종파들의 출현, 발전, 특징을 조망하는 내용의 책, 그리고 다음에 청교도 신학의 대표적인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력을 설명하는 책이 준비되고 있다.

필자는 진용식 목사의 회심준비론 강의안을 읽고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진용식 목사가 참으로 귀한 일을 했다고 확신한다. 진용식 목사는 신천지, 안상홍, JMS 등을 앞장서 연구하여 교회들에게 알려준 대표적인 이단연구가이다. 그런데 진용식 목사가 이번에는 이단연구자들의 관심과 연구의 범위에 대한 그릇된 통념을 깨뜨려주었다. 진정한 이단연구의 바탕이 올바른 성경 해석과 개혁신학이라는 사실을 진용식 목사가 보여주었다.
 

 

진용식 목사의 회심준비론에 대한 발표 후 청교도 신학에 헌신된 분들에게서 반론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조엘 비키의 회심준비론 신학 서적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한 <마르투스 출판사> 측, 그리고 청교도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김효남 교수 등이 반론을 선보였다.

마르투스 측의 반론의 주된 내용은 어거스틴, 칼빈 등 개혁신학의 아버지들로 여겨지는 사람들도 이미 회심준비론을 가르쳤다는 것이었다. 김효남 교수는 회중교회파 청교도들 외에 장로교회파 청교도들도 회심준비론을 가르쳤다는 내용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청교도 회심준비론이란?

청교도 신학의 회심준비론(Preparation)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 인생을 섭리 가운데 주관하시고 준비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께서 택하신 어떤 사람의 사업이나 건강이 크게 위기에 처하는 것을 허락하여 그 사람의 마음이 낮아져서 복음에 대해 수용성있는 자세를 가지게 만드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회심준비론이라고 하지 않는다.

필자는 일찍 질병으로 고난을 당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게 만드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필자 주변에 복음을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서 영향을 받았다. 필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이 두 가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과정과 요소를 회심준비론이라고 한다면, 필자나 진용식 목사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를 볼 때, 복음이 수용성이 높은 지역, 계층으로 먼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신분상으로 하층민들,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픔과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진다. 복음에 대한 수용성은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복음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따라 준비된다.

다시 말하지만, 청교도 신학이 이런 내용을 회심준비라고 주장한다면 필자와 진용식 목사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청교도 회심준비론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이단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회심준비론에 이단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성경과 반대되는 율법주의 구원관

회심준비론은 하나님이 처음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했다는 율법주의 구원을 전제하고 있다. 구원이 율법으로부터 나온다는 거짓된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들은 율법과 구원을 연관시키지 않았다. 사도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는데 주력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행 8:4)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8:2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5)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행 8:40)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행 10:36)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지려고 달려드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14:7)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행 14:21)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 16:10)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행 20:24)

이와 같이 신약의 사도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교회에 규칙적으로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약의 율법의 저주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전하는데 주력하였다.
 

청교도들의 아담에 대한 오해

왜 청교도들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구약의 율법의 저주를 가르치는데 주력했을까? 그들이 아담에 대해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아담을 이미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영생 안에서 창조되지 않고 장차 자력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 백성이 되어야 할 불안정한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영생과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는 무관하게 창조되었고, 다만 하나님이 백성이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오해했다.

청교도들은 아담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으면 그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영생을 주셨을 것이고, 또한 그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셨을 것이라는 괴이한 ‘행위언약’이라는 것이 창조 시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다고 오해하였다. 아담의 창조 시의 상태와 아담이 저주받게 만든 원죄에 대해 오해하였으므로 이후 청교도들의 신학과 신앙의 여러 부분에서 비성경적인 왜곡이 발생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아담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였고, (어차피 영생은 없었으나) 그래서 하나님이 확실한 저주를 받아 영원한 죽음에 처해졌다고 보았다. 그러면 청교도들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고 이해하였을까?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의 자격을 얻었고(능동순종),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아담과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았다고(수동순종) 이해하였다.
 

청교도들의 행위언약을 대체하는 은혜언약

청교도들은 율법을 지켜서 영생의 자격을 얻으시고(능동순종),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신(수동순종) 그리스도가 아담이 완성하지 못한 최초의 '행위언약'을 대신 완성하신 후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언약'을 만드셨다고 가르쳤다. 은혜언약이란 아담 대신 율법을 지키셨고(능동순종) 아담과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수동순종) 그리스도가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두 가지 공로, 율법준수와 십자가의 공로를 전가하여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에게 구원이란 아담의 행위언약 하에서 저주받은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언약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에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것은 곧 율법을 지키지 않아 저주받은 아담 대신 능동순종(율법준수)하고 아담과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수동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아 행위언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가 자기의 공로에 근거하여 세우신 은혜언약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청교도 목회의 핵심 : 회심준비론

그러므로 청교도 목회자들의 목회는 교인들이 행위언약의 저주 상태에서 태어났음을 인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능동순종하고 수동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의 전가를 받아 새로운 은혜언약으로 이동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교도 목회자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구원을 위해 먼저 아담에게 요구되었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율법준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문론 청교도들의 이런 율법주의는 성경의 하나님과는 먼지 만큼도 관련이 없는 괴이한 사상이다. 

청교도들은 능동순종-수동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아 은혜언약으로 들어가는 길이 교인들에게 쉽게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은 먼저 사람이 행위언약의 저주 상태에서 태어났음을 인식하고 뼈저리게 체험해야만 비로소 은혜언약으로 이동하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율법의 저주 상태에 떨어져 있는 비참한 상태를 교인들이 스스로 알고 절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처음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구원의 길로 '완전한 율법준수'를 요구했으므로 지금 우리도 아담이 못 지지킨 율법준수에 힘쓰면서, 구원의 자격인 율법의 요구에 합당하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깊이 좌절하고 낙망하게 만드는 것이 구원 여정의 시작이라고 가르쳤다.

청교도 목회자들의 성공

청교도 목회자들에게 목회의 일차적 성공은 교회에 잘 다니는 교인들이 스스로 율법을 부지런히 지키도록 강요하고, 교인들이 스스로 율법의 요구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체감하여 절망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드워즈와 청교도 목회자들은 진노하신 하나님의 분노와 지옥의 참상에 대해 공포를 일으키는 설교를 집요하게 시행했다.

교회에 잘 다니고 있는 교인들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자신에 다가올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인식하고서 죽음과 같은 낙심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청교도 목회자들의 성공이었다. 청교도 목사들은 교인들이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많이 듣고 심각한 두려움에 빠져서 낙심하게 되면, 그때부터 교인들이 스스로 아담과 자신을 대신하여 율법준수(능동순종)에 성공하고 아담과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수동순종)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는 구원을 얻을 길이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청교도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영혼의 의사라고 자화자잔한 이유는 죄인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를 관찰하다가 죄인이 낙심하고 절망함으로 구원의 여정으로 들어서는 과정이 무르익었을 때를 잘 포착하여 능동순종-수동순종으로 우리의 구원을 자격을 마련하신 그리스도의 '두날개 복음'을 처방함으로 죄인의 회심을 유도하기를 잘 한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의 저주를 먹고 낙심한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즉시 구원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능동순종하고 수동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공로가 자기에게 적용되어야만 회심(구원)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두날개 복음의 공로를 적용하여 회심(구원)되게 하여 주시기를 고대하고 갈망하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되었다. 언제 구원(회심)이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율법준수, 회개, 기도, 예배, 상담, 성경공부에 매진해야 하니,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은 신자들이 반드시 피를 말리는 고뇌의 시간을 거치게 만드는 참으로 괴이한 사상이다.

역사적 자료들을 보면, 이 과정에서 우울증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다. 청교도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능동순종-수동순종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하여 회심(구원)되게 하시는 순간을 “성령의 회심체험”이라고 했다. 청교도들의 회심체험은 구원파처럼 구원이 깨달아지는 '내적인 빛'이거나 '외적으로 나타나는 신비현상'이었다. 문론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참된 회심의 증거라고 가르치기도 했으나, 그것 보다는 번쩍이며 다가오는 내적인 빛(깨달음)과 외적인 신비현상에 집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맺는 말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예수 믿도록 인생의 여정과 상황을 섭리 가운데 준비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은 이미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에게 구약의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반복적으로 가르쳐서 두려움과 낙심에 빠지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하는 이단적인 사상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교인들을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거반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아담이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로 언약(행위언약)했으나,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저주를 받았다는 청교도들의 잘못된 성경 이해에서 이런 엉뚱한 복음전도와 양육 방식이 시작되었다.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은 그리스도가 아담이 못 지킨 율법을 대신 잘 지키시고(능동순종), 아담과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수동순종) 공로를 사모하게 만들고자 구약의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진하게 선포하여 멀쩡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하고 영적으로 더욱 더 죽게 만드는 것을 목표한다. 정말 괴이한 사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사도들의 본을 따라야 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죽으심,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시어 택하신 자들을 믿게 하셨다. 성령의 감화와 설득으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영혼이 살아나고(중생), 그와 동시에 예배와 기도와 성화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쳐야 한다. 중생 전에 우리 자신이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키고, 지옥의 고통이나 영생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불능한 일이다.

목회자들과 전도자들은 오직 성령이 복음과 함께 역사하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가 증거될 때 역사하시어 죄인에게 회개를 일으키신다. 서철원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성령이 역사하시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구원 사역을 선포할 때이다. 성령은 전도자이시지만, 자기 스스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복음선포와 함께 역사하신다. 그냥 예수 믿으라고 하는 단순한 권고는 성령이 일하시기에 합당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다. 성령은 전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구원 사역을 전파하고 증거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사역이 분명히 전파되는 자리이다."(구원론, 50-51)

"복음의 내용을 온전히 전하려면 창조경륜부터 시작해야 한다.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언약을 체결하셔서 창조주만 하나님으로 섬기도록 하셨다. 그런데 반역이 생겼고 그로써 죽음과 저주가 왔다. 하나님은 반역을 무효화하는 새로운 조치를 하셨다. 반역한 백성을 돌이켜 자기의 백성으로 삼기로 하셨다. 이 목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피 흘리심으로 죗값을 지불하시고 죄를 용서하시어 자기 백성으로 돌이키는 일을 수행하셨다. 이 복음진리를 말해야 한다."(구원론, 51-52)

우리는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전하지 말고, 시시때때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생애와 인격과 죽으심과 부활을 전해야 한다. 그리하면 성령이 역사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죄인의 영혼이 먼저 살고, 그때부터 일평생의 과정으로 삶의 변화와 예배와 기도가 시작된다. 그때부터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아 있는 구약의 율법의 내용과 정신에도 반응하고 실천하게 된다. 다음에는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의 ‘영적각성’ 개념이 얼마나 심각한 이단적 주장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에서 연구했다. 최근 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Ph.D)에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고,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2021년 5월 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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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2021-06-03 22:45:37
지난 역사 속에서 율법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개인들에게 율법이 몽학선생 역할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이 몽학선생 노릇을 했다는 것은 구원사적으로, 즉 그리스도가 나타나시어 구원사역을 하시기 위해 율법을 먼저 보내시어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필요성을 알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교도주의자들, 특히 회심준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구원서정에서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먼저 율법을 지켜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심각한 복음의 왜곡이 초래됩니다. 지금은 개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먼저 율법을 알고 지켜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2021-06-03 15:57:36
전에도 한번 올린 노승수 목사가 쓴(https://lewisnoh.tistory.com/1588) '율법의 용도'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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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파와 루터파 간에도 이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율법의 용도에 대해 성경의 석의를 통해 합의한 바는 4가지 정도며 루터파와 칼뱅파의 이해에는 서로 다른 구분으로 3가지 용도를 이해하고 전개했다.

1. 첫째 정치적 또는 시민법의 용도(usus politicus sive civillis)로 죄를 억제하는 용도로 세상에 죄가 관영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라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자에게 형벌을 줌으로 세상에 구현되는 세상 법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의미하며 이는 택자와 비택자에게 차이가 있다. 로마서 1장에서 보듯이 자연에서 신성, 영광이 드러나며 여기에 비추인 율법이며 택자나 불택자 모두 양심으로 반응하지만 불택자는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 두기를 싫어하게 된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이란 그의 통치 아래 살기를 싫어함을 의미하며 자연히 이것은 율법을 전제하는 표현으로 석의된다.

2. 둘째 정죄의 용도(usus elenchticus)로 율법이 우리 죄를 정죄하고 깨닫게 하는 용도를 의미한다. 율법이 정죄할 때, 불택자는 완고해지며 택자의 경우 통상적으로 개혁파가 말하는 제3용도로 이끌어 간다.

3. 셋째 몽학선생의 용도(usus paedagogicus)로 이는 택자에게만 해당하며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간접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compulsus indirectus ad Christum)을 의미한다.

4. 넷째 교훈적 규범적 용도(usus didaticus sive normativus) 통상 적인 개혁파가 말하는 율법의 제3용도며 이 율법은 그 수준, 의도, 용도, 범위는 자연법의 규범성의 의미와는 차이가 많이 난다. 예컨대,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께서 해석하신 율법의 내면적 적용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것의 실행 가능성은 중생자에게만 주어진다.

루터파는 1-3을 강하게 인정했으며 4는 약하게나마 동의를 했다. 이에 비해 개혁파는 1-4 모두를 인정하고 강하게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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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루터파와 개혁파가 모두 인정하고 동의한 "셋째", 몽학선생의 용도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도들의 때부터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대속, 부활을 포함하고 있는 복음을(요3:16) 전파하고 있고,
이것이 성경에서 선포하고 있는 방법이며(롬10:14~15) '듣고 믿는 자'는(요3:16) 구원을 얻습니다.
더이상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있을(갈3:19) 몽학선생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고 복음전파(전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신 대로 곧바로 복음을 전하고(요3:16) - 듣고 - 믿고 - 구원받고,
구원받은 중생한 성도는 구약의 말씀도 상고하며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갑니다.
구약의 말씀도 신약의 말씀도 모두(딤후3:15~17) "성화의 과정 속에서" 성도로 "온전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셋째로 언급된 몽학선생의 용도에 관해서도
성경대로 믿도록 성경대로 고쳐서, 사도들의 가르침 그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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