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25)

 

글을 시작하며

<“썩음을 당치않게”의 바른 해석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필자의 글이 [바른믿음] 사이트에 게재된 뒤, 이 글을 읽은 몇 몇 분들의 질문이 있었다. 아마도 이 분들은 필자의 글 서론에 잠깐 언급된 마8:22의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에 동의할 수 없어서 필자에게 질문한 것 같다.

이 분들의 질문은 하나같이 마8:22의 “죽은 자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라고 하는 항의성 짙은 의문이었다. 물론 필자는 이 분들의 의아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분들은 마8:22의 “죽은 자들”의 의미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분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8:22의 “죽은 자들”이 갖는 당시의 관용적인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마8:22)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중에 한 서기관이, 자신이 서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좇겠다고 자원한다(마8: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아마도 이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한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마8:16/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그의 제자가 되면 출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한 서기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신이 여우나 새보다도 못한 처지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이때 옆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가정사를 내세워서 에둘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거절한다(마8: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 당시에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는 말은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그 후에 따르겠다는 제자의 길 유보를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제자의 길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관용적인 표현(완곡어법)이었다. 예수님은 점잖게 제자의 길을 거절하는 그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8:22)

위에서 전자의 “죽은 자들”(nekrou.j/네크루스)은 육신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이며, 후자의 “죽은 자들”(nekrou.j/네크루스)은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후자의 “죽은 자들”은 무덤에 들어가야 할 자들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이 분명하며, 전자의 “죽은 자들”은 후자의 “죽은 자들”을 무덤에 장사지내야 할 자들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 왜 “죽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셨는가? 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아래와 같다(필자가 검토한 모든 주석과 모든 설교는 아래와 대동소이했다).

“그들에게는 참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칭하셨다”(헤르만 리델보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지낼 수 있다.”(데이비드 갈런드)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신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묻게 하라는 의미이다.”(조엘 그린)

“죽은 자는 이곳에서 영적인 의미에서 죄에 죽은 자를 의미한다.”(게르하르트 마이어)

“이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다“(데릴 벅)

위에 제시한 실례들은 일반적으로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해석이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해석들은 예수님이 의도하신 의미와는 전혀 다른 자의적인 해석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마8:22)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후대의 발전된 신학적 사고에서 나온 개념을 가지고, 훨씬 이전 시대인 예수님 당시의 삶의 정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해석하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육신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죽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다”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영”(pneu/ma/프뉴마), 또는 “영혼”(yuch/푸시케)의 변화는 육신이 죽어야 생기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육신이 죽어야지 그 영혼이 하데스(a[|dhj/하데스/the world of the dead)에 가든지 게헨나(ge,enna/게엔나/hell)에 가든지 한다고 여겼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몸은 죽여도 영혼은/yuch.n/푸시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yuch.n/푸시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도 이와 동일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육신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의 의미로 말씀하셨다면, 이 말씀을 듣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무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죽은 자들”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은 자들”(nekrou.j/네크루스)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물론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은 당연히 “nekrou.j”(네크루스)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마8:22에서처럼 육신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에게 “죽은 자들”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아버지의 유산 상속과 관련하여 장남와 비교되는 차남들을 지칭하는 당시의 관용어였다.

모세의 율법(신21:17)에 따라 아버지의 유산의 세 몫 중 두 몫(유산의 2/3)은 장남에게 상속되고, 나머지 한 몫(1/3)은 차남들에게 상속된다. 문제는 유산의 1/3을 나눠 가질 차남들의 숫자다. 요즘처럼 한 집에 아들이 한 두 명 정도 있으면, 차남들의 상속분이 장남에 비해 적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차이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한 가정에 보통 8명에서 10명 정도의 아들들이 있었다. 당시의 가정들에 아들을 포함한 자녀들이 많았던 까닭은 당시 유대인 여자의 결혼 적령기가 보통 만12세여서 여자가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날들이 지금보다 2배 이상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의 슬하에도 예수님을 포함해 아들이 5명이었다(마13: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만약 요셉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물론 요셉이 요절했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요셉이 예수님의 탄생 기사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 이유들 중에 요셉의 요절보다 더 타당한 이유는 없다), 어쩌면 예수님의 형제가 10명 이상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계산하기 좋도록 예수님 당시의 어떤 가정에 아들이 10명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아버지의 유산 중 장남에게 2/3가 상속되고, 남은 1/3이 9명의 차자들에게 상속될 것이다. 장자가 상속받을 유산과 차자들이 상속받을 유산을 비교하기 좋도록 아버지의 전 유산을 27등분하면, 장자가 상속받을 유산은 전체의 18/27이고, 9명의 차자들이 상속받을 유산은 1인당 전체의 1/27밖에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차남들의 유산 상속분은 장남에 비해 1/18밖에 되지 않을 만큼 보잘 것 없었다.

이렇게 당시의 차남들의 상속분이 장남의 비해 너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대단한 부자를 아버지로 두지 않았다면 차남들은 상속받은 유산으로는 바로 독립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의 차남들은 독립할 만큼 재산이 모일 때까지 자신의 상속분을 장남인 형에게 그냥 두고 형에게 얹혀서 사는 경우들이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자립할 만큼 어느 정도 자신의 재산이 불어나면 차남들은 형에게 자신의 상속분을 요구하여 나누어 받아 독립했다.

그러나 상속분을 나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산은 대부분 토지와 같은 부동산이어서, 현금처럼 딱 떨어지게 나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산을 분배할 때 분배권이 형에게 있었기 때문에 동생들은 거의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며, 또 형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며 동생들의 유산 분배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눅12: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유산 분배를 부탁한 것은 유산 상속에 관한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의 반영일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 당시의 차남들은 장남에 비해 상속받는 유산이 형편없이 적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산을 아주 조금밖에 상속받지 못하는 차남을, 유산과 관련하여 “죽은 자”(nekro,j/네크로스)라고 불렀던 것이다. 마8:2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은 자들”(nekrou.j/네크루스)도 상속분이 너무 적어서 유산을 상속받는데 있어서는 죽은 자나 다름없는 차남들을 가리키는 당시의 관용어였다.

예수님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한 자는 아마도 상당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어떤 부잣집의 장남이었을 것이다. 그는 여우나 새보다도 못한 처지에 있다고 커밍아웃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옆에서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대신에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장남의 자리를 택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가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한 까닭은 아버지를 장사해야 하는 장남의 책임을 다 함으로써, 많은 유산을 상속받는 장남의 권리를 챙기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이 하신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너는 유산을 상속받을 장남의 권리를 동생들에게 양보하라. 그리고 동생들(죽은 자들)에게 아버지를 장사하는 일을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의미이다.

 

글을 마치며

신약 성경을 오역하거나 오석하는 까닭은 2천여 년 전에 사용되었던 고대 헬라어가 신약 성경을 기록한 언어였기 때문에 이 언어에 능숙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정황, 즉 그들의 관습이나 생활환경 등을 놓친 것이 오역과 오석의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은 자들”도 이 용어가 사용된 당시의 삶의 정황에서 특별한 의미의 관용어였음을 해석자들이 놓쳤기 때문에, 당연히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나 신학교수와 같은 성경 교사들은 성경 말씀을 연구할 때, 번역 성경의 오역과 오석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고대 헬라어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기록된 성경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삶의 정황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록된 성경의 배경이 되는 당시의 삶의 정황을 놓침으로써 기록된 성경의 원래의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진 의미로 번역되거나 해석되는 경우들이 번역 성경들에서 의외로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오역과 오석된 성경 구절들이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 특히 구원 교리(복음)의 근거가 되는 구절들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이 발생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본 듯 뻔한 일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비극은 이미 한국교회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과거 [바른믿음]이 바로 잡은 김성로의 ‘부활 복음’과 유석근의 ‘알이랑 민족’ 등은 두말할 것도 없고, 김요한의 ‘지렁이의 기도’, 옥성호의 ‘신의 변명, 야고보를 찾아서’ 등과 ‘방언 기도’, ‘능동순종 교리’, ‘회심 준비론’, ‘여성 안수 주장’, ‘WEA 찬성’ 등과 같이 어처구니없는 수많은 주장들은 궁극적으로 성경 말씀의 오역과 오석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번역 성경에 숨어있는 오역과 오석을 찾아 바르게 수정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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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