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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청교도(웨신서), 바빙크, 벌코프, 박형룡 ... 완전한 성경 이해를 가진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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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청교도(웨신서), 바빙크, 벌코프, 박형룡 ... 완전한 성경 이해를 가진 사람은 없다
  • 정이철
  • 승인 2021.09.21 06: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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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이라도 100% 완전한 신학을 개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필자가 칼빈이 세운 종교개혁 신학(개혁신학, Reformed Theology)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완전한 것은 오직 성령의 영감을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남긴 기록, 즉 성경 66권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칼빈의 개혁신학을 우리가 존경하고 배우는 이유는 다른 신학에 비해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기 때문이다. 만일 칼빈의 신학에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내용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점을 명확하게 찾아내어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오류들이 생겨나지 않게 해야 한다. 천국에 있는 칼빈 자신도 그것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을 것이다.

칼빈의 신학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것 하나는 율법의 기능에 대한 것이다. 서철원 박사님이 합동 이대위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순종 교리에 대한 위험성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다.

“칼빈은 율법을 생활의 규범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에서 나아가 율법에 구원 기능을 부가하였다. 율법이 그리스도 밖에서는 죽이고 망하게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는 구원하는 기능을 행사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후기 유대교의 주장과 같다.”(서철원 박사)

서철원 박사님이 아니라면 영원히 아무도 하지 못할 말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성경의 핵심에 대해 선명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다수의 반발을 예상하고서도 자신있게 그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이 성경의 가르침과 달리 율법에 구원의 기능을 부여했었는데, 그것은 완벽한 율법 실천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의 율법주의 신학과 같은 내용이라고 서철원 박사님은 지적했다.

그러자 합동의 사람들에게서도 “칼빈까지 잘못되었고 박형룡의 신학에도 약점이 있었다면 대체 누구를 기준으로 하라는 것인가?”라는 볼멘 소리가 터져나왔다. 다른 교단의 청교도주의자들의 비아냥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대체 칼빈이 율법에 대해 뭐라고 가르쳤길레 서철원 박사님이 그렇게 지적했을까? 

필자는 최근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 피터 릴백의 책 <칼빈의 언약사상>(원종천 박사 역, CLC)를 읽었다. 저자는 칼빈에게 행위언약 사상이 있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저자의 논리는 필자를 설득하지 못하였다. 이 책의 저자는 자기의 논리를 피력하는 과정에서 칼빈의 레위기 18장 5절에 대한 주해를 소개하였다.
 

“어리석게도 어떤 자들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면 의로움을 얻게 된다는 진술을 불합리하다고 거절한다. 결점이 율법의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부족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법칙을 모든 면에서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이 율법으로부터 기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생명은 이것 또는 저것을 해야 했을 사람에게 약속된 아니고, 완전한 순종이 우리에게 요구되기 때문이다.”(레위기 주석에서 칼빈이 했다는 말, 위 책의 447페이지)

릴백이 칼빈의 원문을 바르게 인용했고, 번역자 원종천 박사가 바르게 번역했다고 믿고 말하도록 하자. 칼빈은 (이론상으로) 구약의 율법에게 영생을 주는 능력이 있었다고 주해하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율법을 통해 영생을 얻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칼빈은 그 이유를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불완전하게 지켰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율법을 100%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율법을 통해 영생을 얻는 것이 가능한데, 그 정도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이 없으므로, 사실상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이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이 칼빈의 해석이었다.

칼빈의 주장을 조금 바꾸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완벽한 율법준수이고 또 하나는 완벽한 율법준수를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단 한 번도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의 의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릴백이 인용한 내용에 의하면, 칼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해 (또는 율법에 대해) 완전하게 순종하신 이유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행위,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하게 풀어드리는 요소라고 가르쳤다  (위의 책 437 페이지 참조).

그러므로 칼빈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삶을 강조했을지라도 그것은 청교도주의자들이 말하는 능동순종 교리가 아니다. 청교도들의 능동순종 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여 율법의 의, 즉 영생의 의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가 순종을 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것이 능동순종 교리의 핵심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빈을 능동순종 교리의 초창기의 인물로 규정하는 것은 억지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미 칼빈이 율법을 100% 완벽하게 지킨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이론적 가능성을 여는 말을 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청교도 능동순종주의자들은 어쩌다가 율법에게 구원을 주는 기능을 말한 칼빈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좋은 여건을 차지하여 버렸다. 

이론상으로 100%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영생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는 칼빈의 율법 해석(정말 칼빈이 그렇게 말했다는 전제 하에)이 왜 틀렸는지 정리해 보자.

1)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하게 하나님이 선언했으므로 안 죽고 죗값을 갚아서 영원히 사는 길은 없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자기의 죗값을 지고 영원히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천부적 운명이다. 내가 내 죄를 지고 죽으면 나는 언제 영생을 누릴 수 있는가?

혹자는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범죄한 사형수가 자기의 죄 때문에 사형 당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누가 그를 다시 살려서 살도록 만들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처럼 죽은 후에 부활하려면 그리스도처럼 죽을 이유가 전혀 없으면서 죽어야 한다. 살면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다고 그것으로 죄 용서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죄 용서는 죄 지은 자가 죄를 지고 죽거나 죄 없는 자가 대신 죽어야만 가능하다.

2) 칼빈이 주해한 레위기 18장 5절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광야에서 유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새 땅에서 그 이전 거민들처럼 동성애, 근친상간, 수간 등의 죄악을 범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심판으로 똑 같이 멸망당하지 않고 그 땅에서 오래 복 받으면서 살 것이라는 의미다. 레위기 18장의 내용을 보면 온통 가나안 원주민들의 더러운 죄들에 대한 내용이다. 기독교는 동성애, 근친상간, 수간하지 않으므로 영생을 얻는 윤리적 구원의 종교가 아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0장 5절에서 레위기의 그 내용을 인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길만 있다고 강조하기 위해 레위기를 인용했다. 로마서 10장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설명하는 내용이다.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이 결론적으로 강조한 것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이다.

처음부터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가능성이 0.00001%도 존재한 적이 없다. 성도의 온전한 삶과 행위는 구원의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적용하는 성령의 성화 사역으로 인해 성도의 온전한 삶과 행위가 시작된다.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도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고자 왔던 적이 없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 백성다운 삶의 가이드로 왔다. 그런데 그 원칙대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구원 받았으면서도 구원의 원칙대로 살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기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그래서 진정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해졌다. 왜냐하면 죄악된 자신을 대신하여 피 흘리고 죽으실 훗날의 하나님의 구원자의 은혜가 소급적용되어 얻은 은혜의 구원임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구원 얻기 전에 율법 준수를 요구받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는지 보라! 한 명도 없다. 모두 구원 얻고 난 후에 율법을 알았다. 구원 얻은 후에 율법대로 동물의 피 제사를 드렸고, 안식일을 지켰고, 각종의 모세의 계명을 지키도록 요구받았다. 구원이 오직 장차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자 안에서 주어졌음을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하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율법은 구원을 주는 기능을 0.0001%도 가지지 않았다. 율법은 오직 궁극적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왔다. 

이제 우리는 이 진리를 쉽게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500년전 사람인 칼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로마교회로부터 그냥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완전하게 얻는다는 진리를 구출하여 내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믿고 완전하게 행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이야기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며 교황이 이를 갈았고, 교황의 뒷배가 되는 왕들이 칼빈과 개혁자들을 죽이려고 했던 때였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즉 이신칭의를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구원을 주지 못하는 율법의 기능을 바르게 설명하는 것까지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500년이 지금 우리의 성경 이해와 신학이 여전히 그 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칼빈의 말 대부분이 맞으나 언제나 100% 그런 것은 아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것과 동시에 칼빈의 약점에서 벗어나 성경으로 다가가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한번 크게 개혁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 성경을 향하여 더 가까이 다가가야 것이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웨신서, 바빙크, 벌코프, 박형룡, 박윤선 ... 모든 사람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 그 시대의 사람으로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의 정신과 틀에 갇혀 살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한계를 다음 시대의 사람들이 보고 지적할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은 계속 성경을 따라 개혁되어지는 신학이어야 한다. 


맺는 말

1) 칼빈에게 행위언약 사상이 있었다고 볼 (좀 이상한) 자료들에 비해 칼빈에게 행위언약 사상이 없었다고 확신되는 분명한 근거들이 훨씬 더 많다. 릴백이 그랬던 것처럼, 칼빈에게 행위언약 사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칼빈의 모호한 말이나, 명백한 오류로 보이는 내용을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비판은 고사하고 그런 내용이 어디선가 꼭 나오기를 고대하면서 찾았기 때문이다. 

칼빈의 대표작 <기독교강요>를 자세하게 보면 다른 곳에서 말한 논란이 되는 내용들이 정말 칼빈의 신학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있다. 칼빈의 성경 주석들보다는 그의 평생의 작품인 <기독교강요>를 더 우선적으로 참고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칼빈의 말의 전후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어떤 부분만 잘라서 인용하는 술수를 버려야 한다.  

2) 그 누구도 완전한 신학을 전개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시대의 한계 속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사람이 그 부분을 발견하여 바로 잡아야 한다. 실수와 오류가 작은 사람은 있을지라도 없는 사람은 없다. 위대한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올바른 가르침들을 배우는 일과 그들의 하나 있을까 말까하는 오류들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학이 우리의 신앙을 더 성경에 가깝게 만들게 해야한다. 

"감히 칼빈에 대해 ..."
"감히 웨신서에 대해 ..."
"감히 박형룡에 대해 ..."

모두가 멸시하는 저질 이단을 추종하는 것과 이런 자세는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에서 연구했다. 최근 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Ph.D)에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가 있고,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2021년 5월 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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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훈 2021-09-21 08:14:14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아담도 선악과 명령을 지키지 못했거늘 아담의 씨를 물려받은 죄인인 인간들이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을까 ? 하나님은 ‘선악과 명령’을 통해 피조물인 아담은 선악과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오직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고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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