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하게 시간적 순서대로 10분 안에 설명하겠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저의 최근의 책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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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년에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가 첫 부인을 버리고 재혼하기 위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교회와 분리시켰습니다. 로마교회 교황이 자신의 재혼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그는 로마교회의 신앙에 헌신했던 사람이었으므로 교황으로부터 ‘로마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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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정치적 결단으로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교회로부터 분리되어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리와 신학에서는 로마교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는 당시 유럽에 정착되고 있던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도입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의 사상이 도입되면 종교적 권세까지 장악하는 국왕 자신의 권력이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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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의 정치적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잉글랜드 국교회 속에서 내부적인 신앙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황없는 로마교회의 길을 가는 국교회의 길에 만족하는 성직자들과 기왕 로마교회와 길을 달리하였으니 칼빈의 방식으로 철저하게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는 성직자들로 나누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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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가 죽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그리고 헨리 8세의 딸 피의 메리 여왕을 지나 헨리 8세의 또 다른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왕(1558년 즉위)이 되었을 때 국교회 내부의 신학 논쟁이 가장 치열해졌습니다.

여왕은 자신이 종교적 권세까지 장악할 수 있는 국교회 체제를 좋아하고 후원했습니다. 여왕의 눈에는 국교회를 칼빈의 장로교회로 전환시키자는 국교회 내부의 개혁파 성직자들이 자기에게 도전하는 위험한 자들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왕은 국교회 감독들을 후원하여 개혁파 성직자들의 뿌리를 뽑으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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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때 국교회를 칼빈의 장로교회로 전환시키자고 주장하는 개혁파 성직자들에게 ‘청교도’(Puritans)라는 별명이 주어졌습니다. 이후 그들은 청교도로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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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년대 말에 이르러 잉글랜드 국교회를 칼빈의 장로교회로 전환시키려는 청교도들의 개혁운동은 완전히 종식되었습니다. 여왕과 여왕이 임명을 국교회의 최고위 감독이 매우 청교도들을 박해함으로 국교회에 반대하는 청교도들은 더 이상 잉글랜드에서 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교회를 장로교회로 전환시키자는 청교도들의 주장은 쑥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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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를 세우자는 개혁운동을 더 이상 못하게 되자 청교도들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세 길을 찾아서 나갔습니다.

1)분리파 청교도

국교회를 사탄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뛰쳐 나가 완전히 새로운 청교도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을 분리파 청교도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유럽에서 칼빈의 제자들이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회중주의를 자신들의 새로운 교회의 정치제도로 선택했습니다. 이들에 의해 개신교 안에 회중교회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들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정착하여 청교도 회중교회를 세웠습니다.

2)장로파 청교도

많은 국교회 성직자 청교도들은 국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들은 국교회의 성직자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속으로 계속 장로교회 운동을 지속했습니다. 이들의 숫자가 청교도들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3)국교회 청교도

국교회 성직자 신분을 유지하는 길을 택한 청교도들 가운데 소수는 매우 특별한 노선을 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전과 같이 장로교회를 세우는 것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국교회의 제도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여왕과 감독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었습니다.

이들은 국교회의 신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개혁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만들었습니다. 퍼킨스라는 국교회 청교도 조상이 '행위언약'이라는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아담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는 언약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원래 사람은 노력과 행위로 자기의 구원의 자격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학적 패러다임을 추진한 것입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하나님께 반응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사상이 사람들에게 주입되니, 국교회 감독들의 그늘에서 안주하던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독립적이고,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신앙 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자세가 확산되어 1640년대에 잉글랜드의 일반 시민들이 국교회를 강요하면서 독재를 행하는 국왕 찰스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시민혁명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국교회 청교도들로부터 확산된 사상이 아니었으면 국민들이 국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혁명은 불가능했습니다.

4)독립파 청교도

네덜란드에서 분리파 청교도 개혁운동을 하던 헨리 제이콥스라는 청교도가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국교회로 복귀했습니다. 그 청교도는 국교회의 성직자이면서 국교회 감독의 통치를 받지 않고 스스로 통치하는 분리파들이 시작한 회중교회를 국교회 안에 세웠습니다. 그 외의 모든 신학은 퍼킨스에게 시작된 신학을 따랐습니다. 독립파와 국교회 청교도들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합해졌고, 이들이 1640년대 웨신서를 작성할 때 회중주의 정치와 행위언약 사상 등을 주장하는 독립파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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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장로교회(언약도)였지 청교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630년대부터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장로교회를 버리고 국교회를 수용하라고 강요하니, 남쪽의 청교도들과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운동 역사에 스코의 장로교회도 포함되게 되었습니다.

스코의 장로교회 신앙이 가장 완벽한 신앙이나 되는 것처럼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한국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거짓된 행위언약 사상을 담은 1591년에 출판된 잉글랜드 퍼킨스의 책이 금새 스코에도 전해졌습니다. 1596년에 나온 스코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 로버트 롤록의 책에 벌써 퍼킨스의 행위언약 사상이 나타났습니다. 칼빈주의에서 일찍 벗어나 퍼킨스주의(청교도주의)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640년에 스코 장로교회, 잉글랜드 장로파 청교도, 잉글랜드 독립파 청교도 등이 모여 웨신서를 작성했을 때 스코 장로교회 신학자들도 대부분 행위언약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심각하게 망하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나님의 태초의 언약은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 안에서 창조된 아담이 영원히 하나님을 섬겨 그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자는 언약이지, 무슨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영생과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주겠다는 언약이 아닙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아담이 완전한 행위(율법준수)를 보여 영생과 하나님 자녀의 신분을 얻으라는 조건적 행위언약이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바르게 들어설 자리를 없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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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신서가 1647년에 완성되었는데 그 무렵에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회중파 청교도가 군대를 장악하였고 결국 훗날 영국이라고 불리우는 섬 전체을 장악했습니다. 장로파 청교도들은 위축되었고 회중파 청교도들이 득세했습니다. 회중파들은 웨신서를 버리고 <사보이선언>이라는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만들고서 웨선서에 넣지 못한 능동순종 교리를 명확하게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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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과 10년 후 다시 국교회 세상이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망명하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국왕으로 등극했고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등 모두 쓸어버리고 국교회만 인정했습니다. 1662년에는 청교도들을 완전히 추방하는 ‘대방출령’을 발효하여 국교회에서 청교도들 2,000명을 추방했습니다. 그것으로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은 끝났습니다. 이후로는 신대육에서 청교도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11-결론>
청교도 운동은 교회 정치로서 유럽에서 칼빈의 제자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회중주의를 추구했고, 신학적으로는 행위언약-능동순종-회심준비론 등을 추구한 어느 정도 이단성이 있는 종교운동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단지 국교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고 신학적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후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서 무수한 난관을 겪으면서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만 높이 평가되었지 신학적 검증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간략하게 썼습니다. 최근의 저의 책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개혁운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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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