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운 목사 황금사슬 8회 앞 부분

부탁>
정대운 목사의 황금설교 7은 건너뜁니다. 특별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황금설교 8회의 내용을 받아썼습니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답변>
살펴보니 매우 심각합니다. 저의 의견을 이전처럼 파란색으로 달겠습니다. 

 

0:23~1:45분>
“우리가 실질적으로 칭의를 받을 때, 의롭다 칭함을 받을 때, 우리는 사실 느껴지지가 않는다고 제가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칭의는 느껴지지 아니하고, 그리고 양자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건 성화 때부터 느껴지는 거에요. 성화 때부터! 그러니까 내가 칭의가 되었느냐 안 되었으냐 라는 것은 성화가 되어 있느냐로 역추적, 소급해서 칭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정대운 목사).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는지에 대한 객곽적 증거는 성화입니다. 칭의를 얻은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임재하십니다. 칭의 얻은 사람에게 임재하신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성화로 나타납니다. 성화가 전혀 없으면 칭의를 얻은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옳습니다. 그러나 성화의 정도를 보고 그 사람의 칭의 유무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성화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성화를 경험하지 않고, 경험한다는 것은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앞에 것은 모든 것이 느껴지지 않아요. 물론 회심 때 회개와 믿음도 우리에게 느껴지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그리고 빼도 박도 못할 근거는 여러분의 성화를 보면서, 뒤를 돌아보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역추적하면서 구원을 받음의 확신에 들어가는 거에요 (정대운 목사)

->빼도 박도 못한다는 표현은 현장에서 붙잡힌 불륜남녀의 상황에서 유래한 말이니, 설교에서 쓸 말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화를 통하여 구원을 역추적할 수 있다는 정대운의 말은 옳습니다. 

"이 원리를 모르고 성화가 내 몸에서 드러나고 안 드러나고, 내 맘에서 성화의 역사를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와 상관없이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마인드 컨트롤이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정신없는 사람들이 ‘나 대기업 다녀!’ ... 이렇게 하는 거랑 별 차이가 없어요” (정대운 목사)

->성화가 우리에게서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설명은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성화를 보고 그 사람의 구원의 유무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성화와 무관하게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발생합니다. 구원 받으면 성화가 따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연 어느 정도의 성화가 나타나야 그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나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성화를 통해 구원을 역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성화과 구원의 관계에 대해 누가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있을까요? 사람이 보기에 매우 성화된 사람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아닌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 부인이 매우 성화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에드워즈의 부인은 귀신의 역사로 입신과 황홀경에 빠지를 잘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성화되었다고 한다면, 신사도 이단들이 가장 성화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성화를 근거로 그 사람의 구원의 유무를 판단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칼빈과 어거스틴은 성화의 정도를 보고 하나님의 택하심과 구원의 유무를 판단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딤후 2:19). 이것은 사람들의 경솔한 판단을 억제하시려는 조치였다. 또 평상시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은 우리의 이해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굳건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넘어진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주께서는 주를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자들을 아시며 표를 해 두셨다. 주님의 눈만이 주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자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과 구원의 종점에 이르기까지(마 24:13) 참고 견딜 수 있는 자들을 알아보신다.” (기독교강요, 4,1,8)

그리고 성화에는 윤리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천도 성화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성화가 내주하시는 성령, 즉 하나님의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성령은 진리의 영,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인도하시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경적 신앙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하여 성경적 신앙을 왜곡하고 신자들이 성경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은 미혹의 영이 귀신의 사역입니다.

정대운은 우리의 신앙이 성경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고, 그를 추종하는 신자들을 거짓 신앙으로 강하게 무장되게 하였습니다. 진리의 영의 사역이 아니고 미혹의 영의 사역입니다. 그러면 성경적 성화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성화에 의해 구원의 유무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정대운의 설교에 의하면, 그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3:35~5:08분>
“그러니까 이제 보편적인 잘못된 예정설 잘못된 장로교쪽 교리를 갖고 있거나, 잘못된 장로교교리가 누구랑 똑같냐면 구원파랑 똑같아요. 그게 뭐냐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에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하는 말이 ‘너 구원받았니?’ 이거에요. 우리 장로교는 ‘너 구원받았니?’ 이것은 대단한 실례니깐, 그냥 묻지도 않아요. ‘구원받았니?’가 아니라. 딱 구원받은 것을 우리는 밑으로 깔고 들어가 있는 것이죠!" (정대운 목사)

->처음 믿을 때 얻은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장로교회 신앙을 구원파 신앙과 같은 거짓 신앙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성령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얻어지는 구원의 영원성을 부정하는 이단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사람이 자기 행위로 구원을 완성한다는 행위구원론자들이거나, 지속적이고 완전한 성화로 구원을 스스로 완성시켜야 한다고 믿는 성화구원론자들입니다. 정대운은 어떤 경우일까요? 계속 들어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너 구원받았니?’로 묻고 장로교는 ‘너 구원받았니?’라고 안 묻는것 뿐이지, 다 구원에 대해서는 '과거에 받았다'라고 결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 똑같애요. 그런데 그들이 결정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근거는 뭐냐 하면, 성화를 보고 ... 그러니까 칭의와 양자가 되는 순간부터 성화가 시작되는 것이예요. 소명부터 시작하여 성화의 시작까지는 모든 것이 똑딱 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부터 성화가 시작되냐 하면, 소명을 듣고 양자되는 순간부터 성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 하면, '내가 신앙생활하다가 2천 몇 년 며칠에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뜨거운 불이 일어나고, 그 다음부터 삶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아마 그때 구원을 받은 것 같다!' ...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예요" (정대운 목사).

->정대운의 말이 꼬여서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구원파들의 거짓된 믿음이 많은 장로교 목사들과 신자들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에게서 지속적으로 발전되고 있는 성화에 근거하여 '내가 구원 받았구나!'라고 확신해야 맞는데, 구원파 이단들과 전통적 예정설을 믿는 장로교회 사람들이 단지 과거에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 받았고 그것이 영원하다는 그릇된 신념을 붙들고 있다고 비판하는 내용으로 보이는데, 잘못된 설교입니다.  
 

5:08~5:55분>
"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다가 한 1년 지나니깐, 옛날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는거에요. 옛날의 모습으로 다시. '아! 내가 지금 성화가 된거야? 내가 성화가 안되면은 구원받은거 아닌거야?' ... 이렇게 자기의 구원을 의심을 할줄 알아야 되는거에요. 그게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이단이나 잘못된 장로교의 사상을 갖고있는 사람들은 뭐냐면, 그렇게 의심하는거 자체를 믿음이 없다고 보는거에요. '니가 구원을 받지 않았으니깐 의심하는거야! 구원받은거 의심하지마!' ... 자꾸 이렇게 하면서, 자기가 회개하고, 매달려야될 그 순간을 자꾸 파괴시켜버립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것이 구원파나 잘못된 예정론을 가르키는 교회에 동일하다고 봐요. 그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구원을 과거시제로 돌아갈려고 하는데, 그렇치 않습니다" (정대운 목사).

->성화가 구원의 증거라는 정대운의 말에 맞는 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우리에게 성화가 지지부진하는 시간이 오면 구원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으므로 심각한 내용의 설교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라도 신앙이 침체되고 성장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이 맞는가? 라고 의문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설교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항상 일정한 모습으로 성화의 진전을 보인다는 가르침은 성경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의 말과도 맞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 받은 후에도 자주 성화의 여정의 퇴보와 침체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3-25)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이미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얻은 구원의 지속은 사람의 노력과 자질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자질이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영원히 구원하셨습니다. 정대운이 이러한 믿음의 원리를 부정하므로 바르게 믿는 사람들의 신앙을 구원파적인 믿음이라고 폄하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다른 구원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Already .., Not Yet’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Already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아직 구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이예요. 그것은 신학교 1학년에 들어가면 다 배우는 거예요. ‘Already .., Not Yet’, 이것이 무슨 뜻이야 하면, 이미 과거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 어떻게 확증되냐 하면 내가 성화의 삶을 꾸준히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뭡니까? 견인입니다. 참고 인내하는 견긴의 과정을 쭉 거치면서, 아! 내가 과거에, 1980년에, 몇월 며칠에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내 마음이 뜨거워지더니, 그 무렵에 언제 내가 거듭난 것 같다! 그 다음부터 지금까지 뒤를 돌아보지 아니라고 하늘의 푯대를 바라보고 지금까지 달려왔다. 그 인생이 40년이다! ... 이렇게 말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들어가는 것이지, 그래서 구원은 ‘Already .., Not Yet’이에요. (정대운 목사)

->개혁신학의 구원론 신학에서 자주 말해지는 ‘Already ... Not Yet’은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같은 사상을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김세윤은 신자가 이 땅에서 처음에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이후의 삶을 보시고 역사의 최종적 순간에 다시 그 사람의 구원(칭의)의 타당성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신다고 주장하여 크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완전한 구원(칭의)이 역사의 최종적 순간으로 유보되었다고 함으로 '유보적 칭의론'이라고 비판을 받은 것입니다.

개혁신학의 ‘Already .., Not Yet’은 개인의 구원 문제보다는 이 땅에 도래할 천국(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해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만 있었습니다. 무죄하고 성령을 담지하고 오신 아담 이후의 최초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가와 부활 이후 지상에 성령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송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급속하게 역동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지 못합니다. 재림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최종적으로 완성됩니다. ‘Already ... Not Yet’은 이것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구원이 발생하는데, 그때 얻은 구원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최종적인 구원입니다. 우리의 자질이나 노력에 근거하지 않고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주신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정대운은 이 진리를 교묘하게 파괴하고 있으니, 개혁교회에서는 이단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합니다.  정대운의 구원 사상과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 부단하게 노력하함으로, 지속적으로 회개하고 성화되어감으로 구원의 완성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구원이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8:30~9:23분>
" 그때 은혜를 받고 뒤집어진 경험은 있는데, 구원의 전체는 죽을때까지 구원이기때문에, '니 구원받았냐?' 이 말이 안된다니깐요. 이 말은 뭡니까? 마지막에 가서 구원이 끝나는거니까, 자꾸 이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냐?'. '"나는 구원을 받았다' ... 이렇게 해버리는건데, 물론 구원을 받았다가 맞고, 근데 not yet 이 시간을 여러분 지금 지나가고 있는거에요. 자, 그래서 그런의미에서 성화는 구원의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것이지,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보여준다' 이런 관념이 아니라, 구원의 정점에 들어가 있다! 이게 성화다!라는것을 알기를 축원드립니다구원을 받았으니 성화의 삶을 산다! 이게 아니에요. 구원의 전체적인 중심적인 역활이 성화다! 우리는 잘 기억을하고 있어야 됩니다"  (정대운 목사)

->정대운은 심각한 구원론 이단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대운의 사상을 간단하게 말하면 성화구원론 이단사상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성령의 사역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얻어지는 구원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대범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완전한 구원이 발생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죄의 담이 무너지고,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믿을 때 얻어지는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부정하는 정대운은 진정한 구원이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이단사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우리 모두를 구원파적 이단신앙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화는 구원의 열매라는 것이 개혁교회의 올바른 신학입니다. 그러나 성화구원주의자들은 지속적인 성화로 구원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정대운이  똑 같은 내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대운은 성화가 구원의 열매가 아니고 성화를 통해 구원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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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