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운 목사(이후 정대운)의 <황금사슬> 설교 11회를 살펴보겠습니다. 한 사람에 대해 너무 길게하는 것 같고, 마치 제가 정대운에게 개인적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됩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 정대운의 설교를 받아 쓰게하시어 저에게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겠습니까. 저의 생명과 인생이 하나님께 달렸고, 저도 하나님께 복 받아 평안하게 살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겁니다.

정대운이 달라질 가능성이 혹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깨닫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소망과 훗날에 하나님이 정대운을 고치시는데 사용될 수 있을까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씁니다. 이제 몇 번만 더 쓰면 끝날 것 같습니다. 

18:34~18:44분>
“내가 진짜 믿고 있나? 내가 세뇌를 당하고 있나? 아니면 내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나? 이것을 분별해 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을!” (정대운)

녹취하신 이 내용으로 설교자의 신학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설교에서도 이런 내용은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분인지, 무슨 내용의 설교를 하다가 이런 말이 나왔는지, 그 전후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24:15~24:24분>
“지식은 별로 없고, 성령을 통하여 다이렉트로 확신의 길을(확신까지만 분명하고 잘 안들림) 들어가려면 그것은 거의 다 거짓의 영에 휩싸이고 만다는 것입니다.” (정대운)

이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설교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내용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다가 이런 내용을 말하였는지, 앞뒤를 파악해야 합니다.

24:33~25:28분>
“그리스도께 구원받지 못하면, 그리스도께 구원받지 못하면 ... 두 번째 마귀와 대적해서 이길 수 없다! 그렇죠? 그리스도께 구원받지 못한 자는 마귀와 대적해서 이길 수 없다. 마귀와 대적해서 이긴다는 뜻은 성화된다! 순종한다는 뜻이에요.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순종할 수 없다는 거에요. 이게 순종이? 그리스도? 마귀를 대적해서 싸울 수 없다는 뜻이에요 ... 그러면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내 속에 성령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중요한게 뭐냐면,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성령이 있다고 여러분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필히 꼭 알아두십시오. 내가 성령이 없어요. 내가 순종하지 않아 순종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요. 마귀와 싸워서 번번히 집니다. 그럼 여러분,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되요.” (정대운)

구원받지 못하면 마귀에게 이길 수 없다는 내용은 백번 옳은 설교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의 죗값을 대신 완전하게 하나님께 갚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마귀를 이기는 길은 없습니다. 지상의 성도가 마귀를 이기는 길은 오직 ‘어린양의 피의 공로와 권세’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범죄하도록 유혹하고 이끄는 마귀와 싸워서 이긴다는 것이 곧 성화라는 내용도 백번 옳은 설교입니다.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는 것도 맞는 설교입니다. 성도의 순종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우리 마음에 발라주시는 하나님의 손의 역할을 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일어난 마음의 변화, 즉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게 됨으로 나타납니다. 구약 백성들처럼 이성의 결단으로 율법 조항들의 내용을 준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31:26~31:46분>
“말은 로마카톨릭도 전부 다 성경적인 겁니다. 성경적으로 틀리면은 로마카톨릭이 존재할수가 없어요. 수 많은 학자들, 수 많은 신부들, 수 많은 추기경들 ... 얼마나 똑똑합니까? 그들이 성경을 달달달 다 연구하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성경에 없는 일들이 버젓히 나올 것 같습니까?” (정대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로마교회의 구원론 하나를 예로 들어봅시다. 로마교회의 구원론 속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효과적인 부르심)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전혀 없습니다. 로마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도움의 은총’이라는 것을 주시는데, 그것은 구원의 은혜가 아니고 사람이 자기의 구원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로마교회에서는 사람이 ‘도움의 은총’의 역사 아래 자기의 구원에 대해 스스로 고심하고 이성적 결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사람은 로마교회의 신부의 지도를 받기 시작합니다. 신부가 보기에 적당한 때가 되면 영세를 시행하여 원죄를 제거하는 은총을 주입합니다.

로마교회에서는 영세를 통하여 구원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로마교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려고 하면 기를 쓰고 신부를 불러 영세를 줍니다. 심지어 태중에서 죽는 아기에게 주사기를 쫒아 성수를 주입하면서 영세를 시행하기도 합니다. 

로마교회의 구원은 '믿음과 행함'의 합작품입니다. 그러나 요즘 로마교회는 겉으로는 오직 믿음으로 칭의(구원)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이미 감리교, 루터교와 의화교리 합의서를 작성했습니다. 종교개혁 교회들이 로마교회와 의화교리 합의서를 작성함으로 종교개혁자들이 흘린 피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이성으로 믿음을 택하고 준비하는 사람에게 신부가 영세를 시행함으로 원죄를 제거하고 성화되게 하는 은총을 주입함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변함없는 구원론인데, 적당히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음을 믿는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성경적 이신칭의는 영세의 시행이나 성화(행함)과 무관하게 오직 믿게 하시는 은혜를 따라 나타납니다. 

로마교회는 영세를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을 엄하게 경계시킵니다. 죽을 때까지 사람은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계속 바르게 살아가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로마교회에서 구원은 믿음과 행함이 합작하여 만들어 내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에서는 믿음 이후의 행함이 중요한 구원의 조건입니다. 믿음으로 단지 구원이 시작된 사람 자신의 지속적이고 온전한 순종과 회개, 즉 완전한 율법준수가 실행되는 삶으로 구원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성경적 정통 개혁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칩니다. 성경이 믿게 하시는 역사를 따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로 이루어지는 완전하고 영원한 이신칭의를 믿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이루어진 이신칭의는 반드시 성경적 행함이 있는 삶이 나타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신칭의 신앙에서 행함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조건이 전혀 아닙니다. 열매는 건강한 나무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지 열매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의 열매로서의 온전한 행함의 정도와 깊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 모양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함을 보고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려는 시도는 늘 위험합니다.

사실 정대운의 로마교회에 대해 적의를 보이지 않는 이런 설교 내용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청교도신학과 로마교회 신학이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로마교회는 사람의 구원의 완성이 믿는 사람 자신의 율법준수(완전한 회개와 순종)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로마교회는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구원을 위해 고심하다가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청교도 신학도 율법의 선포로 사람의 이성이 구원에 대해 각성되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신자들에게 율법을 선포하면 성령이 사람에게 영적각성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목회신학 회심준비론입니다. 

율법을 선포하면 불신자에게 성령이 영적각성을 일으켜서 자기의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생을 향하여 스스로 나아가게 된다는 청교도 신학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도움의 은총'을 주어 구원을 얻고자 결단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자 로마교회에 나가 신부들이 지도를 받다가 영세로 구원을 받게하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은 매우 유사합니다. 둘 다 인간의 이성의 역할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구원론입니다.

“말은 로마카톨릭도 전부 다 성경적인 겁니다. 성경적으로 틀리면은 로마카톨릭이 존재할수가 없어요. 수 많은 학자들, 수 많은 신부들, 수 많은 추기경들 ... 얼마나 똑똑합니까? 그들이 성경을 달달달 다 연구하는 사람들이에요. 근데 성경에 없는 일들이 버젓히 나올 것 같습니까?” (정대운)

로마교회의 교리가 말로는 다 성경적이라는 정대운의 이런 설교는 로마교회의 신학과 자신의 청교도 신학 사이에 유사한 구조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설교를 할 수없습니다. 혹시 이 부분만 잘라서 녹취하여 전체 흐름을 왜곡한 것은 아닌가요? 쉽게 이런 설교를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어 이 부분의 앞뒤를 직접 자세하게 듣지 못하였는데, 혹시 이 부분만 듣고 오해한 것이면 추후 정정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33:19~34:17분>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부해야 합니다. 확신 갖지 못해요. 이런 전도법이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다 망가뜨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어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형제여 이것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오늘부로 당신은 주님의 백성입니다. 이제 확신을 가지십시오.’

여러분 이게 가짜입니다. 이게 가짜에요. 진짜는 이래요. 교회 갑시다. 그 교회에서 몇 년 동안을 주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구속에 대해서, 우리의 그리스도 연합에 대해서 끝까지 가르칠 때 가만히 듣고 공부한 사람이 그거 맞네! 그거 맞네! 그렇게 되는 게 구원이에요. 여러분 믿으십니까?” (정대운)

여기에서 정대운의 거짓된 신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령이 전도하시고 믿게하시는 역사를 따라 믿음고백한 사람의 구원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날 기분을 따라 예수 믿기로 결정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경우는 설교의 소재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정대운이 말하는 것처럼 전도 받고 예수 믿은 사람이라면, 그 자신이 자기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정대운은 쓸데없는 비유를 들면서 성경적 구원 신앙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그리스도의 죄용서의 복음을 전파하여 주시고, 성령이 죄로 이미 죽은 사람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고백에 이르게 하심으로 즉시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정대운은 이와 같은 성경의 중대한 말씀들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율법의 기능으로 사람이 영적각성을 받아 이성의 작용으로 자기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자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정대운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추종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 복음을 전하하여 주시고, 성령이 은혜로 역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고백이 나타나게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을 대적하는 이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대운은 전도받고 교회에 나와 구원의 원리에 대해 철저하게 배운 후 완전히 동의하는 사람이어야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구원에 대해 이성으로 철저하고 완전하게 파악해야 구원이 일어난다는 주장입니다. 불가능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과정과 원리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피조물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내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7,8)

성령으로 말미암는 인간의 중생에 대해 인간이 세밀하게 파악하고 진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에 나와 구원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구원 받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마땅합니다. 정대운은 신앙의 원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이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주십니다. 먼저 성령과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난 후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복음을 통해 사람에게 주신 구원에 성경 말씀들에 근거하여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을 합니다. 성령과 복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교회에 가입하여 구원의 원리를 자세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대운은 신앙의 원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