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변주의자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러한 증거들은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나타났고,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그 한계를 벗어나면 교회 공동체가 당시에는 혼란과 다툼으로 마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사랑의 덕목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성경의 가르침이 확고하게 서서 그 진리의 등불을 선명하게 밝혀주었다.

역사적으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한 인격 두 본성에 대한 기독론 논쟁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이신칭의, 성자의 동정녀 탄생, 그리고 성경의 무오성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진리에 대한 가르침은 여전히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탄은 이 진리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다 동원한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리우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인정하였지만, 그는 성경 밖에서 성자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성경 밖에서는 자신들의 신념과 교파의 가르침이 우선이라고 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어느 특정 분파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유만으로 맹목적으로 그들의 가르침 가운데 오류를 지적하여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필자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양태론적인 설교를 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물고, 뜯고, 급기야는 이단으로 정죄할 것이다. 그런데 회중파 청교도의 거장이라고 하는 토마스 왓슨은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을뿐더러, 그럴 수 있다는 아주 관대한 포용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누구의 가르침이 우선인가?

오직 성경만이 진리의 기준이고 교회 가르침의 절대적인것이다. 필자가 지금 이렇게 성경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기준과 신앙의 규범의 전부인 것을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효력을 무너뜨리고 있는 “능동순종”이 얼마나 비성경적 가르침인지를 언급하기 위함이다.

능동순종에 대하여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다시 한번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능동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모든 율법에 순종하여 율법의 의를 획득하였고, 예수 자신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1634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회중파 청교도들의 주장은 성경밖으로 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순종은 단지 아담의 죄만 용서하여 주시는 의로운 행동이고 영생을 주는 것은 십자가의 대속 사건이 아니라 모든 율법의 순종을 통해서 구원을 주시는 것”이라는 능동순종의 궤변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능동순종, 수동순종이라고 구분하지 않고 온전한 순종이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으로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능동순종으로(모세의 모든 율법 순종으로 얻으신 의) 성도가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주장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결국 1658년 사보이 궁에서 자신들이 만든 사보이 신앙 선언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중파 청교도들의 신학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신앙 선언 가운데 또한 교회 정치 가운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지 말이다.
 

회중파 청교도들의 신학의 특징은 바로 사변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변적 신학의 특징은 어떤 특정 주제를 가지고 교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합리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합리성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벗어나는 오류를 범한다. 결국 능동순종은 성경에도 없는 그들만의 교리로 전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회중파 청교도들의 이러한 신학적 오류는 단순히 칭의 교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회중파 청교도들의 가장 큰 신학적 문제는 바로 교회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회중파 청교도들이 1658년 사보이 궁에서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선언할 때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 장로교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오늘날 일부 신학 교수들의 평가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회중파 청교도들이 장로교 신앙고백서인 웨민을 인정했다면 그들은 사보이 선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 당시 우리 장로교의 선진들이 이들의 신학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지금 우리보다 더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개혁교회는 회중파의 교회론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는가!

회중파 청교도들의 교회론은 지상의 교회 가운데 또 다른 교회, 즉 완전한 교회를 이루려고 한 것이 그들의 가르침 속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성화는 불완전하다고 하는 칼빈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율법 순종을 통해 완전한 성화를 이루려고 했고, 그것을 지상의 교회에서 실현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신학의 함정, 즉 사변적 신학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급기야는 율법주의를 통한 성도들의 삶을 정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아메리카에 상륙한 회중파 청교도들의 교회와 그들의 삶을 통해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

회중파 청교도들의 또 다른 신학의 사변은 바로 언약 신학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언약 신학을 만들어 그 언약에 고백하는 자들만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기준을 만들었다. 자신들이 만든 언약을 고백지 않고 함께 하지 않는 자들과 교회는 거짓교회이며 거짓 백성들이다.

행위언약(포에두스 오페룸)도 회중파 신학의 산물이다. 비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단 한 번 행위언약의 용어가 등장하지만 대, 소요리 문답에서는 행위언약이 아니라 생명 언약이라고 하는 용어를 조상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웨신서를 작성할 당시 우리 조상들은 회중파 청교도들이 주장한 행위언약이라고 하는 용어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졌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담의 행위에 위해 결정된다고 하는 아담 공로, 즉 인간의 공로에 주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행위언약이라고 하는 용어가 언급되었다.

행위언약의 가장 큰 오류는 아담의 존재, 즉 아담이 영생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직 가변적인 존재로 언약에 순종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아담은 영생하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였다고 아주 분명하게 자신의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담이 선악과 명령에 순종하였다면 아담은 영생하는 존재로 계속 영생을 계속 누릴 수 있었지만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 것이다. 순종하여 영생을 획득,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계속 누리며 사는 존재였다고 칼빈은 가르친다.

이상으로 장로교 목사, 또는 신학자가 회중파 청교도들의 신학이 장로교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아주 어리석고 무식한 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통해 가장 성경적인 신학이 무엇인지 항상 교훈을 받고 있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이 가르쳐준 바른 성경적 진리를 배우지 않고 단지 인간의 사변에 의해 합리성만을 구하려고 하는 -그저 누가, 유명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식으로만- 신학적 교리에 접근한다면 가장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능동순종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에서 길을 찾지 않고 어떤 사람, 누구의 주장에 의해 길을 찾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 또는 설교자라고 할지라도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자는 궤변을 주장하는 자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씀하는 곳까지만 가야 한다고 했다. 칼빈의 이러한 가르침만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를 사변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가장 훌륭한 자세인 것이다.

능동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을 통해 우리가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아주 사악한 이단적 사상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였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고 믿는다. 그러나 칭의에 있어 율법은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대로 능동순종은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능동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모든 율법 순종을 통해 의를 획득하였다고 하는 궤변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회중파 청교도들의 칭의는 궤변이고 그들의 교회론은 장로교회의 교회론과 다르며 언약 사상도 사변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개혁신학연구원 총무 임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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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