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남 교수, 지난 해 정이철 목사(아래)와 함께 회심준비론 등에  대해 토론할 때의 모습
김효남 교수, 지난 해 정이철 목사(아래)와 함께 회심준비론 등에 대해 토론할 때의 모습

 

최근 김효남 교수가 <총신원보>(22.10.18일)에 올린 글로 인해 합동 총회가 들썩이고 있다. 일각에서 김효남 교수를 파면시키기 위해 총회의 관련된 사람들을 접촉하여 사태의 신학적 심각성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믿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은 후 무엇을 더 하자는 것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는 의견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나아게 했던 재미있는 말을 그대로 소개하니, 독자들은 필자가 한 말이라고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기 바란다.

“김효남 교수의 말은 그리스도가 대속적 죽음과 자신을 우리에게 연합시키심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지 못하니, 모세의 율법을 다 준수하여 얻으신 율법의 의를 우리에게 더 추가하여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그리스도의 목욕재계의 의, 그리스도의 금욕생활의 의 ... 이런 것을 같다가 붙이는 것보다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율법준수의 의를 갖자가 붙이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종교다원주의 하자는 것도 아니고, 총신이 처음부터 개혁신학을 바르게 가르친 학교도 아니니 그냥 넘어갑시다.”

김효남 교수가 <총신원보>에 올린 글이 왜 심각한 내용인지 그의 말을 직접 보도록 하자.

“두 번째 아담의 능동적 순종으로 이룬 의와 수동적 순종으로 이룬 죄사함이 우리에게 모두 전가되어 우리는 타락 전 첫번째 아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이루지 못했던 율법의 의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김효남).

김효남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완전히 동의하는 학자이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에게 칭의가 이루어지는 원리와 방법에 대한 설명에서 심각한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우리 합동과 총신은 이제까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죽은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죄인들을 살리는 의가 되시려고 작정하셨다고 배웠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하심을 그대로 가지는 사람으로 성육신하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셨고, 동시에 믿음과 성령 안에서 자신을 죄인들에게 연합시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본래의 거룩과 의를 죄인들의 옷으로 선물하여 칭의를 만드셨다는 것이 총신과 합동이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친 칭의 신학이었다.

성경도 합동과 총신이 가르쳐 온 칭의 신학과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그러나 김효남 교수는 그리스도가 ‘능동적 순종으로 이루신 의’와 수동적 순종으로 이루신 죄사함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능동적 순종으로 이루신 의를 다르게 말하면,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준수를 통해 얻으신 영생의 권리(의)를 얻으시고 우리에게 전가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에게 죄용서를, 그리고 모세의 율법준수 사역으로 우리에게 천국생활을 누릴 자격으로서 의(권리)를 전가하여 주셨다는 의미이다. 김효남 교수의 말을 다시 보자.

“두 번째 아담의 능동적 순종으로 이룬 의와 수동적 순종으로 이룬 죄사함이 우리에게 모두 전가되어 우리는 타락 전 첫번째 아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이루지 못했던 율법의 의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김효남).

김효남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고 영생을 얻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식이 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원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심각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 어디에도 의인이 되어 천국 생활의 자격을 얻기 위해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로서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완전하게 지켰다는 것인가?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성경 어디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의를 얻으시기 위해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힘써서 지키신 모습이 나오기나 하는가? 오히려 성경은 모세의 율법이 영생의 의를 얻는 것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 3:11)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1).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 7:19).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신학자들 역시 율법과 칭의를 얻는 것이 전혀 관련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후대에 들어온 율법은 성질상 은혜 언약과 고체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다. 여기서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함은 인생들로 하여금 그 범죄한 것이 많음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뜻이다(롬 4:15, 5:20). 그러면 율법의 목적은 새로운 구원 방법을 제시함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에만 있다” (박윤선, <계시의존사색>, 126)

 

“율법의 기능은 죄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은 이러이러한 것을 행하면 범죄하고 지적하고 교훈한다. 그러므로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율법이 알려준다. 내 양심에 가책을 일으켜서 죄를 알도록 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한다 ... 율법은 살리고 구원하는 기능은 없고 정죄하고 죽이는 기능을 갖는다. 사람은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와 명령을 지킬 수가 없다. 그련데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고 저주한다. 이 정죄와 저주가 어떠한 것임을 율법은 밝힌다” (서철원. 하교리 해설, 48-49)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칼빈, 기독교강요, 3.11.3)

이와 같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신학자들은 율법 그 자체 속에 영생의 자격으로서 칭의를 얻게 하는 기능이 없다고 한다. 그런대 총신을 대표하는 위대한 개혁신학자 김효남 교수는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모두 완벽하게 지키신 공으로 얻으신 율법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그것이 십자가의 공로에 추가되어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 김효남 교수의 말을 다시 보자.

“두 번째 아담의 능동적 순종으로 이룬 의와 수동적 순종으로 이룬 죄사함이 우리에게 모두 전가되어 우리는 타락 전 첫번째 아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이루지 못했던 율법의 의를 얻어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김효남).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말 속에는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김효남).

우리와 김효남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김효남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공로로 말미암아 얻어진 율법의 의, 즉 천국영생을 주는 적극적인 의가 죄용서를 주는 십자가의 소극적인 의에 접합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니 다른 무엇이 0.00001%라도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를 저주받을 이단이라고 단호하게 정죄한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를 희생하여 이루어 내신 죄용서만으로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이 주어진다고 한다. 십자가의 죄용서는 지옥에 가지 않게 하는 소극적인 의이고,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능동순종)은 천국을 누리게 하는 적극적인 의라고 믿는 김효남 교수의 신학을 성경은 이단사상이라고 정죄하고 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 6: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딛 2:14).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게 하셨느니라” (히 10:14).

칼빈도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의 희생으로 이루신 죄용서가 곧 우리의 칭의이고 구원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고 할 때에(눅 18:14), 그가 어떠한 행위의 공로로 의를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리가 옳은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행위가 옳다는 인정을 받아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저 사면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브로시우스가 죄의 고백은 합법적인 칭의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기독교강요, 3.11.3).

율법준수 없이는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였다는 총신의 위대한 신학자 김효남 박사의 개혁신학은 지금까지 우리 총신과 합동이 가르치고 배운 신학과는 상당히 결이 다른 내용이다. 대체 왜 이런 내용의 개혁신학이 총신 속으로 들어왔을까? 이런 내용의 개혁신학을 출발지는 어디일까? 다음의 김효남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타락 이전의 아담이 이미 영생을 확보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영생을 확보했다면 영생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던지 죄를 짓는 기다하더라도 심판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속성상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김효남).

김효남 측 개혁신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이 곧 죽을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김효남측 개혁신학은 하나님이 곧 죽을 아담을 창조하시고, 웨신서에 나오는 행위언약을 아담에게 주었다고 한다. 행위언약이란, 아담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그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아담을 자식으로 삼고 그에게 영생을 주시길 했다는 매우 비성경적인 언약 사상이다.

김효남측 개혁신학을 믿는 분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자식이 되고 영생을 얻기 위해 지켯어야 할 율법이 훗날 시내산에서 돌판에 기록되어 주어졌다고 한다. 김효남도 같은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은 무엇일까요? 사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원리를 만들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율법을 명문화시킨 것이었습니다” (김효남).

결국 곧 죽을 사람으로 창조된 아담은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 그래서 영생을 얻지 못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김효남측의 개혁신학이다.

반대로 제2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간음할 수 있는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 오셨으나 조금도 간음하지 않았고 (만일 간음의 죄성 자체가 없는 인간으로 오셨다면 그 율법준수 개념이 성립하지 못하므로), 우상숭배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인격으로 오셨음에도 우상숭배하지 않고 ... 그런 방식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여 율법이 주는 영생의 자격(율법의 의)을 얻셨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믿으면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이 김효남측 개혁신학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육신과 핵심 진리들을 무너뜨리는 이단사상이다. 

이런 이야기는 전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과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개혁신학이라고 김효남측은 주장하고 있다. 더욱 더 무서운 사실은 이것이 미국의 웨신과 칼빈이 떠받치고 있는 기독교의 주류 신학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영생이 없는 아담이 자력으로 영생획득에 실패하였다는 이야기 속에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저주하셔야 할 심각한 죄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대체 하나님은 왜 진노하셨는가? 대체 아담을 원죄를 통해 무엇을 잃었는가? 하나님의 자식도 아닌 아담이 자력으로 영생획득에 실패하였다고 하나님이 화를 내시고 저주하시다, 다시 태도를 바꾸어 자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아담을 살리시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현재 미국의 웨신과 칼빈, 리폼드, 커버넌트 등이 가르치고 영국의 주류 신학이 가르치는 이런 내용의 개혁신학은 성경을 죽이는 신학이지 성경대로 믿게 만드는 신학이 아니다. 김효남측 개혁신학이 지금까지 세계적인 주류신학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이 일어나기 전에 총신이 이런 내용을 잘 알고 믿고 따른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믿음의 상식이라는 방패를 통해 이런 내용의 신학을 수용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의 계보를 중시하는 신학자들에게나 중요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제 김효남 교수의 용기를 통해 이 문제가 합동에서 공론화되었으니, 드디어 결판을 볼 기회가 생겼다. 김효남측 개혁신학, 즉 미국의 웨신과 칼빈과 리폼드와 커버넌트 등이 가르치는 신학, 즉 회중주의 청교도들의 유산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잘못된 개혁신학을 그대로 답습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에 근거하여 한국의 총신과 합동의 개혁신학을 새로운 형성할 것인가? 에 대해 이제 고민할 때가 되었다.

김효남 측은 세계의 대세에 호소할 것이므로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합동과 총신을 김효남 개혁신학과 성경적 개혁신학으로 분리하여 두 개의 신학교와 총회로 분리하는 것이 쉽고 또한 좋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교수들이 다쳐서 직장을 잃거나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될 수 있다.

오늘 날의 대부분의 신학교는 교수들의 직장이지, 하나님의 진리를 다룰 수 있는 곳이 더 이상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현실도 감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김효남 교수는 로마교회의 영세를 합동이 세례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 합동이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것 등에도 반대하고 있다. 이제 합동은 두 총회-신학교로 분리하여 서로 싸우거나 시비하지 말고 김효남 교수 등이 이러한 사상을 자유로이 강의하고, 더 나아가 여성안수, WEA, 오순절-신사도 사상들을 활발하게 가르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여 이 분들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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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