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보된 내용이 누구의 글인지 알지 못하고 쓴 "회심섭리론, 회심준비론 모두 사탄이 자기 종들에게 가르친 다른 복음"(22.11.28일)을 대폭 수정하여 다시 올리는 글이다. 문제의 글이 서창원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써서 전파한 글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서창원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강사)
서창원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강사)

"회심준비론에 대한 반박이 크다. 나는 용어 자체를 ‘회심섭리론’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본성적으로 복음을 즉각적으로 받을 준비가 된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복음 제시를 위하여 첫 번째 단계는 죄책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죄인의 양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그의 율법에 의하여 심판 받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즉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에게 깊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무딘 양심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좌절을 느낄 수 없고 주님이 제시한 복음의 길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서 온 것이지 의인을 구원하려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죄인임을 깊이 절감하게 만들어야 하고 죄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껴야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날 강단이 죄를 다루지 않고 인간의 죄성보다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고 부추기며 자존감 세워주기 급급한 메시지로는 그리스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자신들의 종교적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가 될 뿐이지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요 인생의 목적이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깊이 상처를 받아야 복음으로 치유 받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아프지 않는데 어떻게 의사에게 다가가겠는가?

인간은 아픈 존재라는 것을 실감케 하지 못하고 건강한 존재요 평안한 존재임을 부각시키는 강단의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전혀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없이도 잘 굴러가는 종교집단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교회에 나아오는 성도들 중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돌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현대 설교자들 중 상당수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큰 방해가 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두 가지 다른 것을 혼돈하고 있는 것이다(근거와 방식에 대한 혼돈).

즉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근거는 그리스도 자신의 약속이다. “누구든지 내게 나아오는 자를 결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이다. 죄인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조건으로 사전에 뭔가를 준비할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약속의 근거 위에서 행동하고 그리스도에게 안주하게 만드는 일반적인 방식은 죄책을 통감하는 것이다. 인간은 철저히 잃어버린 상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는 깊은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에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심리적 혹은 종교적 위안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생명의 교통함이 없이 단지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종교인이 될 뿐이다. 영혼의 회심에 대한 소리들이 이 땅에 더욱 크게 들려지는 은총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안에 있게 하는 방편인 참된 회심을 촉구하는 복음 설교가 회복되어야 한다" (서창원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올린 내용/22.11.28일).
 

서창원 교수가 독자들에게 직접 나서서 자신의 신학을 변증하는 모습
서창원 교수가 독자들에게 직접 나서서 자신의 신학을 변증하는 모습

 

서창원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 복을 통해 주장하는 위의 내용은 예장 합동 2022년 총회가 '교류금지'로 결의한 청교도 신학의 회심준비론을 계속 옹호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합동 총회의 결의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이므로 이 글을 써서 모두에게 경각심을 알리고자 한다. 서창원 교수의 첫 두 문장만 인용하고 그 문제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서창원 교수의 글의 첫번째 문단은 다음과 같다. 

“회심준비론에 대한 반박이 크다. 나는 용어 자체를 ‘회심섭리론’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본성적으로 복음을 즉각적으로 받을 준비가 된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복음 제시를 위하여 첫 번째 단계는 죄책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서창원).

본성적으로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된 인간이 없다는 말은 맞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 자연적 인간이 복음을 스스로 받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복음 제시를 위해 사람이 먼저 죄책감을 가지게 했다는 내용은 크게 비판해야 할 내용이다. 

청교도들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지 않고 먼저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기 위해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전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심준비론, 또는 회심섭리론의 핵심이다. 청교도들이 중시했던 이것에 대해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신약의 사도들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어찌하였는가?

둘째, 청교도들의 그 방법은 어떤 결과(열매)를 만들어 냈는가?

먼저 신약의 사도들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어찌했는지 살펴보자. 신약의 사도들의 방식을 우리가 살펴보는 이유는 그들의 방식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사용하신 사람들이 바로 신약의 사도들이기 때문이다.

신약의 사도들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먼저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전파하여 사람들이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았다. 신약의 사도들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다음의 성경 구절들이 말하여 준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행 8:4)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행 8:2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행 8:35)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행 8:40)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행 10:36)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행 14:7)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행 14:21)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행 16:10)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행 20:24)

신약의 사도들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 죄인들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와 고난을 대신 받으셨다고 전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마치 그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죄인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직접 받고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된다는 복음을 전했다. 그것이 신약의 사도들이 영혼들을 구원하는 방식이었다. 

신약의 사도들의 활동에서 먼저 율법을 전하여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지게 한 후 그리스도의 죄용서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사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전하여 영혼들을 구원하겠다고 목회를 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혼들을 구원하는 원리는 가르치겠다고 신학교의 교수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신약의 사도들이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방식을 진리로 수용하고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 율법으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먼저 일으킨 후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일으킨다는 거짓된 사상을 계속 섬기고 주장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영원한 이단이다. 이단이므로 그런 거짓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저주하시려고 작정하셨으므로 그런 이단의 길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율법 선포로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었던 청교도들의 목회 방식의 결과(열매)는 어떠했을까? 한국 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의 진실을 하나 말하고자 한다. 에드워즈의 목회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을 심화시키고 자살을 결행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동안 크게 두 번의 부흥이 있었다. 1734-1735년의 부흥을 '밸리 계곡의 부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국 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국 교회에는 1740-1742년에 일어난 부흥만 잘 알려졌다. 1740-1742년에 일어난 부흥을 우리는 '대각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에드워즈의 두 번의 부흥 모두 회심준비론 부흥이었다. 한국 교회에 에드워즈는 마치 신대륙에 하강한 천사의 성육신자였던 것처럼 신성시되고 미화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에드워즈는 심각하게 불건전한 인물이었다. 그의 불건전성을 몇 가지로 분류하면, 1) 명상 신비주의, 2) 거짓 성령운동, 3) 회심준비론이다.

에드워즈는 이상한 영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었다. 숲에서, 또는 방에서 기도인지 명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을 자주했고, 그때 매우 요상한 일들이 그에게 일어났다.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성령의 역사가 그에게 나타났다. 성령 자체가 매우 감각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체험되었는데, 그것은 중세의 명상 신비주의 신인합일 영성의 대가 버나드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신약 성경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 자체가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독교에 없는 일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을 깨닫고 바르게 해석하게 하고 적용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역사한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성령을 투광조명, 즉 자신은 드러나지 않고 대상만 드러나게 하는 특수한 조명과 같은 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에드워즈에게 성령 그 자체를 달콤하게 체험하는 신비적인 현상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이 아니고, 성령으로 위장하는 다른 영이 그를 어루만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드워즈가 명상(기도)하는 중에 삼위일체를 보았다고 직접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것은 심각한 신비주의 이단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신비는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한 비밀이고 영원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해부하거나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명상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를 보는 것은 이단들에게나 가능한 거짓 영의 속임수인데, 에드워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에드워즈의 이런 모습을 두고 부흥과개혁사의 백금산 목사는 에드워즈를 어거스틴과 칼빈을 능가하는 교회사 속의 최고의 영적 거장이라고 격찬하였다. 백금산 목사는 일찍 신학의 길을 알았던 사람인데, 이런 모습을 보면 그가 성령이 내주하시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을 일으키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사람에게 구원을 일으키시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게 하심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바르게 전하고 믿게 하심으로 구원을 일으키신다.

부흥과개혁사의 대표 백금산 목사는 에드워즈의 신입합일 신비주의 영성의 현상들, 그리고 회심준비론 목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의 교리에서 한국 교회가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백금산 목사의 이런 모습들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전혀 맞지 않는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하심으로 백금산 목사에게 구원을 일으키셨다면, 백금산 목사가 그 동안 했던 일들은 나타나지 않았어야 한다. 또는 이제라도 그 동안 백금산 목사가 했던 일들을 스스로 철회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그것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백금산 목사와 함께 하고 있음의 증거이다.

에드워즈가 신약의 사도들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즉시 구원하지 않고, 율법을 전해 죄책감에 빠지게 만드는 회심준비론 목회를 했던 것은 그에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신약의 사도들의 길을 따라가는 진리의 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회심준비론 목회이다.

에드워즈의 회심준비론 목회의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첫째 부흥(1734-1735, 밸리 계곡의 부흥)에서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이 심화되고 자살이 쏟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죄용서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설교하여 죄책감에 빠지게 하니, 정신이 미약한 사람들은 “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겠구나!”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그 결과 우울증이 심해졌다.

그리고 평소에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서 “이 상태로 살다가 구원 받지 못할 바에는 차리지 일찍 죽는 것이 좋겠어!”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교인들 가운데 자살을 결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첫째 자살 결행자는 실패하여 소동으로 끝났으나, 둘째 자살 결행자는 날카로운 칼로 자기의 목을 자르는데 성공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그 날이 주일 아침이었으므로 부흥운동은 고사하고 주일 예배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계속 자살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첫 번째 부흥은 그렇게 끝났다. 첫 번째 자살한 사람은 에드워즈의 이모부였다. 그 일로 사망자의 아들, 즉 에드워즈의 이종 사촌은 회심준비론 목회로 자기 아버지를 죽게 한 에드워즈 목사를 가정의 원수로 여겼고, 결국 교회에서 쫓아내는데 앞장서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두 번째 부흥(1740-1742, 대각성운동)도 회심준비론 목회 선상에서 일어난 거짓 부흥이었다. 이번에는 거짓 성령의 역사가 쏟아졌다.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 가운데 괴이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감정(울음, 웃음)에 빠져들었고, 기운이 빠지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신체적 현상들이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에드워즈의 부인 사라는 1742년 초 어느 날에 입신에 빠져들었다. 이틀 동안 세 번이나 미국의 유명한 은사주의 여자 목사들처럼 입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미 신학이 비틀어져 있으므로 그런 일들을 문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칭송하였다. 그런 이상한 일들을 성령의 회심체험이라고 미화하였고, 성령에 의해 성화되어가는 모습이라고 극찬하였다. 

회심준비론 또는 회심체험론은 사탄이 자기 종들을 무장시키는 사악한 신학이다. 에드워즈를 보면 명확하게 이해된다. 회심준비론 목회를 열심히 하면 지금도 우울증 환자들이 나타난다고 어떤 청교도주의 목사가 자기 친구 청교도목사의 교회를 보고 알았다고 누구에게 말하였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우리는 모든 목회자들에게 “사람을 구원하고 싶으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전하라”고 당부해야 한다.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로 먼저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어야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은 사탄이 자기 종 목사들에게 가르치는 신학이다. 로마교회의 신부들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모든 개신교 목사들과 신학교 교수들이 다 구원 받은 성령의 사람들이 아니다.
 

2. 서창원 교수의 글의 두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죄인의 양심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그의 율법에 의하여 심판 받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즉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에게 깊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무딘 양심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좌절을 느낄 수 없고 주님이 제시한 복음의 길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서창원).

지금 서창원 교수는 성령에 의해 우리 영혼의 중생이 일어나지 전에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인식하고 연구하고 고심할 수 있다는 신학, 즉 펠라기안주의 또는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초기도움의 은총' 안에서 모든 인류가 자기의 구원에 대해 고민하다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인도한다고 가르치는 로마교회의 구원론을 동일하게 주장하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선행은혜'라는 개념 하에서 모든 인류가 자기의 구원에 대해 스스로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웨슬리안주의(감리교, 성결교) 신학과 유사한 내용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청교도들은 죄인에게 율법의 저주를 선포하면 성령이 그 사람이 지옥을 두려워하고 천국을 소망하더록 일깨우기 위해 '영적 각성'을 일으키신다고 가르쳤다. 영혼의 중생이 일어나기 전에 율법의 저주에 의해 벌어지는 영적각성이 그 사람에게 스스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율법을 지키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사모하고 깊이 간구하게 만든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영혼의 중생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이 자기의 구원에 대해 갈망하고 애쓴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로마교회, 웨슬리안들, 알미니안들, 펠라기안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회심준비론의 핵심적인 내용인데, 그 동안 이런 사상이 정통 개혁주의라고 서창원, 김효남, 정성우, 정대운 등의 청교도주의자들에 의해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영혼이 중생되기도 전에 사람이 어떤 종류의 성령의 터치를 받아 자기의 지옥행 운명의 비참을 알 수 있고, 구원을 위해 스스로 탐구하고 갈망하게 만들 수 있다는 회심주의는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다. 우리 합동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신앙하는 위대하고 영명하고 신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가르치는 내용도 아니다.
 

성경과 웨신서는 구원을 회심으로 설명하지 않고 생명에 이르는 회개로 설명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8)/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적 은혜이며, 그 교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 의해 전파되어야 한다" (웨신서 15:1).

생명얻는 회개는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가? 택하신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전파되면 성령이 믿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 사람에게 적용되어 마치 처음부터 반역 죄를 범한 죄인이 아닌 것으로, 그리하여 완전한 의인으로 간주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웨신서는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한 모든 사람을 또 그들만을 그의 정한 그리고 받는 때에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효력 있게 부르되, 그들이 본질상 처해 있는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에로 부르기를 기뻐하셨다. 그 때 그는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이르도록 밝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돌 같은 마음을 제하며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고,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결심시켜 선한 일을 위하게 하시며,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효력 있게 이끄신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원하는 자가 되어 지극히 자유롭게 온다" (웨신서 10:1).
 

칼빈과 서철원 박사도 구원을 회심으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고 회개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를 한 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 (기독교강요, 3.3.9).
 

"하나님에로 돌이킴을 통상적으로 개종 혹은 회심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회심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고 회개라고 해야 한다.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가 주 예수에게로 돌이킨 경우에도 회심 내지 개종으로 말할 것이 전혀 아니다" (구원론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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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