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합동에서 진리를 연구하고 논의하는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다. 매우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교회에서 논쟁이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른 자들이 분리된다고 말씀했다.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전 11:19).

그런데 비판을 받는 분들에게서 바람직하지 않는 방법으로 논쟁을 해결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공개적으로 변론에 임하지 않고 대신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내용이다. 교단의 전통을 등에 업는 프레임 싸움을 벌이려고 한다는 내용이다.

“정이철 목사가 우리 교단이 신봉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멸시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가 우리 교단이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믿는 우리와 교단이 이단인지 정이철 목사가 이단인지 가려달라고 헌의를 올리자!”

참으로 딱한 일이다. 이렇게 궁리하는 힘으로 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변증하려는 생각은 해 보지 않는 것일까? <바른믿음>에 보내면, 언제든지 탑으로 올려드릴 것인데, 왜 그리하지 않으실까? 지금까지 내가 늘 했던 말들을 다시 반복하면서 요약해 본다.

1)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말고 율법의 저주를 전하여 사람이 죄책감을 먼저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다가 심각한 비판을 받았으면, 성경 어디에 자신의 그 주장의 근거가 있는지 찾아서 공개적으로 변증하는 것이 목회자로서, 교수로서 마땅한 자세이다.

신약 교회를 설립한 그리스도의 종들(사도들과 제자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먼저 전파하는 것 대신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전하여 사람들이 죄책감에 빠지게 만들고자 시도했는지 공개적으로 변증해야 마땅한 지식인의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 거듭나지 않는 죄인들에게 율법의 저주를 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전하면 대체 어느 착한 불신자가 죄책감에 빠지게 되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불신자들은 율법의 저주를 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면 모두 한결같이 이렇게 반응했다.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사람아!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 것이니 네 할 일이나 해라!”

이미 우리 교단이 회심준비론에 대해 ‘교류금지’를 결의했음에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서창원 목사는 어디서 그런 순하고 착한 불신자들을 많이 만났기에 불신자들에게 율법의 저주를 전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한 후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지,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나누어 주시기를 바란다. 지금은 그런 일이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기껏 “정이철 목사가 우리 교단이 채택하여 신봉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해 스크래치 만드는 언행을 일삼고 있으니, 그것을 그대로 존중하는 우리와 교단이 이단인지 정이철 목사가 이단인지 가려달라는 헌의를 올리자!”라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 사람이 만든 문서를 기초하여 하나님을 믿는지 다시 생각해 보시면 좋겠다.

이미 우리 교단이 회심준비론 목회에 대해 이미 ‘교류금지’를 결의했음에도 여전히 주장하고 고집하는 것이 우리 교단의 목사이며 교수인 사람의 올바른 신앙 자세인가? 서로 헌의를 올려서 한쪽이 죽어야 한다면, 과연 누구에게 불리한 상황인지 정말 모르고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것인지 안타깝다.

2)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 조항들을 완전하게 지켜서 영생을 위한 자격과 권리, 즉 영생의 의를 얻으셨고, 그것을 자신과 우리에게 적용하여 천국 영생을 누리게 만들었다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의 근거는 성경에 전혀 없다는 것이 내가 줄기차게 강조한 내용이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방식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이고 두뇌이다. 그 중요한 내용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성경에서 그 내용을 찾아서 제시하면 그대로 끝나는 일이다.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모두 지키신 공덕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고 가르치거나 암시하는 성경의 내용 한 절만 제시하면,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비판을 내릴 것이고 <바른믿음>도 폐쇄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왜 그 쉬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제 하나의 공약을 더 추가하고자 한다.

“만일 율법을 지키는 것과 구원 얻는 것이 눈꼽만큼이라도 상관있으면 목사 안수를 반납하겠다!” (정이철).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지키신 공덕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면, 율법을 지키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이 관련되어야 한다. 그것의 증거를 찾아주면 종로 낙원 떡집에서 떡 사주겠다" (정이철).

나는 늘 이렇게 말했는데, 능동적 순종을 주장하는 목사들과 교수들을 전혀 공개적으로 변론에 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서 헌의안을 어쩌고 ... 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준수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무 연관이 없는 일이다. 율법준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후, 하나님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더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신 7:12,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3).

이제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공약을 추가하고자 한다.

“구원 받기 전에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다가 구원에 이른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서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그러면 그 동안 비판받았던 사람들에게 사죄의 차원에서 큰 절을 올리는 사진을 찍어 바른믿음에 올리겠다!” (정이철).

내가 이 정도로 말하면, 당연히 율법을 지키면 영생의 자격이 생긴다고 가르치는 성경의 말씀과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그리하여 자신과 우리의 영생의 자격을 얻으시고 전가했다고 말하는 성경의 말씀을 찾아서 공개적으로 변론해야 자랑스러운 합동의 목사이고 교수이다.

그런데 기껏 “정이철 목사가 우리 교단이 채택한 신앙고백을 이단이라고 한다! 우리와 교단이 이단인지 정이철 목사가 이단인지 가려달라고 헌의를 올리자!” ... 이런 궁리를 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리고 말을 바르게 하기 바란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이단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 속의 99%의 내용이 귀하고 복된 영혼의 보고라고 늘 공개적으로 말해왔다. 단지 7, 19장에 나오는 행위언약 개념이 비성경적이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주장이다. 비겁하게 “정이철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이단이라고 한다!”라고 과장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태를 바르게 파악하시면 좋겠다.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교단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총회에서 결의하였다는 사실을 우습게 보지 않아야 한다. 서로 헌의를 올려 한쪽이 죽기를 바라는 게임에 돌입하면, 과연 누가 치명타를 입을 것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전체를 이단시한 적이 없다. 다만 7, 19장의 행위언약이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정말 나쁜 내용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나의 일관적인 주장이다.

이단사상이라고 표현하지 말고 비성경적이라고 표현하라는 조언을 자주 들었으나, 행위언약 이론이 너무도 심각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므로 나도 모르게 그런 표현을 쓰게 된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단사상’이라는 말이나 ‘비성경적’이라는 말은 비슷한 것이다. 비성경적이라고 하면 그 심각성이 달라지는 것인가?

웨신서에 기술되어 있는 행위언약 개념은 다음과 같은 면에서 성경과 기독교와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한다고 수 없이 말했다. 다시 한번 요약하고자 한다.

(1) 인간에게 죽음이 죄의 결과로 도래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그러나 행위언약을 아담이 범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오래살지 못하고 머지않아 죽을 사람이었다고 설정하고 있다. 이것으로 인해 초래되는 기독교 신앙 전체 구도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행위언약 이론은 머지 않아 죽을 아담이 영생을 얻기 위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라고 하나님이 요구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의 죄가 발생하고 난 후에 율법이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죄악을 규정하여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한다. 행위언약이 말하는 율법 이론은 성경과 맞지 않다.

(3) 행위언약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아담이 생명나무를 삶아 먹음으로 그의 몸이 죽지 않고 타락하지 않을 하늘의 몸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담이 율법을 잘 지켰으면, 하나님이 그 공로에 근거하여 생명나무를 삶아 먹을 자격을 부여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아담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이빨로 씹어서 먹음으로 영생을 얻었어야 한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나무를 역시 이빨로 씹어 먹음으로 영생을 누리는 것인가?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9).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율법준수 잘한 아담에게 식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영생과 모든 은혜 안에서 아담을 자식으로 창조하셨고,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를 유지하자는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그 언약의 담보물로서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에덴동산에서 제시되었던 것으로 해석해야 옳다는 것이 나의 끊임 없는 주장이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했으므로 하나님과의 언약의 담보물이었던 생명나무의 기능과 의미는 상실되었다. 그러나 아담은 뒤늦게 자기 범죄를 후회하고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생명나무로 나아가려고 했다. 하나님은 아담이 무의미한 난동을 부리지 못하도록 아담이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는 칼빈의 해석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행위언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범죄한 아담이 생명나무를 이빨로 씹어서 먹으면, 죄인으로 영생할 것이므로 하나님이 막았다고 한다. 얼마나 유치한 발상인가?

요한계시록이 천국에 생명나무가 세워진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담의 언약 파기의 범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해소하시고, 자기의 피로 파기된 아담과의 언약을 다시 복구하는 새 언약을 성사시키셨음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 31:31).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4) 행위언약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이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은 이유를 십계명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담이 지키지 못한 생명 주는 율법이 훗날 시내산에서 모세의 돌판에 기록되어 이승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고 웨신서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행위 언약으로서 한 법을 주셔서 그것에 의해 그와 그의 모든 후손들을 인격적인, 완전한, 정확한, 그리고 영속적인(영구적인) 순종의 의무 아래 두셨고; 그것의 실행에 근거한 생명을 약속하셨으며, 그것의 위반에 근거하여 죽음을 경고하셨고; 그것을 지킬 힘과 재능을 그에게 부여하셨다. 이 법은 그의 타락 후에도 계속 의(義)의 완전한 규칙이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에 의해 십계명에 그렇게 선언되었으며 두 돌판들에 기록되었는데; 처음 네 계명들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그리고 그 나머지 여섯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담고 있다” (WCF 19:1,2).

그러나 십계명 속의 모든 내용들은 이미 범죄하여 타락한 죄인들에게 주어진 율법들이다. 인격이 죄에 지배되고 있는 죄인들에게 죄를 대적하라고 주어진 것이 십계명 목적이다.

아담도 그 내용을 지켜서 영생을 얻어야 했는데. 아담이 그리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담 역시 죄에 지배되고 인격의 소유자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십계명 속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의 그 죄성은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 하나님이 아담을 죄인으로 창조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웨신서의 행위언약의 심각한 내용이다. 너무 심각하여 이단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었는데, 더 아름답고 실감나고 좋은 표현이 있는가?

(5) 웨신서의 행위언약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영원하게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아담이 영원하게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얼 수 있었면, 대체 영생을 얻는 시점은 어디인가?

웨신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한 율법의 노예로 창조했다고 왜곡하고 있다. 이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어떤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까? ‘비성경적’, ‘이단사상’ ... 우리 각자가 선택하도록 하자.

이와 같은 논쟁거리들이 너무도 많으므로 공개적으로 변론한다면 다른 독자들이 배울 것이 넘칠 것이다. 공개적으로 변론함으로 함께 배우고 토론하려고 하지 않고 교단 프레임을 등에 업으려고 "헌의안을 ..." 하는 궁리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고 유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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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