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새 언약은 유업(히 9:15) 그리고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첫 언약(히 9:1)은 불가능한 '유업' 그리고 불가능한 '의'(갈2:21)와 관계가 있습니다. 새 언약과 첫 언약은 물론 공통점도 있습니다. 새 언약(히 9:16)도 첫 언약(히9:18)도 유업과 죽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기의 차이점은 새 언약은 그림자가 아닌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가 있고 첫 언약은 그림자(히1 0:1)이며 '속죄의 방식' 제시입니다.

새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만을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의 삶의 방식으로 주신 '새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게 인도하십니다. 성화의 과정속에서 말입니다. '새 계명'과 '옛 계명'의 차이점(요일 2:8, 요일 3:23~24 새번역)은 옛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레 19:18)이고 '새 계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도록 사랑하는 것' (요일 3:16)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누리고 있는 믿음 안에서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을 좇아 행하면, 율법을(갈 5:14) 뛰어넘는 순종을(갈 5:16) 하게 될 것입니다. 첫 언약과 새 언약, 그리고 옛 계명과 새 계명은 확실히 그 범위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율법을 넘어서는' 온전하고도 완전한 순종입니다.

성경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요 3:16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두 부분으로 요약됩니다. 한 부분은 복음의 핵심인 요3:16 말씀입니다. 또 한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 (행26:20)'입니다. 바로 하나님 백성의 삶의 방식을(요일 2:8) 사는(요 13:34, 요일 3:23~24)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누리고 있는 믿음 안에서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을 좇아 행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림자를(히 10:1) 지키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일 3:23 새번역).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됩니다. 정이철 목사님께서 이 댓글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답변>
(부족하지만 마침 지난 주에 그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행복을 누리는 길은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인데, 율법 준수나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적용하여 주시는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지난 주 설교의 일부 내용으로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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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설교의 두 번째 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회복시켜주시려고 믿음과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로 모든 행복을 잃어버리고 불쌍한 인생으로 전락하자 즉시 은혜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벌고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한 짐승을 죽이시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 그때 피 흘리고 죽은 짐승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느냐에 대해 성경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는데, 하나님이 행복을 다 잃어버리고 불쌍해진 아담에게 은혜의 손길을 보내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씀도 아담을 유혹한 사탄에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아담이 교만해지고 범죄하도록 유혹한 사탄을 벌하고 물리치는 방식으로 아담에게 행복을 되찾아주는 구원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뱀의 머리를 밟아서 죽이는 여자의 후손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아담에게 행복을 되찾아주시기 위한 일을 서서히 진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구약의 성도들에게 행복을 누리게 해 주는 두 가진 방법이 정해졌습니다. 하나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율법이었습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는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 번 설명한 것처럼,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같은 분입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자기 백성들의 죗값을 대신 갚으실 작정 안에서 자기를 믿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죄용서를 주셨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율법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죄용서 받고 구원을 얻는 일에 율법이 관여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구원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서 복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더 얻게 하려고 일했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합니다. 구약 성도들에게 율법이 주어진 목적을 다르게 말하면,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아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어 구원을 얻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 완전히 잘못 배웠거나 바른 가르침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구원을 얻게하는 일과는 무관했다는 사실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고 강조하는 한국의 목사들이나 교수들을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딱 한 사람의 교수를 보았습니다. 목사들 가운데서는 거의 보지를 못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구원을 얻는 것과 율법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훗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그 백성의 죗값을 친히 갚으실 작정 안에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일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바르게 자신있게 강조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들과 교수들을 저는 거의 보지를 못했습니다. 정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 대신에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 대신에 그리스도 율법을 대신 완전하게 지키신 공덕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이상한 교리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공약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 조항들을 지키신 공덕으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면, 율법을 지키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이 관련되어야 한다. 그것의 증거를 찾아주면 종로 낙원 떡집에서 떡 사주겠다” (정이철).

“구원 받기 전에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따라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다가 구원에 이른 사람이 기독교 역사에서 한 명이라도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 그러면 그 동안 비판받았던 사람들에게 사죄의 차원에서 큰 절을 올리는 사진을 찍어 바른믿음에 올리겠다!” (정이철).

“만일 율법을 지키는 것과 구원 얻는 것이 눈꼽만큼이라도 상관있으면 목사 안수를 반납하겠다!” (정이철).

구원을 얻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동시에 행복을 누리고 살기 위해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요구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율법을 지키게 하셨다는 말과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 위해 율법을 지키게 하셨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이렇게 말해지는 것이고 저 각도에서 보면 저렇게 말해지는 것입니다.

설교의 세 번째 대지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죄용서와 구원을 얻고 참된 행복을 누리고 사는 길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안에서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켜서 행복을 얻으라는 하나님의 뜻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 행복을 누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나라를 잃고 외국에 노예로 끌려감으로 사람이 스스로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게 살 수 있는 비책을 마련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11:19,20).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과 인격을 고쳐서 율법이 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시어 죄를 범한 자기 백성들의 죗값을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처음부터 죄가 없는 것처럼 만들어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대신 죽으심을 믿어 죄용서 받은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우리에게 부으시어 죄악된 마음을 고쳐서 하나님 백성답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성자 하나님이 죄로 죽은 자기 백성들의 죗값을 대신 갚으라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죗값을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셨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말하실 때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제거하기 위해 흘리신 피의 능력과 권세를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발라주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사람에게서 이전과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사람에게서 하나님 백성 다운 거룩한 삶이 나타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성도에게 진정한 행복을 선물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 구약의 성도 다윗의 노래가 바로 그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권세를 적용하시는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유대교로부터 그렇게 핍박을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전하지 말라고 그렇게 협박을 받았어도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진심으로 행복하니까 하나님을 찬미한 것이 아닙니까? 속으로 괴롭고 지져우면 하나님을 찬미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행복을 주시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금욕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명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았을 뿐이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겼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니 그들의 삶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행복을 넘치도록 더 하여 주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사는 성도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구약의 성도들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 지키라고 명령하신 율법이 그들의 삶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롬 8:4).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결국 율법이 가르치는 것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복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 우리는 모두 원래 죄와 사망의 법에 포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세를 적용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니,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롬 8:4). 옛날에는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했으나 불가능했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죄와 사망의 법에 포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피의 권세를 적용하는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기를 시작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삶은 이미 구약의 모든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진실된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영원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하기시를 원하십니까? 믿음과 성령의 인도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넘치게 될까요? 그냥 많이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이상한 신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도한다고 성령이 무조건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아는 사람이 기도해야 성령이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령의 목표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되게 만드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 14:26).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주신 말씀 안에서 살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에게 그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배우지 않고 말씀을 공부하지 않으면 금식기도 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이단들은 공통적으로 그냥 금식기도하고 말씀과 무관하게 기도하다가 사탄에게 붙들린 이단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행복한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뚜렸한 특징은 말씀입니다. 사도들에게서 말씀을 듣고 나가서 그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율법주의를 한 번도 하지 않았으나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복과 행복을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행복을 누리기 원하시는 분들은 믿음과 성령에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붙이면 말씀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함부로 많이 기도하지 마시고, 또 아무데나 기도받으러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신이 붙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믿음과 성령과 말씀으로 달려가서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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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