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머레이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로 핫지와 워필드의 전통을 이어 받은 학자로 불린다. 존 머레이가 웨민의 신학 교수로 부임한 후 메이첸과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에 대한 논쟁을 할 때, 존 머레이는 예수님의 순종을 능동, 수동으로 나누면 안 된다고 하였다. 존 머레이는 예수님의 순종의 모든 결과는 결국 십자가의 구속을 향한 순종으로 나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순종을 기계적으로 나눌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존 머레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행위에 의해 사람을 창조하고 언약을 제정하였다고 해석하는데 이것을 경륜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경륜에 의해 행위언약이라고 하는 용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먼저 경륜 속에 내포된 은총의 요소가 “행위”라는 용어에 의해 적절히 표현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행위”라고 하는 단어는 알맞지 않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경륜은 성경에서 언약으로 지칭되지 않기 때문에 합당한 용어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존 머레이는 행위언약에 대한 용어를 호세아 6:7절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이라고 하는 것을 에덴동산에서 맺은 언약이라고 하는 해석을 용인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하여 칼빈도 아담과 맺은 언약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약속을 쉽게 배반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쉽게 배반하는 이스라엘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존 머레이는 하나님과 아담이 언약을 맺은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경륜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성경은 항상 구속 또는 구속의 계획과 밀접히 연관된 규정과 관련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경륜에 대해서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성경에서 언약은 맹세와 결부된 약속의 확정을 의미하며, 아담에 대한 경륜에 결여되어 있는 보증을 수반한다. 그 경륜이 언약으로 불리든 아니 불리든, 그 유일 무이성과 일회성은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옛 언약 또는 첫 언약이라 부르는 것과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참고, 렘 31:3134; 고후 3:14: 히 8:7,13).

첫 언약 또는 옛 언약은 시내산 언약이다. 지시 대상에 있어서의 이러한 혼동을 피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세 언약을 아담의 제도와 관련하여 해석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피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는 오직 순수의 상태, 대표하는 머리로서의 아담에게만 적용될 수 있었다.

모세 언약에는 소위 행위 언약의 반복이 있었다는 계약 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견해는 심각한 오해이며, 모세 언약의 잘못된 구성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담에 대한 경륜의 유일무이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모세 언약은 성격에 있어서 명확하게 구속적이었으며, 아브라함 언약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아담에 대한 경륜은 구속적 규정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 약속의 요소는 구속이 필연적으로 된 상황에서는 아무런 적절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 2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61).

우리는 존 머레이를 통해 회중파 청교도 신학의 오류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 즉 옛언약이 아담에게 새겨져 있다고 하는 자연법 사상이다. 이 자연법 사상은 아담의 창조 때부터 아담의 마음에 새겨진 법인데 이것이 바로 십계명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 이전에 이미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이 자연법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이 십계명을 다 지키신 것이고 아담에게 새겨진 자연법도 다 이루신 것이라고 하는 사상을 추론해 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 순종 교리를 만들어낸 기초적인 사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은 언약이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이었다고 하는 사상도 추론하여 도출하였다. 지금 존 머레이는 이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행위언약을 추론한 자들에게 있어 가장 큰 오류는 아담이 순종하여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하는 주장이었다. (회중파 청교도 이후 콕케이우스를 통해 이어지는 언약신학의 이탈이 결국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구원 받을 존재로 보는 사변적 추론인 것이다).

존 머레이는 개혁신학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언약신학의 오류에 있어서 모세언약 즉 시내산 언약을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의 연장선에서 계속 주장하는 것을 가장 큰 언약신학의 폐단으로 보고 있다. 결국 모세의 십계명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 의가, 생명이 주어진다고 하는 문자적인 해석으로 인한 폐단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순종하면 살리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축복의 삶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모든 율법의 조항에 순종하여 의를 획득하여 영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는 능동적 순종 교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존 머레이가 비판하는 내용처럼 아담이 구속적 규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구원 받을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결국 아담의 창조에 대한 존재를 죄를 짓고 구원 받을 존재로 창조하였다고 하는 가정을 추론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가르침은 완전히 다른 가르침을 우리에게 준다. 에덴 동산에 있었던 두 나무에 대한 것은 바로 성례론적인 외적 표징으로 두셨다고 한다. 성례론적인 상징이라고 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떡과 포도주 그 자체가 살과 피가 아닌 것처럼, 그러나 믿음으로 받는 자들에게 먹고 마실 때 진실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영생을 주지 않는 물질적인 것이 마치 믿음으로, 영적으로 분명하게 영생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성례론적인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덴에 있었던 두 나무는 선악과, 그리고 생명나무는 영원한 성례론적인 표징이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면 아담이 가변적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결과론적인 존재 이해 방식이다.

그러나 아담은 상징적인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영원히 사는 존재로 계속 사는 것이다.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정녕 죽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고 하는 존재 상태를 의미해 주는 말씀이다. 칼빈의 이러한 가르침이 아담의 상태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존 머레이는 이점을 강조한 것이다.

존 머레이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행위언약”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하였는데 그는 아무런 신학적 시비에 휘말리지 않았다.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런 비판적 고찰이 가능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함으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제는 칼빈의 가르침도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성경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그 신학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저 확증편향적인 자세로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마치 무오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자세들로 인해 오히려 소중한 웨민의 유산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아주 나쁜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하나만 주장하면 마치 전체를 잘못된 것으로 주장한다고 매도한다. 신학을 하기 이전에 인격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 (이 말은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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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