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7 13:46 (금)
그리스도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에 대한 통합적 관점 (최갑종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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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에 대한 통합적 관점 (최갑종 박사)
  • 바른믿음
  • 승인 2022.12.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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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종 박사께서 최근 한국 장로교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에 대해 자신이 이제 막 쓰신 논문을 바른믿음에 보내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행위언약의 타당성에 대한 공청회를 요청하는 성명에 동참하신 합동 목회자들이 꼭 읽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다음 기사에서 최갑종 박사의 논문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논평이 있을 예정이다. 다음을 크릭하면 논문 전체를 다운 받을 수 있다. 아래의 글은 정이철 목사가 최갑종 박사의 논문의 주요 내용을 발췌한 내용이다. 독자들은 가급적 전문을 다운받아 읽기 바란다 (정이철 목사).


성경은 그리스도의 순종(능동/수동)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1장: 그리스도의 능동-수동순종 논쟁, 무엇이 쟁점인가?

“지난 몇 년 사이에 한국 장로교단에서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과 수동의 양면적 순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수동적 순종 한 면만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 생애를 거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킴으로 율법 순종에 약속된 영생의 공로(의)를 획득한 능동적 순종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속죄를 완성한 수동적 순종으로 구분하고, 우리의 칭의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십자가 순종)의 의만이 아닌, 또한 능동적 순종(전 율법 순종)의 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루터와 캘빈 및 많은 정통 개혁신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1페이지).

“하지만 다른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전 생애를 통해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거룩한 삶을 사신 것은, 우리를 위해 의와 영생의 공로를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위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온전한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함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 흘리는 희생적 죽음의 순종을 통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죄 용서를 마련하시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가 다 마련되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완전한 율법 순종이 필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율법 순종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볼 경우,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상대화시키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봅니다” (2-3 페이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주창자들의 자세한 주장 내용을 다음의 자료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1) Youtube
김태일. “능동 순종주의자들의 가장 큰 문제.”
김인수. “그리스도의 순종(능동 순종 논쟁).”

2) 저서
정이철,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 서울: 다움, 2022)” (3-4 페이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율법 순종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동적 순종을 다 같이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동적 순종만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자체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완성으로 보아야 합니까?” (4페이지).

“이들이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은 그의 완전한 십자가 순종을 위한 예비적인 것일뿐, 우리의 의와 구원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자체가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우리의 죗값인 사망의 심판을 받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사건인 동시에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의 최고 강령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 성취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주창자든, 수동적 순종주창자든 다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그리스도의 최고의 능동적 순종인 동시에 최고의 수동적 순종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4-5 페이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주창자들은 창세기 2:17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의 명령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다음 말씀한 레위기 18:5의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명령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7:2가 말하는 일종의 행위언약으로써, 그 명령에 순종할 경우, 영생이, 반면에 불순종할 경우 저주와 죽음의 심판이 약속되어 있다고 봅니다” (5페이지).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의 수동적 순종주창자들은 창세기 2:17이든, 레위기 18:5든 율법은 처음부터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졌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울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2의 행위언약은 성경적 근거가 약하기 때문에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세우신 의와 구원의 길은 율법의 길이 아닌 복음의 길, 곧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하나의 길로 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과 대등하거나 독립된 것이 아니라, 언약에 약속된 축복을 은혜로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신분 유지에 합당한 도리일 뿐으로 봅니다. 이처럼 수동적 순종주창자들은 율법은 처음부터 이를 순종하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5 페이지).

“과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주창자들을 지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수동적 순종주창자들을 지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은 제 3의 입장을 말하고 있습니까?” (5 페이지).

“지난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신조 작성 기간 중에 참여한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순종해석과 관련하여 서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서로 의견을 달리한 상대방을 적대시하거나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고 형제자매로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순종과 관련하여 자신이 어떠한 입장을 택하거나 지지를 하든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상대방을 향해 결코 이단으로 정죄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6 페이지).
 

2장: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롬 3:21-26절에 대한 설명 ...) 이 결론적 구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인류가 처한 비참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을 강조합니다. 즉 율법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의를 줄 수 있는 수단이 아니고, 오히려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3:21 이하의 문단에서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이란 말과 함께 인간의 불순종과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율법과 무관하게 마련된 하나님의 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문구는 주제 구절인 1:17의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와 로마서의 결언 구절인 16:25-26의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8 페이지).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 1:2-4에서 하나님의 의를 동반하는 복음(1:17)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포함하여,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전 사역을 복음으로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가져오는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이 아니라,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성육, 세례받음, 마귀로부터의 시험, 제자 선택과 교육, 치유사건과 이적, 죄용서와 하나님의 나라 도래 선포와 설교, 율법 순종과 성취, 성전청결, 마지막 만찬, 제자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 주심, 게셋마네 동산의 기도, 수난과 배척,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등이 모두 복음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배척은 십자가 사건에서 비로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성육에서 시작되어 계속 수행되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빌 2:6-9)” (8 페이지).

“그리스도는 십자가 사건에서 비로소 우리의 구원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출생 때부터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자였고(마 1:23),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었습니다 (요 1:29). 그리스도는 십자가 사건에서 비로소 죄 용서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이미 공생애 기간에 죄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막 2:5). 그는 십자가 사건에서 비로소 사탄의 권세를 정복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마귀의 시험을 물리침으로,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냄으로,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선언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 사건에서 비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이 아니라, 이미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마 3:15).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사역의 최고 절정과 완성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의와 구원을 가져오는 복음은 십자가 사건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사역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삶과 십자가의 삶을 분리하거나(능동 순종 주장),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 사역을 지나치게 십자가 사건에만 집중하는 것(수동 순종 주장)은 다 같이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8 페이지).

“3:21-26을 떠나면서 최근의 그리스도 순종 논쟁과 관련해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자체가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양면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의도 이 양면의 순종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3:21-26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나타내신 하나의 의인 하나님의 의를 강조할 뿐, 소위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건과 별도로 그 자신의 율법 순종을 통하여 획득한다고 하는 영생의 의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15 페이지).

“(로마서 5:17-19절 설명하면서) 이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관점만이 아닌, 또한 능동적 순종 관점에서도 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말하자면 그가 로마서 서언에서 하나의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한 것처럼, 하나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 양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5:17-19에서 아담의 능동적 불순종 및 그 결과와 대조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 결과를 통해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15 페이지).

“어쨌든 분명한 것은 바울이 5:17-19의 문단에서 아담의 능동적인 불순종인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 금지 명령을 어긴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십자가의 순종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생애를 둘로 구분하여, 십자가 이전의 삶을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으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수동적 순종인 것처럼 도식화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17 페이지).
 

3장: 율법의 용도와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순종)

“그렇다면 타락 전 아담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인 아담을 이미 그의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에, 아담은 이미 죽음이 없는 영생을 축복을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충만한 영생은 하나님의 정한 시간에 따라 미래에 주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미래에 주어질 충만한 영생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는 것이지, 아담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21 페이지).

“이처럼 레위기 18:5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마땅히 준수하여야 하는 언약 백성의 삶의 문맥에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여기 동사 “살리라”는 문구가, 그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었든, 본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 준수를 통해 기대하는 미래의 종말론적인 의와 영생을 가리키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누리게 될 현 세상에서의 언약적 삶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본문인 레위기 25:8의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와 신명기 4:40의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그리고 신명기 30:16의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가 모두 이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22-23 페이지).

“따라서 레위기 18:5의 “살리라”는 본래 문맥에서 볼 때, 종말론적인 의와 영생의 삶이 아닌 약속된 가나안 땅에서의 언약적인 복된 삶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23 페이지).

“만일 우리가 갈라디아서 3:12의 레위기 18:5 인용을, 3:11의 하박국 2:4의 인용인 믿음을 통한 의의 길과 나란히 세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의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볼 경우,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바울의 논지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은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의와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갈 1:6; 5:4; 참조, 행 15:1). 하지만 바울은 이들의 주장을 거짓 복음으로 단정하면서(갈 1:7), 의와 구원은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갈 2:16; 3:1-9)” (25-26 페이지).

“그리고 “그러므로 이제”라는 말은 3:21의 “그러나 이제는”의 경우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과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 하는 새로운 의와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종말론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자들(6:1-11)에게는 더는 정죄함이 없는 선언이 이미 적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완성됨을 시사합니다(8:18-30)” (27 페이지).

“바울은 의와 구원의 원리를 말할 때 율법이 결코 인간을 구원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과 관련하여, 율법을 ‘의’, ‘믿음’, 혹은 ‘성령’ 등과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결코 율법의 무용론이나 폐기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3:31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에게는 율법 무용론이나 폐기론이 아닌 오히려 율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바울은 로마서 13:10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고 하면서 새 시대에서도 율법은 사랑의 법으로서 성도들에게 여전히 유효함을 말합니다” (27 페이지).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없이 옛 시대의 세력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기 때문에, 이제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더는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닙니다” (28 페이지).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언제, 어떻게 율법을 성취하여 “죄와 사망의 법”을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게 하였을까요?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가 그의 십자가 이전의 율법 순종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아니면 십자가 사건에서의 순종을 지칭하고 있을까요?” (28 페이지)

“바울은 먼저 8:3b의 분사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고 죄를 위하여 보냈다”고 하면서, 3:21-26에서 말한 하나님의 능동성을 재차 강조합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라는 것은 자기 아들을 범죄 전의 아담의 모양이 아닌, 범죄 한 이후의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을 대신할 수 있도록 죄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육을 가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보냈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4에서 이를 가리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7-8에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합니다” (28 페이지).

“히브리서 저자 역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다”(히 4:15)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인 우리를 대신할 수 있게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예수님도 우리처럼 죄를 지을 수 있는 육을 가진 자였지만, 다만 그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죄인의 모양이 아닌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왔거나, 설사 우리와 같은 자였지만 우리처럼 죄를 지었다면, 그는 우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대신하는 죽음과 부활이 될수 없었을 것입니다” (28 페이지).

“그다음에 나오는 8:3c의 “죄를 위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것이, 3:24-25에서처럼, 그를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고 우리의 죄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속죄 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절에 있는 “하나님이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했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 목적을 보여줍니다. 곧 죄인을 대신 할 수 있는 육을 가진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삼아 그에게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쏟았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 우리가 지키지 못했던 율법의 모든 요구(4절)를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28-29 페이지).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대신할 수 있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에 쏟으실 심판을 쏟으심으로 죄의 세력을 무력화하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그의 희생적 순종을 통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어 우리를 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는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29 페이지).

“8:4의 목적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을 가진 우리의 모양으로 보내어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신 목적이, 우리가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 의해 이미 성취가 된 그 율법(8:3)의 요구가 계속 성취되도록 하기 위함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9 페이지).

“그렇다면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말하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먼저 바울이 여기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그것도 바울은 ‘성취하다’의 단어를 능동태가 아닌 가정법 단순 과거 수동태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수동태 동사가 사용된 것은 율법 요구의 성취가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성취하다’의 동사가 사용된 것은, 3절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곧 우리의 육신으로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율법의 모든 요구가 성취되도록 한 것을 시사합니다” (31 페이지).

“그리고 가정법이 사용된 것은, 갈라디아서 6:2의 경우처럼,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을 시사합니다” (30 페이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율법의 완전한 성취는 그를 믿는 신자들을 통해 재현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서 이루시는 주된 사역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취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현하는 것입니다(롬 5:5). 예수님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신 고별설교에서, 한편으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서로 사랑하라]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라고 하시면서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 것도(요 13:34),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2에서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서로 사랑하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사랑의 새 계명]을 성취하라”고 하신 말씀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30-31 페이지).

“이처럼 우리가 로마서 8:1-4에 있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과 율법의 완전한 성취(순종)를 결코 구분하거나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에서 우리를 위한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완전한 율법 성취가 이루어졌습니다. 즉 십자가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수동적 순종과 완전한 능동적 순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31페이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완전한 율법 순종을 구분 내지 분리하거나,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율법 순종으로부터 십자가 사건을 구분 내지 분리하는 것은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 사역을 사실상 그의 수동적 순종인 동시에 능동적 순종으로 볼 수있다고 한다면, 그의 전 사역의 최고 절정이요 완성인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31 페이지).


강의를 마치면서

“강의에서 제시한 우리의 성경해석이 옳다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주장이든, 수동적 순종의 주장이든 똑같이 장점과 동시에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주장의 장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난 하나의 의 만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은 점과 그리스도의 율법 순종이 그의 십자가 순종이 가져오는 의와 대등한 또 하나의 의와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주장의 약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지나치게 집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통한 순종 역시 복음으로서 우리의 의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점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사역인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성취하였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점입니다” (31 페이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주장의 장점은 우리의 의와 구원의 근거를 그리스도 십자가의 순종에만 제한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전 생애로 확대하고 있는 점입니다. 즉 복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선포로 제한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전 생애의 선포로 확대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주장의 약점은, 창세기 2:17과 레위기 18:5이 율법 순종에 대한 순종에 영생의 약속을 보증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오는 의를 그의 율법 순종을 통한 의와 십자가 순종을 통한 의로 양분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약화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성경의 뒷받침이 없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인 율법 순종 없이 십자가의 순종만으로는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단지 죄 용서를 통한 타락 전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게 할 뿐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있는 점입니다” (31 페이지).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에서 연구했다. 현재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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