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3 22:59 (목)
필라델피아 웨신 세미나리의 할아버지라도 다른 구원론 주장하면 거짓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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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웨신 세미나리의 할아버지라도 다른 구원론 주장하면 거짓 신학
  • 정이철
  • 승인 2023.01.31 01:54
  •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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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인물은 본 기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본 기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질문>
성경을 다 찾아보았으나 그리스도가 스스로 모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신 모습이 없고, 특히 자기와 우리의 영생을 위해 모세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계셨다는 흔적을 더욱 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한국에서 총신 같은 학교를 나오지 않고, 일반대학을 나온 후 유학가서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나오셨습니다. 그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크신 것 같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세미나리의 신학 전통이고, 절대로 의심하면 안된다고 하십니다.

정이철 목사님이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웨스트민트서 신앙고백 속의 그 행위언약 이론이 무너지면 기독교 전체가 무너진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속의 행위언약 이론을 부정하면 전체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셨습니다. 정이철 목사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답변>
저는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이후 ‘필라 웨신’)에 의해 개신교가 유지되었고, 특히 장로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필라 웨신을 나온 분들이 총신에서는 제일 실력있는 교수님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 학교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때 토플 점수가 그 학교가 요구하는 만큼 미치지 못해 다른 학교를 선택했었습니다.

이제는 그 학교에 대한 저의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학교 이름 자체가 개신교에 부담이 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웨신서)의 명칭을 그대로 학교 이름으로 정했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웨신서 속의 모든 내용을 절대적 진리로 신봉하는 학교임을 천명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듭니다. 실제로 학교 이름을 그렇게 정했는데, 그 학교의 누가 웨신서 속의 어떤 내용의 문제점에 대해 앞장서 고민해 보려는 자세를 가지겠습니까?

웨신서가 가르치는 행위언약에 의하면, 태초의 아담에게는 영생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위하여 창조되었을 뿐입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믿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성경적 신앙의 기초들이 다 흔들리게 됩니다.

1) 하나님은 구원 얻을 자격을 만드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변합니다. 사람이 노력하여 구원을 얻는 행위구원론, 성화구원론이 하나님의 성품과 맞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2) 아담의 원죄는 영생을 얻도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가이드를 잘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변합니다. 아담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잘되라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내용들을 따르지 않은 것이 원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을 저주하신 것도 이상해집니다. 단지 영생을 주기 위한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아담을 영원히 저주하신 분이라면, 하나님의 성품이 너무 이상해집니다. 

3) 하나님이 저주받은 아담을 위해 사람이 되시어 대신 죽으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됩니다. 아담이 자기 백성도 아니었고 자신을 섬기도록 영생과 모든 은혜 안에서 창조하신 것도 아닌데, 왜 죽은 아담을 살리려고 사람이 되십니까? 자기 노력으로 영생 획득에 실패했다고 저주하시고, 왜 그 아담을 살려 다시 백성삼겠다고 성육신하시어 대신 죽으십니까? 차라리 다시 흙으로 다른 아담을 만드시고 또 율법지켜서 영생을 얻으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4) 웨신서의 행위언약에 의하면, 아담에게 영생을 주는 율법이 나중에 십계명으로 명문화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십계명의 내용을 보면,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의 죄성을 억제하는 것들입니다. 아담도 타락한 사람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죄를 억제하는 율법들을 주셨던 것일까요?

5) 성경은 하나님 백성이 범죄하여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과 복을 되찾아 누리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대신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웨신서의 행위언약에 의하면, 아담이 가져보지 못한 것, 즉 아담이 단 하루도 누려보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과 ‘영원한 생명’을 새로이 만들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성육시하여 대신 죽으신 것이 됩니다.

성경은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이 죄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다시 회복하시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담이 단 하루도 누려보지 못한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역사가 아니라, 아담이 가졌으나 범죄하여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시는 역사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 21:3).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 백성이 죽고 사라진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만드셨고, 그들 가운데 성막(성전)을 통해 거주하셨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성도들 속에 거주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리스도의 피로 생산된 셀 수 없이 많은 자기들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는 나라를 완성하심으로 역사가 끝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처음에 아담에게 은혜로 주어졌으나, 아담이 범죄하여 잃어버린 것(영생, 하나님 백성의 신분)을 그리스도의 속죄로 되찾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역사관입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2)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9).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지 않으면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영원한 생명이 영구하게 보장될 것임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생명나무를 삶거나, 굽거나, 갈아서 마심으로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 백성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니 생명나무의 의미는 상실되었습니다. 뒤늦게 범죄를 후회한 아담이 생명나무를 붙잡기 위해 달려가자, 하나님은 아담의 무의미한 난동을 막고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창 3:24).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어 아담의 죗값을 완전하게 지불하심으로 생명나무의 의미를 복원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아담의 반역한 죄가 속하여 짐으로 생명나무의 의미는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책은 역사의 끝에서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생명나무가 다시 하나님 백성들 속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필라 웨신이 이 진리를 거부하면 그 만큼 기독교 정통에서 벗어나는 학교인 것입니다. 태초의 아담이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고, 영원한 생명도 없는 상태였다고 주장하는 신학을 고집하면 절대로 구원을 주는 올바른 신앙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런 사상을 가졌을 때,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저주에 걸리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여 행위언약을 완성한 구세주라는 능동적 순종 교리입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 즉 능동적 순종의 근거가 되는 내용들이 전혀 없습니다.

1) 율법이 영생의 자격을 만들어 주기 위해 왔다는 가르침

2) 영생 얻으려는 자는 먼저 율법으로 자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

3) 그리스도가 영생의 자격을 얻고자 율법 지키는 자로 오신다는 구약의 예언

4) 영생의 자격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켰다는 신약의 말씀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의'가 되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죗값을 갚으라는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순종하시는 (고난받으시는) 여호와의 종으로 오신다는 예언만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4-6).

신약 성경도 구약의 예언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으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웨신서의 행위언약과 그것에 맞게 그리스도를 조작한 능동적 순종은 결코 정당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고난 받아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초기 필라 웨신의 교수였던 존 머레이도 칼빈과 똑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했습니다. 필라 웨신의 교수였던 머레이의 말을 보시기 바랍니다.
 

존 머리이와 존 칼빈(우)
존 머레이와 존 칼빈(우)

“개혁파 신학의 대부였던 존 칼빈의 통찰력은 이런 맥락에서 상기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를 없애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없애며, 의를 얻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은혜와 친절을 품으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데 곧 그의 순종 생활 전체에 의하여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기독교강요, 2.16.5)’. 그리고 우리는 그 후 개혁파 신학에서 속죄의 교리를 신조화 할 때, 그리스도의 농동적이면 수동적인 순종의 강조를 상기할 필요는 없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 2 (박문제 역), 163).

같은 빵공장에서 나온 빵들도 맛이 모두 일치하지 않습니다. 필라 웨신의 교수들이라고 해서 전부 비성경적인 칭의 신학을 신봉한 것이 아닙니다. 필라 웨신 속에도 올바른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죽을 때 성경의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소망으로 삼지 않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주는 이상한 위로를 붙들었던 메이첸 같은 교수도 있었습니다.
 

“그레스햄 메이첸이 죽으면서 자기의 동료 젊은 교수에게 전했다는 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가 없이는 우리는 소망이 없죠!’ ... 그 죽음의 침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가 없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라고 이야기한 이 신약학자의 말을 우리는 정말 중요하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승구 교수)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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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 2023-02-03 22:49:57
옳은믿음님의 입장은 여전히 확률에 의해 이러해 보인다 이것이군요.비평을 하기에는 최적화된 포지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장난의 기본자세라고 봅니다.
바른믿음 독자분들께서는 18절과 19절 주석이 함께 올려져 있는 이유를 찾으시겠죠.


정목사님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신 일에 대한 의견을 누구는 율범순종을 넘는 범주의 순종에 대한 의견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누구는 율법을 어기신 일에 대한 의견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의인지 '참사람으로서'의 의인지에 대한 의견 유도 역시 같은 맥락으로 봅니다. 본질찾기가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멈춥니다.

오직 성경 2023-02-03 13:57:30
그러십니까.
다른 바른믿음 독자분들의 반응이 궁금하여 옳은 믿음님이 논증하시는 글을 바른믿음에 기고하실 것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문맥을 보니 그것은 절대 안하실 것 같습니다.
"획득한 자질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셨는데 본인도 모르겠다며 결국 확률버티기를 시전하시는군요.
과거 독자 '바울OO'이 논증방식을 들고 부활한 것 같습니다. 본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로 "그 의가" 아직 전가 될 수 없는 상태에서 순종을 통해 전가 될 수 있게 만드셨다고, 그리고 닭(의)이 알(순종)을 낳는 것이지 알이 닭이 되는 문맥이 아니라고 문맥을 보는 것도 이미 언급했습니다.
말장난은 의미가 없습니다.
칼빈이 전한 바울의 말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의로우시며 죄인은 이미 의가 없습니다. 여기 댓글에서만 해도 정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준수하셔서 영생의 자격을 갖게하는 '의'를 추가로 획득하신다는 사변을 부인합니다. 언급했듯이 죄인은 이미 의가 없습니다.
저도 이 견해에 명백하게 동의합니다.
설마 정목사님의 주장이 율법의 수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기셨다는 논지의 주장을 하시고 있다는 의견은 아니겠지요?
결국 돌아서 돌아서 말장난을 하는 포지션을 잡으셨군요.

오직 성경 2023-02-03 07:37:06
바른믿음 독자분들이 쉽게 보실 수 있도록 성서원에서 출판된 주석을 가져왔습니다. 25년 전 출판물입니다. 능동적 순종을 가르치는 시기입니다. (로마서 주석. 존 칼빈. 성서원. 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 편역. 1998.)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의와 그 의의 성격을 순종이라고 바울이 설명하고 있다는 칼빈의 말은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속성으로 존재하는 의를 가리키고 있으며 이를 설명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림으로 해서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셨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는 칼빈 말의 내용인 것입니다. 분명 바울이 말한 순종을 특성으로 받는 의는 그분의 속성으로 존재하는 의입니다.
여전히 알- 닭- 알과 같은 복잡한 과정이 아니라 칼빈의 말이 쉽다고 생각합니다. 앞뒤로 연결하는 문맥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 속해 있는 것이 새롭게 획득한 의라고 볼 수 있지 않으냐고 말씀하시는데, 이 문맥이 그내용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본래 가지신 의로 그 의의 특성대로 온전한 순종을 통해 그분께서 가지고 계신 본래의 의를 "믿는 자에게 전가하실 수 있게" 만드셨다는 자연스런 의미의 내용이지 않습니까.
문맥을 뒤집고 싶으신 심정은 이해합니다.


조금 다른 얘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 율법은 그 정신까지 지켜졌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말은 적어도 여기까지는 유효합니다. 본래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도 유효합니다.
2023년도 지금의 논쟁 초점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완전함이 그리스도께서 율법만 순종하셨느냐, 율법 순종 범주를 넘어서는 순종을 하셨느냐 입니다.
논쟁의 쟁점이 여기입니다. 개념파괴냐 개념이 살아남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오직 성경 2023-02-03 07:36:12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말미암아.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가 이렇게 유효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의롭다 하시는 것(칭의)이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상기시키시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남 몰래 혼자서만 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의는 그 범위가 광범위하였는데, 이는 자신에게 부여된 은사를 가지고 신자들을 그가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에게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p.179) 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제공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방금 사용한 두 단어인, ‘심판’과 ‘은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또한 반복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죄가 많은 사람들을 정죄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의롭다 하는데 유효하다”. 나의 판단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justification of life)는 말씀은 사면을 뜻한다. 이 사면은 우리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준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대하여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시는 데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용납되는 것은 우리가 의로울 때에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것의 기원을 의롭다 하심(칭의)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의 의인이 되리라(19).
19절.

본문의 이 말씀은 같은 말을 쓸테 없이 반복한 것이 아니고, 앞 구절에 대한 꼭 필요한 설명이다. 바울은 앞에서 우리가 정죄를 받았다고 말했으나, 어떤 사람이든 무죄하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정죄받는 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어했다. 그가 뒤이어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진술한 경우,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림으로 해서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셨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의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 속해 있는 것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순종이라고 일컬음으로써 그것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 존전에 무엇을 가져오도록 우리에게 요구되는가를 여기서 주목해야 한다. 부분적인 순종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순종인 율법에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일 의로운 사람이 타락할 것 같으면, 그의 이전의 의는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인간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목적으로 하나님께 억지로 갖다 내민 자기 본위의 계획들의 허위성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행하라고 하신 것을 오직(p.180) 우리가 준행할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행위의 의를 대담하게 주장하는 자들과는 교제하지 말라. 그런데 행위의 의는 율법을 온전히 완전하게 지킬때에만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란 아무래도 없음이 확실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행위-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를 배설물만도 못하게 여기신다-를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사람들은 정신 빠진 자들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이다.

정이철 2023-02-02 13:03:51
다른 사람들은 오도하는 내용의 글을 남기시면 지웁니다. 헛수고 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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