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라 (8장)

 

빌리 그래함 사역 후원 관련하여서 언급되었던 단체가, 프리메이슨 외에 가톨릭 교회, WCC 관계자들, 자유 현대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궁금하였던 사실은, 빌리 그래함의 개신교 복음 집회에 후원하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색깔을 확실히 낼 수 있는 자신들의 집회를 세워서 그것을 크게 성공시키고자 하지 않고, 왜 빌리 그래함 집회를 후원하기 원했고, 그를 통해서 그들에게 돌아간 이익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 빌리 그래함 목사 관련 사실들을 접하고 들게 된 생각이었다.

그러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가톨릭 교회, WCC, 그리고 자유 현대주의자들 차례대로 그들을 자세히 알기 위한 자료를 모아 보고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바른 관점을 가져 보기로 했다.
 

 

빌리 그래함 목사 관련 가톨릭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자 하면서 요즘 빌리 그래함 목사가 쓴 책들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쓴 책들을 읽었다. 너무 따뜻하고 착한 말들이었고 모든 것을 다 안고 감싸는 그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부분들이 참 흡사하였다. 착하고 선한 모습에 비평하고 비방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고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44).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종교는 선을 추구한다. 선행을 하고 착하게 살고, 그래서 지옥에 가지 말고 착한 사람들이 가는 하늘 나라 또는 극락에 가야 한다는 그런 모양에서 벗어나는 종교는 없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선을 이룸을 통해서 사후의 세계에서 복을 받겠다는 똑같은 목적과 방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종교 다원주의를 문제시하지만, 오히려 우리 자신이 다른 종교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놓고 있다. 열심히 교회 다니면서 교회에 충성하고 착하게 다른 사람 돕고 살다가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그래도 우리는 다른 종교와 다른 부분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으며 예수의 피를 믿기 때문에 다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지난 글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바로는, 프리메이슨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예수의 피를 선포하고, 예수의 이름을 외친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복음이 퍼지는 것을 막았던 가톨릭도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바를 믿지 않는다고 하는 부분이 없다.

내 마음에 신앙의 모습이 다른 종교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모양을 추구하면서, 우리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고집하고, 같은 모양의 종교끼리 하나가 되자는 것에 거부를 한다는 것은, 참 앞뒤가 맞지 않게 고집부리는 것밖에는 안 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뭐가 얼마나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되는 것이 불가능한지가 우리 마음에 더 확실히 자리잡을 때, 그렇게 귀한 가치를 위해서 우리를 다 내어 던지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우리 인간의 판단 기준은, 이것이 맞나 틀리나를 따지고, 이것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분별을 하려고 하고, 또 이것이 악한 것인가 선한 것인가를 가늠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선한 것으로 가늠된 그것을 열심히 행할 때, 그것은 선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이것이 생명이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을 하신다. 이것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인가, 아니면 죽게 하는 사망 권세의 역사인가를 따지신다. 우리의 판단 기준은 선악과의 판단 기준이며,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생명 나무의 판단 기준이시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선행을 쌓아서 선을 이루고 영생을 얻어 보려고 하지만, 선악과의 열매는 선한 열매이든 악한 열매이든 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b)라고 하신 말씀대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들에서 추구하는 선행을 통한 구원은, 선악과의 선한 열매를 가지고 영원한 생명 열매를 따려고 하는 부분에서 모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순적인 부분을 알면서 우리도 그것을 추구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여기인 것 같다.

선한 곳이 하나도 없는 우리가 선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죄인인 내가 착하게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 인간이 이룬 선행을 숭고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우리의 노력의 선행을 쌓아서 올려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이런 착각들은 하나님께 선악과의 열매를 드리면서 생명나무 열매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착각인 것이다.

오히려, 내가 선한 곳이 하나도 없어서 내 힘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는 것을 깨닫고, 죄인인 나는 착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간이 쌓은 선행은 자기의 공로로 쌓아지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선으로 쌓아지지 않는 것임을 깨닫고, 우리의 노력의 선행을 쌓는 것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a) 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선악과의 열매를 거부하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상한 심령으로 나의 무능함을 깨닫고,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을 때, 십자가의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의 힘이 아닌,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선행이 아닌, 주님이 역사하시는 선행들이 이루어진다.

십자가에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온전히 믿기만 하면, 나의 선악과의 열매가 아닌, 내 안의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항상 역사하게 되는 진리, 그것이 십자가의 진리이고,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능력이디. 그렇기 때문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빌 4:13)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러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삶을 다른 종교의 인간적인 선을 이루어서 영생을 얻어 보려는 삶과 같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종교와 같이 하나 될 수 없다는 고집을 부릴 수 있는 이유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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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은 현, Stanton University 부총장
Kadesh Inc. (Puriton) 부사장
Talbot School of Theology (Master of Divinity)
Johns Hopkins University (Master’s in Applied Economics)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Master’s in Political Management
University of Phoenix (Doctor of Management in Organizational Leadersh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