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에 대해 일본교회는 죄책감을 보였으나 통합과 장신대측은 죄책감없었어

최덕성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일제치하의 한국교회의 수난과 그 이후의 진행 과정은 로마제국치하에서의 박해, 특히 7차와 10차 대박해 동안 기독교인들이 당한 수난, 그리고 그 이후 진행 과정과 흡사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상숭배와 황제숭배 강요와 거부라는 점,
2) 국가가 그것을 강요했다는 점,
3) 수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점,
4) 박해 후 교회에 분열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점
그러나 갈등의 원인과 분열의 원인은 전혀 달랐다. (이 글의 많은 내용은 최덕성 교수의 책 <한국교회친일파전통>에서 인용하였다.)

 

190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

조선총독부는 장로교 총회 (제 27 회, 1937)가 모여 신사참배 결의한 후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가 각 노회 대표들을 인솔하여 평양신사에서 신사참배를 하였다. 한국교회가 일본적 종교로 거듭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약간의 변절을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신도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1938년 9월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평양신학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가 폐교됨

1938년 여름부터 일제는 개 교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서를 보냈다. 
“천황이 높으냐? 여호와가 높으냐?”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냐? 국가의식이냐?”
“국가지상이냐? 종교지상이냐?”


그리고 그 답변에 따라 집회를 허락하던지, 교회를 해산시키던지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윤성범은 신앙이 약한자는 신사참배에 항거했고, 그래서 믿음이 약한자이고(롬 14:1), 신앙이 강한 자는(롬 15:1) 그것에 참여했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1931년 일제가 제정한 법, “신도(神道)가 절대의 도이며, 국민 모두가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각종의 배도하는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규칙”에 의하면, “황국(皇國)의 도를 따라 신앙에 투철하며 각기의 분을 다하여 신도를 실천하여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여 받든다.”는 것을 교단강령으로 선언하였다.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는 변절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도교로 개종한 것이다. 일본기독교 조선감리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교회가 단지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지 악마의 교회는 아니었다”고 하는 교회역사학자 민경배의 주장은 당시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된 것임을 보여 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중순교한 주기철 목사(1897-1944)

1939년 12월 25 일 평양노회의 종교재판에 의해서 주기철은 우상숭배를 행하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파면되었다. 총회 관할 아래에 있는 자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한 총회의 결의에 감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교역자로[서] 국가의식 불응은 총회결의 정신 위반”이라는 것이다. 평양 노회는 주기철의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을 해임한 것만이 아니라 목사 자격 자체를 박탈했다. 그를 파면하고 가족을 사택에서 추방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추위에 떨게한 것은 일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였다. 일제 충견이던 친일파 목사들의 솔선수범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들을 박해했다.

주기철의 가족과 수진수난 성도들은 주기철에 대한 파면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같은 결정을 한 교회를 파괴하여야할 집단으로 보았다. 배교하는 교회의 결정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와 신분에 아무런 영향을 주시 못한다고 생각했다.

1940년 서울에 숭동교회에 “조선신학교”가 개교했고 초대 학원 원장에 김대현 장로가 취임했다. 조선신학교는 광복 후 미군정청으로부터 학교인가를 받았다. 교장에 김재준, 전임강사 송창근, 한경직이 취임했다. 조선신학교는 1951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채필근 신학교”로 다시 개교했으며, 주기철 이름을 졸업생대장 원본에서 없애 버리고 현재의 대장을 다시 만들었다.

일제말기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일제와 우상숭배를 행하는 기존교회부터 이중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성경적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교회의 기구적 연속성, 고전성, 정통성은 절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며, 기구적 유전(遺傳)에 집착하는 것은 죽은 전통이라고 보았다. 교회는 이름을 가진 조직기구라도 성경의 중추적인 가르침을 명백하게 위반할 경우에는 그 결정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 그 횡포가 지나쳐 우상숭배를 할 정도이거나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자를 면직, 제명할 정도이면 그 기구를 파괴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배도하는 총회와 노회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고자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여 순결한 한국 기독교를 계승하고자 했다. (p. 197)
 

1941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회가 해체됨

194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체되었다. 1945년 장로교라는 이름마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1907년에 첫 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 가을에 총회를 조직한 한국 장로교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대신 (평양 장로회신학교 대신) 조선신학교 (서울에)와 채필근신학교가 (평양에) 세워졌다. 일제의 황민화 도장으로 인허된 이 학교는 목사, 전도사가 아닌, 교회사(敎誨師), 정교사, 보교사를 양성했다. 일제는 목사를 “정교사” 전도사를 “보교사”로 부르게 했다. 정교사, 보교사는 일본적 기독교의 순복음(純福音)을 전파하는 자들이었다. 순복음이란 신도주의와 기독교를 혼합한 신도교를 뜻한다. 겉모양은 기독교이지만 내용은 신도주의로 채워진 일본식 혼합종교이다. 일제의 “순복음교회”는 신도교를 뜻한다.
 

1944년 3월 26일,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정교사(正敎師) 안수식

순일본기독교의 교회사(敎誨師)로 안수를 받은 것이다. 1944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임원들은 “적성(赤誠)을 다하여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민화(皇民化)를 하는 것이 최대의 급선무”라고 하면서 “황국의 도를 따라 ... 신도(神道,臣道)를 실천하며 황운을 부익하여 받든다”고 고백하고서 작위를 하사받듯이 목사 감투를 쓴 자들이었다. 광복 후에도 이들은 참회고백 없이 한국교회를 주름잡았다.
 

1946년 출옥성도들이 고려신학교(현 교려신학대학원, 천안) 설립

1995년 6월 장신대학 정기교수회에서 조사하여 주기철 목사의 이름을 학적부에서 제거된 것을 확인하였고, 일제 황민화 정책의 전열에선 '채필근 신학교'가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삭제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채필근 신학교는 신도주의와 기독교가 혼합된 “순정일본적 기독교”(純正日本的基督敎)라고 부르는 신도교의 교회사(敎誨師) 양성소가 되었다. 그리고 광복 (1945년) 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친 친공산주의 신학교가 되었다.
 

한국교회 죄책 고발자 주기철

주기철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까닭으로 자신을 면직시킨 한국교회의 죄책 고발자로 서 있다. 한국교회의 배도, 백귀난행(百鬼亂行),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거짓이 참을 능멸하고, 불의가 정의를 학대하고, 악이 선을 짓밟는 친일파 전통의 악마적 습성에 항거하고 있다. 비진리가 진리를 배척하고, 배도자가 순수 신앙인을 추방하고, 가룟 유다들이 신실한 선지자들을 능멸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교회에 대한 고발자로 서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주기철의 일제에 대한 항거와 일사각오 신앙만을 강조했지, 그가 배도하는 교권주의 장로교 집단에 항거한 일에 대해서는 눈여겨 보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만 강조했지 한국교회가 그를 박해한 것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는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까닭으로 자신을 파면한 한국교회를 고발하고 있다. 주기철은 조직기구의 그릇된 결정을 절대화하고 광복 반세기를 넘기도록 공적인 참회고백문 한 장 발표한 바 없는 양심부재의 한국교회를 고발하고 있다.

주기철은 치리회적 질서를 무시하는 교회, 중세기적 미신을 버리지 않는 교회, 순교자를 교권의 확보와 자파의 위상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교회에 대한 항의자로 서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을 갖지 못한 교회, 믿는것과 행하는 것이 불일치하는 교회, 이중성, 기회주의, 두 얼굴, 양시론, 타협주의, 회색주의의 습성을 버리지 않는 교회에 대한 고발자로 서 있다.
 

1997년 4월 주기철 목사 복권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주기철 목사복권과 관련하여 주기철이 “하나님 앞에서 면직도, 파면도 된 바 없다”고 했다. 복권 복직 선포식에서도 그 선포식 자체가 무용하다고 했다. 목사복권 결정은 그 자체가 신학적, 치리회적 근거가 없는 일이며 그 치리회의 결정은 불법이며, 무효이다. 그런데 왜 주광조는 주기철의 목사복권 행사를 원했느가? 주광조 일가에서 주기철의 순교정신은 표류하고 있다.

목사복권 사건은 조직기구, 형식, 제도를 절대시 하는 그릇된 교회관과 왜곡된 역사인식이 낳은 일대 불상사였다. 교회의 존재는 조직기구와 그 결정에 달려있지 않다. 주기철 목사복권 및 복적선포식에 참석한 일본인 도까 가쓰야 목사는 일본교회가 영원히 죄책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 행사를 주도한 통합측 교단과 장신대학은 단 한 마디의 참회의 말도, 반성의 표현도 없었다.

조직기구(교회)의 결정을 절대화하거나 교회의 본질을 조직기구에서 찾는것은 잘못이다. 교회의 본질을 기구적 연속성과 고전성 혹은 정통성에서 찾는 것은 로마가톨릭 전통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의 존재를 외형적인 요소에서 찾지 않는다. 영적, 신앙고백적 실체에 달려있는 것으로 본다. 배도하는 교회가 결정한 것을 유효한 것으로 여겨 복권을 시킨 것은 개혁주의 교회론과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면 배도하는 교회의 파면을 유효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면, 왜 배도하는 교회의 성례나 안수는 유효한 것을 볼 것인가? 주기철 목사 복권을 주도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를 로마가톨릭 교회관의 시녀로 갖다 바쳤다. 배도하고 우상숭배하는 교회에서 파면당한 것만큼 명예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가 파면을 당한 것은 순교 다음 가는 영예로운 일이다. 목사복권으로 주기철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하는 발상의 배후에는 한국교회의 신앙좌표 설정에 혼란을 준 특정 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교권주의, 제도주의, 형식지상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 교회관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태윤 목사는 정태윤 목사는 미국 달라스에 있는 서남침례교회의 목사이다. 정태윤 목사는 현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안타까워는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주의 형제회’를 조직하여 매년 복음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천주교의 심각한 배도를 설명하는 데이비드 헌트의 책「짐승위에 탄 여자」을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하였고, 그 외에도 「진정한 복음」,「참 복음과 거짓복음」, 「로버트 채프만: 사랑의 사도」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