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소리를 내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으로 가르치는 악한 거짓 목사들 때문

진성택 성도, 평신도 신학 연구자

지금 우리나라는 이단이 창궐하고 복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비 논질이 본질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본질이 무엇일까요? 오직 예수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비 본질은 무엇인가요? 귀신 쫓기, 병 고침, 예언, 안수, 안찰, 신비체험, 방언, 기름부음, 내적치유, 심리학, 각종의 이적, 율법 준수, 인본주의 인성교육, 성품교육, 쉐마교육 ... 등 본질을 벗어난 많은 것들이 비 본질입니다.

예수께서는 표적을 보이셨지만 표적을 따르는 자들은 미워하셨습니다.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이시며 메시아이신 것을 알리기 위해 귀신을 쫓으시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시고, 불치병인 나병을 고치셨습니다. 이런 기적과 오병이어의 기적 등의 표적을 보이실 때는 수많은 자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막상 복음을 전하자 모두 예수님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지 않고 표적을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표적을 보이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목적이셨습니다. 만약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셨다면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은 십자가 사역을 알리는 표적이셨습니다. 율법의 저주로 병든 자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며, 네 죄를 내가 십자가에서 해결하겠다는 의미로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초대교회의 모든 은사와 표적은 십자가 복음을 가리키기 위한 것입니다.

비 본질에 치중하면 반드시 본질은 위축되고 퇴색됩니다. 성도들은 연약하여 눈에 안 보이는 복음보다 눈에 보이는 표적과 방언을 더 따릅니다. 신약이 완성되고 진리의 성령이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오늘 날에 방언은 복음을 크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 나라에 방언이 널리 퍼진 것은 큰 교회 큰 목사님들 덕분입니다. 그들은 방언은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며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할 줄 알아야한다고 가르치고, 또한 본인들도 유창하게 합니다.

교인들은 방언을 못하면 성령을 못 받은 자로 취급 될 것을 걱정하여 열심히 방언을 연습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방언으로 기도하면 마치 개구리 울음소리에 온 천지가 뒤덮이고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비밀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과 하나님에 대해 크게 오해한 것 입니다. 우리의 비밀을 방언으로 해야 하나님이 알아들으실까요?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 십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스쳐가는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고 기도하면 못 알아들으실까요? 뜻 모를 방언으로 해야 알아들으실까요?

방언을 말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방언의 대상은 불신자입니다. 하나님이 방언으로 해야 알아듣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한 것이며 방언의 용도도 오해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하나님께 하는 영의 언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마저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에게 ‘영의 언어’로 해야만 알아들으신다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지나치게 오해하시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경건하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경우가 많고 존경받는 사역자들이 방언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방언을 받으려고 하나님께 조르고 또 조르다 방언을 못 받게 되면 방언을 연습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방언의 유래와 언어의 회복

각 방언은 저주의 표적입니다. 원래 인간은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한뜻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 할 수 있도록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한뜻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사악함을 보시고 언어를 흩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고 흩어져서 다른 민족이 되고 각 방언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방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저주로 흩어져서 생긴 산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흩으시고 시간이 흐른 후 때가 차매 메시아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죄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로 흩어져 각 방언을 하게 된 죄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흩어짐을 면하고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즉, 복음으로 모두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말씀은 복음이며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복된 말씀으로 하나 되게 하시려고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각 방언을 쓰는 죄인들도 예수를 영접하면 저주에서 벗어나 말씀이신 예수로 하나가 되며 한 가지 언어인 복음으로 회복되어 흩어짐을 면하고 한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방언을 하는 자들도 이제는 한 언어인 말씀(예수)으로 회복되고 하나 되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각 방언의 저주에서 벗어나 흩어짐을 면하고 예수 안에서 회복된 것입니다. 뜻 모를 방언에 대해 제일 먼저 들고 나오는 구절이 예수님의 말씀인 막 16:17절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이 구절에 나오는 새 방언은 뜻 모르고 주절대는 방언이 아니고 복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말씀인 "새 방언"은 주절대는 마귀방언을 말씀하신게 결코 아닙니다. 새 방언이란 새로운 언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죄인들은 입으로 죄만 지었습니다. 죄인들이 하는 모든 언어는 죄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입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일이 없는 새로운 언어인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새 언어이며 새 방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새 방언은 뜻 모를 방언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언어이며 각 나라 말입니다. 왜 방언을 주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사도들조차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강했고 성경도 유대인만의 것이고 하나님도 유대인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장벽을 깨뜨리는 것이 방언의 은사로 나타났습니다. 한 번도 배운 일이 없는 이방인의 언어인 방언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무려 16개국(행2:8-11)의 각 나라 방언을 체험한 사도들은 그제 서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을 말함을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2:11) 이로 인해 삼천 명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행2:41) 또 베드로에게 복음을 들은 이방인이 자기나라 말로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행10:46)

이처럼 방언은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듣지 못하는 뜻 없는 방언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어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개구리 울음소리 같은 방언을 들으면 복음전도는커녕 기겁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이로 보건대 뜻 모를 방언을 성령이 주셨다고 믿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현대의 방언을 하는 분들에게 일어나는 입이 돌아가고 혀가 꼬이는 현상이 사도들에게 일어났다고 성경은 증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바울이 방언을 권장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극심한 무역도시이며 항구도시입니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도 매우 타락하여 심지어 아버지의 첩과도 동침한 사람이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무질서하게 사용하고, 성찬을 남용하며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도 알지 못하고 방언으로 시끄럽게 기도하며 방언을 남발하고 은사가 같은 자들끼리 서로 편을 가르고 서로 분쟁하였습니다.(고전11:18-19)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편지로 그들을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며 성령의 은사는 위아래 가 없이 다 똑 같다고 가르치며(고전12:8-30), 성령의 은사들을 질서 있게 사용 할 것을 권면하고 성령의 은사 보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 제일이라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즉, 무질서한 고린도교회를 방언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 이끌어 가는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통하여 무엇을 강조 했는지, 또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은사에 매달리는 교인들에게 모든 성령의 은사보다 가장 귀한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 합니다.(고전12;31-13:13)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란 인간의 일시적이며 얄팍하고 감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면 이 사랑을 깨닫는 것이 온전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고전13:10)

이 사랑을 깨달으면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고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한다고 말합니다.(고전13:8) 이 사랑이 없으면 모든 은사나 지식이나 헌신이나 울리는 꽹가리에 불과하고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13;1-3) 이 사랑을 깨달으면 그동안의 모든 일이 어린아이의 일이였음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고전13:11) 이 사랑 안에 깊이 잠겨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면 예수의 얼굴을 마주보듯 온전히 알게 된다고 합니다.(고전13:12)

이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몸부림치며 꿈틀대며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 지식이 아닌 완전한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에게 모든 은사보다 이 사랑의 은사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2:31) 모든 성령의 은사는 이 사랑의 복음을 가르쳐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방언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완전한 복음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이며 불신자에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4:22) 방언의 은사란 불신자에게 그 사람이 난 곳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행2;8) 하나님께 방언을 하는 분들은 하나님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대상일까요? 고전 14장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통역하지 않는 방언(외국어)을 남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책망하는 구절로 차있습니다.

"분명치 못한 소리", "알아듣기 쉬운 말", "무엇이 유익하리요", “거고같이 생명 없는 것", “깨닫는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 “그리고 너희처럼 방언을 남발하면 너희를 미쳤다하지 않겠느냐",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뜻 없는 소리", “열매 맺지 못하리라" ... 등

이처럼 거듭거듭 해서 방언을 자랑하고 남발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어찌 방언을 권장하는 것이겠습니까? 바울은 방언을 자랑하며 남발하는 교인들에게 "너희보다 내가 더 방언을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뜻 모를 방언을 여러 가지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사도바울에게 여러 나라의 방언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여러 방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교인들에게 방언의 자랑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고전 14;18)

또 방언을 장려하는 구절이 "방언을 금하지 말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방언의 남발을 꾸짖은 바울은 이로 말미암아 방언의 은사가 위축되어 타국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지 않게 될 것을 우려하여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고 하였습니다.(고전14:39)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고전14장 2, 4, 14, 15절을 근거로 바울이 방언을 권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위 구절이 방언을 장려한 구절이라면, 지금까지 방언을 남발한 교인들을 책망한 바울을 이랬다 저랬다하는 변덕이 심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로마서를 통해 정통기독교 교리를 반듯하게 세운사람입니다. 또 성령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오직 복음에 역점을 둔 바울이 뜻 모를 방언을 권장했겠습니까? 바울이 오늘날 복음과 관계없는 뜻모를 방언을 하는 교인들을 본다면 아마도 꾸짖고 책망하지 않았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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