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재앙”이다. 프랜시스의 미국 방문 (9월 22-27일, 2015) 이후 곧 “프랜시스 효과” (Francis Effect)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랜시스가 미국에 남기고간 “효과”는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라이프웨이” 기관은 발표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재앙”인 것이다. 로마 교황 프랜시스가 미국에 남기고 간 효과는 그가 의도한 바가 성취되었다는 뜻이고, 이것이 미국을 위해서는 재앙인 것이다. 왜 그러한가? 우리는 실제적 보도와 성서적, 역사적 사건들의 분석을 통해서 그의 방문이 재앙일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직시해야할 것이다.

라이프웨이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트 목사들 중 가톨릭 교인은 중생한 그리스도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90%의 목사들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오직 5%의 목사들만이 “아니오”라고 답변했다 (Baptist Press. "Study:Pope improves pastors' views of Catholic Church," 9/25/2015).

이것이 현제 미국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의 질적 상태이다. 그러나 한 거름 더 나아가서, 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소지한 자들 중 69%의 목사들이 “교황 프랜시스코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고백하고 있다. 대학 과정 이하의 학위 소지자들 가운데서는 불과 42%의 목회자들만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뱁티스트 프레스).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지난 1950-6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한 “신복음주의 운동”의 완전 승리의 트로피이다. (이엔 머리의 “Evangelicalism Divided”를 참고 바람). 오늘의 비극은 우연히, 혹은 “진공(眞空)” 상태 안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 바티칸 공의회 (1963-65)의 줄기찬 노력과, 1994년의 ECT의 열매인 것이다.

프랜시스의 성공은 그의 주요 교리 혹은 정책 발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발언의 회피에 있었다. 가령 낙태와 결혼에 관한 교황의 발언에 대해서, 앨버트 몰러 (R. Albert Mohler Jr.)는 이 이슈에 관하여 교황의 발언이 “너무 분명치 않고 회피적이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낙태와 결혼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한 것이 사실인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뱀은 가끔 지나간 길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에게는 “완전범죄”란 있을 수 없다. 교황 프랜시스는 “토머스 머튼”건에서 꼬리를 잡혔다.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 발언에서(9월 24일) 미국인을 대표하는 네 명의 인사 중 하나로 토머스 머튼을 추겨 새웠다. (다른 세 명은 아브라함 링컨,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도로시 데이).

 

토머스 머튼은 과연 어떠한 인물인가?

토머스 머튼 (1915-1968)의 긴 어둠의 행로는 앨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의 “목적과 수단” (Ends and Means)이라는 책에서 출발하여, 노자의 도교를 통하여 해탈과 “바라봄의 법칙” (visualization) 등을 익히고, “자아를 잃음으로 참 자아를 발견”하여,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을 것”이라는 기독교 교리는 불교의 사상과 동일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리스도보다는 부처의 품에 안겨서 세상을 떠난 자이다. 그는 이들 안에서 참 기독교의 복음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음 내용은 허버트 J. 폴릿트 (Herbert J. Pollitt)의 저서 “종교통합운동: 뉴 에이지 교회에 들어오다”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들이다.

“머튼은 서구(西歐)를 재 기독교화하는 길은 오직 동방을 통하여서이며, 관상(觀想) (contemplation)의 능력을 인정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노자의 제자인 장자 (주전 396-286년) 로부터 양극을 피하는 일종의 변증학적 사상을 배웠고, 심령을 비우면 마음에 빛이 충만하게 된다는 교훈에서 기독교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사상과의 일치를 배웠다. 도교와 선(禪)교에서 머튼은 “인간은 결국 신이다”라는 사상을 터득하였다.“

다음 내용은 상당히 허무맹랑한 허구적 이론들에 불과하지만 언급하는 이유는 이러한 허무맹랑한 사상에 기초를 둔 “관상” 기도의 사도가 된 머튼의 사상이 가톨릭교회와 리차드 포스터의 “레노바레” 운동을 통해서, 결국 기독교에도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전통불교에서는 대오각성이 오랜 동안 도를 닦은 후 점진적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선불교에서는 한 순간에 온다고 하는 차이가 있다. 물론 마하야나 불교에서는 중간노선을 취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결국 “생각의 죽음” (death of thought)을 통해서 프라즈나(prajna) 라고 하는 “분별(分別)이 (필요) 없는 지식”에 도달한다.

일상의 평범한 삶, 먹고 마시는 일, 등에서도 신비를 발견한다는 선(禪) 교사 D. T. 수주키(Suzuki)로부터 머튼은 기독교의 “주 만찬” 정신을 발견한다. 대오각성, 곧 닐바나 (Nirvana), 청결한 마음 훈련에서 기독교의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이란 스스로 있는 자로부터 알려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없는 자로부터 배우게 되는 존재”라는 것이 머튼의 깨달음이다. “절대 공허는 절대 자비이다” (Absolute Emptiness is Absolute Compassion)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선(禪) 묵상은 허상의 자기를 부시고, 타락 이전의 낙원의 순수 상태로 우리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수주키의 주장, 곧 “낙원은 상실된 적이 없으므로, 다시 회복해야할 이유도 없다”는 설을 따르기로 정했다.

은혜의 직능은 인간의 중심 (centre)으로 귀향(歸鄕)케한다. 도를 시작하고 행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중심(centre) 자체의 이끄는 힘이다. 쎈터링이 ‘도를 행하고 이루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은혜란 눈 익은 모든 이정표들이 살아져버린 갈림 길에서 인간을 중심 (centre)으로 인도하는 환영의 손이다. 허버트 교수는 여기서 머튼의 은혜가 성서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버렸는지 상기시키고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말이다 (고전 1:4).

그리고 머튼의 관상기도는 “쎈터링” (centering)이라는 힌두교와 선불교의 기법을 사용하여 흑암의 세력으로 무지한 백성들을, 곧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욕을 좇아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할 스승”을 좇아가도록 미혹해 왔다. 로마 교황 프랜시스는 이러한 머튼을 미국민의 대표적인 4 인 중 하나로 추천하였다. 미상하 양원 합동 국회의사당에서. 그리고 “의원”들은 박수를 보냈다.

허버트 교수는 “성경의 은혜는 결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된 추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머튼에게는 “기독교와 불교는 그 원시 순수성에 있어서 동일하게 이것과 저것의 모든 구별을 초월한 저편을 지향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말살해 버리는 범신주의 (혹은 다원주의의 일부) 정신이다. 그는 출판되지 않은 한 편지에서, “나는 나의 태도와 정신에 있어서 중국 불교신자인 것만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러한 자를 프랜시스는 미 국회를 통하여 미국민에게 미국의 4 대 위인 중 하나로 추천한 것이다.

머튼은 14세기 플레밍의 신비주의자 에칼트 (Eckhart)의 “극빈” (utmost poverty) 사상에서 불교의 “허무(虛無)” (nothingness)를 발견한다. 이 길이 곧 인간이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 순야타 (sunyata)에 이르는 “자아 제거”의 길이다. “자아와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개념은 사라져야한다. 오직 ‘순수 자아’가 남을 때까지.” 이것이 머튼이 발견한 대오각성이다.

그는 이제 에칼트의 설교집 23 에 기록된 바와 같은 맥락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영혼 안에는 하나님과 너무나 유사한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구태여 하나님과 연합해야할 (하나 되어야 할) 필요가 하등에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부처를 보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처이다”는 선불교 사상과 같다고 머튼은 ‘깨달은’ 것이다.

허버트 교수는 이것은 불교 사상은 될지언정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과는 동이 서에서 먼 것과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고후 5:17). 머튼은 또한 불교의 ‘만달라’를 통해서 인간의 존재 중심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부처와 같이 닮아가는 길을 배우게 된다. 이 만달라는 “묵상” (meditation)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달라는 도를 추구하는 자들을 즉시 목상으로 돌아오게 한다. 묵상을 통해서 인간은 구원의 원리가 바로 자신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된다. 그래서 요동치는 영혼은 끝없이 쏟아지는 빛에 의해서 잠잠해 지며, 인간은 드디어 신이 된다. 이 사상은 머튼이 이미 인용한 바 있는 고전적 수피 (sufi: 회교 내의 신비주의 파) 의 주장과 일치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교만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겸손이다.”

이제 머튼은 좀 더 깊은 심연(深淵)으로 빠져 들어간다. 탄트리슴 (Tantrisim)이라는 것이다. 우주가 여신이라는 힌두교 사상이며, 그 여신 샥티 (Shakti)를 예배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 여신 숭배 행위는 여러 가지 의식(儀式), 몸짓 (gestures), 몸자세 (postures), 비법(秘法)등의 사용으로 수행된다. 머튼에게서 이 모든 더러운 이방 영들의 접촉과 수용들은 어느 시점에서 절정을 이루었는가? 스리랑카에 있는 대 부처상의 목격에서 절정을 이룬다. 스리랑카 소재 폴론나루와 (Polonnaruwa) 와, 마드라스 남부 마하발리푸람(Mahbalipur-am) 의 사원유적지에 세워진 대부처 상들을 목격하고 압도되어버렸다. 다음은 머튼이 했던 말이다.

“범상치 않은 얼굴들의 침묵. 위대한 미소들. 거대하지만, 섬세한! 모든 가능성들로 가득차 있으나,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아니한 (모습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아무 것도 배척치 아니한, 감정적 허탈에서 온 평안이 아니라, 아무 것도, 누구도 물리치지 않으며 모든 질문을 다 수용하는 순야타의 마드히야미카 (Madhyamika)의 평안 ... 나는 막연하게 찾던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토마스 머튼)

이렇게 깨닫고 머튼은 그의 영혼을 돌덩어리들 (우상들)에게 매각해 버렸다. 롬 1:18-25 말씀이 문자적으로 일어났다. 로마 교황 프랜시스는 이러한 머튼을 미 국민의 본받을 네 명 중 한 사람으로 국회에서 소개한 것이다. 그는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한 것인가? 물론 언젠가는, 모든 극단적 회교주의자들처럼, 이 나라를 통째로 삼킬 치밀한 계획의 행보 중 하나일 것이다. (혹은 미국을 언젠가는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시킬 계획의 신호일 수도 있다. 물론 링컨을 이러한 계획의 한 예로 삼는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머튼이 서양에 소개한 (1960년대) 요가의 8 단계를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알지 못하고 시행하고 있다면, 버려야한다. 그의 요가 뿐 아니라, 그의 관상기도, 그의 모니슴(monism: 우주의 단일체(單一體) 사상, 'Oneism') 전부를 통째로 버려야한다. 머튼은 성경의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었지만, “힌두의 사드후 (Sadhu, holy man) 가 기독교의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더 잘 알 수 있으며,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성령은 ‘자기와 같은 기독교 수도자 보다’ 힌두에게 더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다.

머튼 사상이 기독교회에 치명적으로 해로운 결정적인 이유는 또 있다. 1875년에 마담 헬레나 P. 블라밧스키에 의해서 시작된 “신의 지혜 협회” (Theosophical Society)의 노선과 완전 일치한다. 블라밧스키는 기독교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과 과학자들은 그들보다 더 월등한 인도인들을 존경해야한다”고 권고하였다. 힌두교와 불교에 대해서 “이들은 영적 발전 법칙을 따라 인간은 모든 거짓 신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아구속’ (Self-Redeem)을 성취하게된다.” “모든 교리적 종교 특히 기독교는 배척되어야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통합되어야한다.”라고 하였다.

놀라운 것은 머튼 사상과 블라밧스키 사상이 소위 “교회들” 안에 편안한 자리들을 점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 안에”는 이들이 있을 수 있지만(마 13:24-25),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 마 13:38 절에서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밭은 세상”이다. 요 15:19 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교회란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 (chosen out of the world)의 모임이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선택되어, 옮겨진 사람들이다. (‘out of the world') 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장 탁월한 특기는 “알곡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 프랜시스의 미국 방문과, 미국 국회 연설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과연 성서적 교회인가?

결코 아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로마 교회는 절대 기독교가 아니다.

1. 로마 교회의 구원론

그들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이면 충분하지 않는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하는 ‘통로는 성례들’이며, 이 성례는 오직 로마 사제들이 집행한 것들만이 유효하다”는 주장이다. (트렌트 공의회 (1545-63년) 문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846). 이 교리서 846번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 ... 모든 구원이 당신의 (예수 그리스도)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진다.” “세례를 통하여 교회에 들어온다.” “ ... 가톨릭 교회에 ...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교리서 #1411).

로마 가톨릭교회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고, 그 입장은 분명하게 비성서적이다.

2. 교황의 무(無)오류(誤謬)성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에,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 한 거름 더 나가서 이 교리서는, “이 무류성은 ‘하느님 계시의 위탁이 펼쳐지는 그만큼 펼쳐진다’”(교리서 #891).

극악한 죄인들로 가득찬 교황들이 “교리를 새울 때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더구나 그 무오류성은 “하나님의 계시”와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모독을 보면서, 많은 소경들 (소위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의 지도자들)은 로마 교회를 성서적 기독교로 인정하고 있으며, 80%의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교황은 진정한 그리스인이라고 인정하고 있고,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58%가 그러한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Baptist Press. Lifeway 조사. 9/25/2015)

3.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결합되어 계시듯이 신자들은 주교와 결합되어야한다.”(교리서 #896).

4. 마리아에 대하여: “ ... 살아계신 하느님을 잉태하셨고 기도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 주신 당신은 생명의 근원에 결합 되었나이다.”(교리서 #966).

만약 로마 교회가 기독교라면, 이제 기독교는 두 분의 “구원자들”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에서 로마 교회는 당연히 마리아를 “공동 구속자” (Co-Mediatrix) 로 칭하고 경배하고 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디모데전서 2:5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1Ti 2:5 KJV)

“ ... one mediator ... the man”이 아닌가?

5. 그러므로 이들은 화체설 등 무수하게 많은 비성서적 해석을 정당화할 규정이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는 책무는 오직 교회의 교도권, 곧 교황과 그와 일치하 는 주교들에게만 주어졌다”(교리서 #100).

이러한 기만은 로마 교인들은 미혹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성서적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기만할 수 없다. 그러나 초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신학 고학력자(高學歷者)들”의 69% 트는 “교황 프랜시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고백하고 있다.

6. 성경에 전혀 없는 “연옥”을 만들어 두었다.(교리서 #1031).

이 “연옥”에 대하여 로마 교회의 공식 성경 (영어본)이라고 할 수 있는 “Jerusalem Bible” 은 “마카베오하 12:44절”에 대하여, “이 구절은 죽은 자의 혼들이 정화되며, 산자들의 기 도로 도움을 받는 과정을 기록한, 곧 연옥에 대한 유일한 구약 구절이다” (J. B. 713 쪽). “예루살렘 바이블”이 말하는 “구약”이란 물론 “외경”을 의미한다. 로마 교회는 계 22:18 절 말씀을 범하고 있다.

7. 가장 큰 문제는 화체설(化體說) 이라는 사탄의 작품이다.
이들은 이를 “희생 제사”로 부르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서를 다시 공부할 필요가 있다. 이제 이 화체설 (Transubstantiation) 하나만으로도 로마 교회는 결코 성서적 기독교가 될 수 없음을 확 인 할 수 있다.

교황 프랜시스와 예수회 (Jesuits, Society of Jesus)

프랜시스코는 “예수회 회원”으로서 첫 번째 교황이 되었다. 예수회는 어떠한 존재인가? 예수회는 이그네이셔스 로욜라 (Ignatius Loyola)에 의해서 1534년, 8월 15일 프 랑스 파리에서 프로테스탄트 세력에 대한 대결의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그는 “영성훈련” (Spiritual Exercises)이라는 교범을 저술하여 제자들을 4 주간 집중 훈련하였다.

7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예수회 멤버는 그들의 첫 번째 충성을 “교황에게” 바치기로 서약하였다. 1533년, 로욜라와 캘빈은 잠시 같은 학교에서 수업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영원히 다른 길을 택했다. 마틴 루터는 중세 교회의 “전통”을 버리고 초대 교회의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서 영혼의 안식을 찾았던 반면, 로욜라는 중세 교회의 전통에 자신을 재 헌신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영성훈련”에서 로욜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모든 사적(私的) 판단을 버리라. 우리는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 배우자(配偶者), 거룩한 어머니, 계급적(階級的) 교회에 대하여 모든 일에 즉각 충성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해 두어야한다. 범사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진리에 도달하려면, 우리 보기에는, 검다할지라도, 제도교회가 ‘히다’고 하면, ‘히다’고 믿어야한다.

로욜라는 루터의 이신칭의를 단호하게 배격하였다. 인간은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고, 섬기도록 창조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그는 또한 “택함을 받은 자라도,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닌지는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회가 세운 세 가지 목표는 1)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억제함, 2)질적으로 높은 교육의 제공, 3)선교활동 강화 등이다.

예수회의 좌우명은 “하나님께 영광”이다. 이 모토는 모든 신자의 모토인 것 같다. 그러나 예수회에게는 이 모토의 의미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는 교황이 대표하는 로마 교회 안에 그 실체가 응축(凝縮)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현제 교황 프랜시스의 사상은 예수회 정신에서 벗어났는가? 아니면, 예수회 정신이 변질 되었는가? 물론 둘 다 아니다. “교황 교회로부터 이탈한 모든 조직과 교리는 이단이다.” “루터, 캘빈, 츠빙글리 등은 사탄의 사신(使臣)들이며, 그들의 영향은 어떠한 수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박멸해야할 대상이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서 예수회는 다음 두 가지의 “무기”를 만들었다:

“개연성(蓋然性) 주의” (Probabilism)라는 것이다. 어떠한 행동도, 만약 그 행동이 옳을 수 있는 가능성만 있으면, 예수님께 완전히 용납될 수 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정신적 유보(留保) (Mental reservation) 이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수단은 목적을 정당화 한다는 내용이다. “의도만 선할 가능성이 있으면, 맹세나 혹은 거짓 인상을 주어서라도 진리를 유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마귀적인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 된다.

이러한 이념아래, 예수회는 동 유럽, 남부 독일 및 벨지움 등에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빼앗긴 영토를 무력으로 회복하였다. 그들이 제정한 “금서 목록”에는 물론 프로테스탄트의 성경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종교재판소는 이를 무력으로 시행했으며, 이 금서목록은 1966년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예수회의 또 하나 모토는 “아이를 우리에게 7세까지만 위탁하면, 우리는 그를 영원히 가톨릭인 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태윤 목사 / 복음주의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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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윤 목사는 정태윤 목사는 미국 달라스에 있는 서남침례교회의 목사이다. 정태윤 목사는 현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서 멀리 벗어났음을 안타까워는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주의 형제회’를 조직하여 매년 복음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천주교의 심각한 배도를 설명하는 데이비드 헌트의 책「짐승위에 탄 여자」을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하였고, 그 외에도 「진정한 복음」,「참 복음과 거짓복음」, 「로버트 채프만: 사랑의 사도」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