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6회)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이 “그의 뜻대로” 교회에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는 것과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와서 성령의 은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은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한참 은사 이야기를 하다가 잠깐 쉬어가는 마당(고전13장)에서 사랑 타령을 한 판 벌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독립적으로도 훌륭한 사랑의 찬가일 수는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을 바울의 의도대로 읽으려면, 고린도전서 12-14장의 전후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을 때, 고린도전서 12장의 연장선상에서, 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문제 삼으려는 거짓 방언을 미리 계산에 넣지 않으면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를 놓칠 수밖에 없다.1)

거짓 은사(방언)의 무가치함(1-3절)

아래 본문에서 바울은 직설법으로 실제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면’의 가정법을 쓰고 있는 이유는 실제로 사랑 없이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사랑 없이 은사를 사용한다면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바울의 표현들은, 사실은 사랑 없이 사용되는 은사는 성령의 은사가 아님을 시위하는 표현들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위 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암시했고, 14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거짓 방언의 무가치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단순히 바울의 사랑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를 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거짓 방언을 하므로, 혼란과 파멸을 자초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준엄한 책망으로 읽어야 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가장 먼저 방언을 언급함으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하고 싶은 말이 방언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바울은 여기서 가정법과 과장법을 동원해서 사랑 없이 사용되는 은사, 즉 거짓 방언의 무가치함을 강조한다.2) 바울이 여기서 가정법 “~할지라도 ~하면”, “~있을지라도 ~하면”, “~내줄지라도 ~하면”을 사용하는 이유는, 묘사하고 있는 것들이 사랑 없이는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헬라어 문법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가정법을 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만 쓸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용도로는 아예 사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 “성령으로” 시행될 때는, 당연히 사랑으로 시행될 것임으로 구리나 꽹과리 소리 같은 무가치한 소음을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성령이 실수하실 리 없기 때문이다.3)

그러므로 사랑 없이, 즉 교회의 유익을 위하지 않고 개인의 유익을 위하는 은사가 있다면, 그 은사는 절대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따라서 개인의 유익을 위할 수 있다는 개인용 방언이야말로 본문에서 말하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아닌, 거짓 방언을 말하는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의 방언(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 즉 외국어)과 천사의 말(과장법으로 ‘설령 너희가 천사의 말’)4) 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즉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사랑으로 사용하지 않으면(다시 말하지만 ‘성령으로’ 은사가 시행되는 곳에서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거짓 은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쓸데없는 소음이 되고 마는데, 하물며 너희가 하는 거짓 방언은 두말할 것이 있겠느냐? 너희는 너희의 방언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쓸데없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제발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바울이 1절에서 사랑 없는 방언(거짓 방언)을 설명하기 위해 타악기인 구리와 꽹과리를 동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소리 나는 ‘구리’는 치면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는, 아무렇게나 생긴 청동 조각을 말한다. 이 악기는 귀청을 괴롭히는 시끄러운 소리를 낼 수 있을 뿐 리듬으로 어떤 의미를 전달할 수는 없다. 또한 울리는 ‘꽹과리’는 동방 세계의 이교 예배 의식에 널리 사용되었던 오목하게 생긴 쇠판인데, 이 악기도 구리와 동일하게 땡그랑거리는 시끄러운 소음을 낼 뿐이다.5)

어쩌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이 이방 신전에서 온 것임을 은근히 비꼬기 위해 이런 악기들을 동원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구리와 꽹과리를 치는 모습은 당시 키벨레의 제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6) 어쨌든 이런 악기로는 시끄러운 소리7)로 사람을 흥분시킬 수는 있어도,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는 없다.8)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시행되는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은 구리와 꽹과리 소리 같은 소음에 불과하다.

바울은 2절에서 “예언하는 능력”을 말하면서 언급한 “모든 비밀을 알고”는 헬라어로 ‘에이도 타 뮈스테리아 판타’(eivdw/ ta. musth,ria pa,nta)인데 이것은 ‘천상의 신비한 일이나 계획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9) 그러나 천상의 ‘모든 비밀’을 인간이 다 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도 가정법을 쓰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모든 비밀을 알고”는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언급할 ‘비밀’을 의식한 표현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언하는 능력이든, 모든 비밀이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신자에게로,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 받은 신자에게서 다른 신자들(교회)에게로 향한다. 그런데도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일까?

성령의 은사(방언)에 대한 바른 태도(4-7절)

지금 고린도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특정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가 무엇이든지 간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쓰려고 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특히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육신적인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사랑이 있어야 성령의 은사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쓸 수 있으며, 이기심의 산물인 거짓 방언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는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거짓 방언으로 구리나 꽹과리 소리를 내는 자들과는 달리 사랑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는 자들은, 자기를 위해 특정한 은사에 집착하지 않고 성령이 “그의 뜻대로” 은사를 주실 때까지 오래 참는다. 또 방언과 예언의 은사자들은 성령이 자신에게 계시를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계시를 주시면 질서를 지켜 순서대로 말한다(고전14:27-32 참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사랑으로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는 자들은, 다른 지체들이 받은 은사에 대해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은사가 교회에서 더 요긴하게 쓰이는 은사라 할지라도 우쭐해서 자기를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그 은사를 가지고 무례히 행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이용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10) 성령의 뜻대로 교회의 유익을 구한다.

이들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성내지 않으며, 절대다수가 거짓 방언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며 그것으로 영광을 누릴지라도, 자신도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것을 기뻐하지도 않고, 진리와 함께, 즉 성령이 주신 은사가 무엇이든 간에 성령의 뜻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 쓰기를 기뻐한다. 이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참으며, 성령이 주시는 모든 은사를 그대로 믿으며, 모든 은사가 다 교회의 유익이 되기를 바라며, 교회의 유익을 위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견딘다.

그러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구하거나 쓰려는 자들은 성령이 “그의 뜻대로” 은사를 주실 때까지 참지 않으며, 특정 은사에 집착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거짓 은사라도 만들어 자기의 유익과 영광을 구한다.

이들은 은사를 시행하는 다른 지체에게 온유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기하고, 은사로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하여 자기의 영적 우월을 과시하고, 자신을 반대하는 자에게 무례히 행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성내며, 높아지고 싶은 육신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악한 것, 즉 거짓 방언이라도 하려고 생각하며, 거짓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기뻐한다. 이들은 진리, 즉 성령의 뜻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일은 기뻐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참지 않으며,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자신을 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것도 견디지 않는다.

은사의 유효 기간(8-12절)

이 부분은 기회가 주어지면 따로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간단하게 요약만 한다면 다음과 같다.

주의 재림 때까지 은사는 계속될 것이나, 어린아이가 장성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사라지다가 주님 오시는 그날에 완전히 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는 설령 성령의 은사가 있다할지라도 초대교회에 비해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오순절주의와 신사도주의를 중심으로 홍수를 이루고 있는 은사들과 기적들은 결코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사나 기적일 수는 없다.

결 론(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이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오해하는 본문들 중 하나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을 때 고린도 교회의 정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전후 문맥을 무시한 채 믿음, 소망, 사랑을 단순 비교해서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어처구니없게도 어떤 사람은 ‘왜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뛰어난가?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믿음과 소망은 없고 사랑만 남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믿음은 별도의 은사로 구분될 정도로 하위이지만 사랑은 모든 은사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더 뛰어나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에 사랑이 가장 귀중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11)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바울의 의도에서 한참 비껴가는 잘못된 해석들이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을 놓고 단순히 메달 색깔을 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본문도 다른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앞의 내용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본문이다.12) 다시 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하고 있는, 즉 교회의 유익을 주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13절에서도 계속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은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의 우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려면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또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믿음, 소망, 사랑은 서로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는 교회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은 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현재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이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교회에 사랑과 소망은 넘치는데 믿음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면 바울은 그 교회를 향해서는 “믿음 소망 사랑 중 믿음이 제일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 고린도 교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은사의 남용이나 오용이 아니라, 은사를 개인의 덕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면서도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는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즉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고린도교회는 개인의 유익을 위할 수 있다는 괴물 거짓 은사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사랑이 없는 이들에게 “너희에게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 필요한 것은 사랑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각주 ---

1) 고전13장을 읽을 때, 만약 고린도 교회의 거짓 방언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바로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사랑은 오래 참고’는 누구를 신속하게 도와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사랑은 오래 참지 않고 빨리’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2) 개인용 방언을 주장하는 김동수 교수도 이 본문에서 “사랑이라는 길을 따라 가지 않으면 은사는 무용지물이 된다”고 말하고는 있다.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38.
3)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4) 어쩌면 이 말은 거짓 방언을 하는 자들이 자신의 방언을 천사의 말로 미화시킨 것을 바울이 냉소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5) 로버트 토마스, 성령의 은사들, 김지찬 옮김(서울: 생명의말씀사, 1983), pp.129,130; 레온 모리스, 고린도전서, 정일오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p.225.
6) 키벨레는 프리기아(터키의 어느 지방임)에서 신들의 어머니이고 대지의 여신이며 숲을 보호하는 대모신(大母神)이다. 로마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키벨레의 제의는 3월 22일에 시작되었으며, 이때 숲에서 소나무를 베어서 키벨레 신전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오랑케 꽃(앗티스가 흘린 피에서 피어난 꽃이다)과 인형(앗티스를 상징)으로 나무를 장식한 후에 땅에 묻었다. 3일 째 되는 날에는 키벨레 신전의 대사제가 칼로 자기 팔에 상처를 낸 후에 흐르는 피를 제단에 뿌렸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땅을 파서 인형을 끄집어내었다. 이때는 북(구리)과 꽹과리를 치면서 무아경에 빠져서 광란의 춤을 추었다. 키벨레 숭배는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내륙으로부터 크레타 섬을 비롯한 다른 에게 해의 섬들과 그리스까지 퍼졌으며 특히 아테네에서 유행했다. 이동민, 로마 시대의 비의들, 수필과 비평 2012년 10월호(통권 132호), p.280.
7) ‘소리 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손’(hvcw/n)은 음 높이가 표시된 음색이 아니라, 보통 공명을 통해 소리가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뒤이은 헬라어 단어 ‘알랄라존’(avlala,zon, 울리는)과 짝을 이루어 선율도 없이 끝없이 울려대는 잡음을 의미한다. 앤토니 C. 티슬턴, 고린도전서, 권연경 옮김(서울: SFC, 2011), p.386.
8) 고린도 교회나 현대 교회의 거짓 방언도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할 수는 없으나, 그 소리로 사람들을 흥분시켜 이성을 마비시키므로 이상(異常) 감성(황홀경)을 유도해 낼 수는 있다. 이 부분은 ‘3부 현대 교회의 방언’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9) 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2]), p.34.
10) 그러나 고전14:4에 언급된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은 명백히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은사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와는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래서 고전14:4의 개인용 방언은 성령의 은사일 수 없다. 만약 고전14:4이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로서 개인용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면, 바울은 둘(고전13:5과 고전14:4) 중 어느 한 곳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11)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56-157.
12) 옥성호 형제는 헬라어 원문에 있는 접속사 ‘누니’(nuni,, now)를 문제 삼으며 앞의 내용과 이 본문과의 인과 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옥성호,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p.155-156). 물론 이 본문은 바로 앞의 12절과는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그러나 고전13장 전체의 내용과는 분명한 인과 관계가 있다. 바울은 고전13장에서 말한 사랑의 중요성을 고린도 교회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13절에서 고전13장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을 접속사 ‘누니’(nuni,, now)로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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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