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정석 목사(시카고 한인 나사렛교회)

이생의 자랑을 위해 공부했던 시절, 나는 무덤의 크기가 가문을 대표한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의 크기와  후손(seeds)의 번성이 관련되어 있다고 오랫동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집안 어르신들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여  교회 다니시는 집안 어르신들이 알려 주셨습니다.

가문의 자랑으로 여겼던 큰 무덤은 이제 보통 가정 집 보다 큰 무덤으로 변모되었으니 사당입니다. 죽은 자를 위로하고 경배하며 복을 기원하는 장소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교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여 경배하며 찬양을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죽은 자를 기념하는 사당과 부활을 기념하는 장소인 교회, 둘 중에 어디에 우리의 인생을 위탁할 것인가를 질문한다면 답은 후자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무덤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을까요?”

이런 뜬금없는 생각을 한번 쯤은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님은 무덤을 남기지 않으신 것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셨던 예수님의 무덤은 그 어떤 위인보다 혹은 신화적인 인물보다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무덤으로 존재했어야 했는데 없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바리새인들은 오래전부터 죽은 예언자들에 위해 무덤을 만들기를 좋아했습니다. 위선과 거짓으로 세상을 살아갔던 바리새인, 이중적인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는 무덤이 가문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던 것은 무엇 때문일일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생의 자랑을 위함이었습니다. 이것 외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는 죄를 많이 지었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릅니다. 예수님까지 죽였던 조상들의 무덤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예수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가 없다고 공공연하게 세상에 알리는 체면 구기는 일입니다.

프랑스의 최고 지성인이며 변증학자인 지라르(Rene Girard)는 회칠한 무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덤 안에서 썩어가는 시체와 무덤 밖의 아름다운 구조는 최초의 희생양의 관계에서 인류 문화의 전체 과정을 닮아왔다. 무덤 내부와 무덤 외부는 원시적 성스러움의 이중석 성격, 곧 폭력과 평화, 죽음과 생명, 무질서와 질서라는 이중적인 요소가 결합한다.”

과거나 오늘이나 수많은 사람들은 매장될 무덤을 크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분들도 이에 대한 갈망이 더러 있습니다. 속세의 사람들은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신명나게 놀아보자는 목적으로 인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신중하게 그리고 죄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생각이라면 안 되는데 소인원이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큰 무덤에 매장된 분은 천국에서도 큰 분이라 인정할 줄 알았는데 가보니 아닌 경우가 허다한데도 큰 무덤 만들려고 합니다.아브람이 막벨라 굴(창23:9)을 구입하여 본인과 가족 그리고 후손들이 매장될  무덤을 마련했습니다. 그곳은 의인들의 무덤이 아니라 죄인들의 무덤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칭하는 성경의 주인공들이 죄 없이 무덤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온갖 유혹을 뿌리쳤던(39:8-9) 요셉 역시 태양신을 섬기는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지 않습니까?(창41:45). 믿음의 조상들이라 칭했던 그들 역시 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제껏 보살펴 주심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수난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모세는 무덤이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신명기 34장에 보면 모세가 모압 땅의 느보산에 올라가 죽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그의 무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신34:6).

그런데 예루살렘 모스크에는 모세의 무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여겨 데려 가셨는데 인간들이 보기에는 여전이 모세는 죄가 있던 인물이었나 봅니다. 사람이 보기에도 그렇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죄가 없어야 되는데, 그런 인물은 인류가 시작된 후로 예수님 외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무덤은 죄 때문에 죽은 시신들이 안치된 곳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왜 없는지 이제야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분은 죄가 없기 때문에 무덤이 없는 것이지요. 

‘스스로 무덤파지 말라’는 속세의 언어를 해석하면 죄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죽어서 매장될 명당을 찾는다면 구원의 확신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게 화려한 무덤에 갇혀 세상의 이목을 받기를 원하는 인간들의 최후가 어떠한지 아셔야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죽든, 안 믿고 죽든, 무덤에 똑같이 갇힐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은 자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 믿고 죽어 무덤에 갇힌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 무덤에 갇힌 사람도 똑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요5:28). 무덤에 갇히기 전에(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영생이 보장되기에 무덤에서 나오게 됩니다. 믿지 않고 죽어 무덤에 있던 그 사람들도 갇힌 무덤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결과는 다릅니다. 큰 무덤 만들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큰 무덤을 만들기에 혈안에 되었던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말씀(요5:29)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없는 이유를 알겠는지요? 그분은 죄가 없으셨기에 무덤에 매장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덤이 아예 필요 없으셨던 분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화적인 인물들은 무덤을 갖고 있습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분들의 무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은 죄가 있어 무덤에 갇힌 신들(gods)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무덤이 없다’ 하여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분은 죄가 없으신 고로 무덤이 없는 것이지요. 죄가 없는 그분에게 매달려 사는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분 따라 천국에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덤 만들지 맙시다- Do not made tomb for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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