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9회)

▲ 이창모 목사

들어가는 말

거짓방언자들은 고전14:2을 근거로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만약 바울이 고전14:2에서 방언기도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면, 방언기도야말로 최고의 은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한갓 피조물이며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히 비밀을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한갓 피조물이며 죄인에 불과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방언의 은사만 받는다면, 방언기도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거짓방언자들은 방언기도를 하면서 정말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어떤 경우에도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비밀의 방향을 보면 이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인지 거짓 방언인지 구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방언의 방향이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그리고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 인가? 아니면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인가?에 따라 방언의 진위 여부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비밀’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한다. 물론 이런 점에서 거짓방언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방언을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기도는 인간에게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맞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 감히 비밀을 말해줄 수 있는 피조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비밀의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향하며, 또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 향한다. 따라서 2절에 언급된 대로 비밀이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방언은 결코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일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의 방언이든 천사의 말이든 간에 인간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왜 불가능한 일인가?

먼저 본문에 언급된 ‘비밀’이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살펴보자. 성경에서 ‘비밀’은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 성경에서 ‘비밀’(musth,rion, 뮈스테리온, secret)이라는 단어는 어느 곳에서나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먼저 구약의 예를 보자.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단2:19).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단2:28).

위의 본문을 보면 은밀한 것, 즉 비밀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비밀을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비밀을 보고 듣는 자는 인간인 다니엘과 느부갓네살 왕이다. 여기서 비밀의 방향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향한다.

신약성경에서의 비밀은 항상 ‘계시의 구속사적 내용’ 즉,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낸다.1) 따라서 당연히 그 방향도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향한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서신에서 비밀이 나오는 본문 몇 군데를 살펴보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1:9).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3:3-4).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9).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 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6-27).

방언의 은사가 언급되고 있는 고린도전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은밀(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7).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4:1).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13:3)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고전15:51).

성경에 언급된 비밀은 예외 없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계시를 의미한다. 이 계시의 비밀이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일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일이 없는 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바울에게 ‘비밀’이라는 말은 신비하고 진기한 비법이나 어떤 진리 체계가 아니라 주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종말적 구원을 의미한다. 이 비밀은 사도들의 전파를 통해 열방에 알려진 계시된 비밀이며(롬16:25; 엡3:9; 골1:25,26), 복음의 비밀(엡6:19), 그리스도의 비밀(골4:3)로서 모든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 고전13:2의 비밀은 전에는 숨겨졌으나 이제 비로소 알려진 특수한 계시를 가리킨다.2) 이 비밀은 계시의 핵심에 속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주권적 능력으로 일방적으로 펴 보이시지 않으면 사람에게 숨겨져 있어서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3) 그러므로 이 비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는 말이, 거짓방언자들의 주장대로, 바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정의하는 것이라면, 바울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능멸하고 있는 것이 된다. 연약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거짓방언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자신들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비밀들을,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거짓 방언이 대단한 은사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또 이들은 방언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이유가 사탄이 기도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까지 말한다.4) 그래서 방언기도는 “원수 마귀가 도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왜곡할 수도 없는 특별한 언어와 암호를 이용하여 하나님과 안전하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천상의 언어”라고까지 말한다.5)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1-7절을 보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의 대상은 교회의 지체들, 즉 사람임에 분명하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처럼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방언의 대상은 교회(사람)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고 만다. 방언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뛰어난 영성을 과시함으로 교회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하는 방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거짓말함으로써 자신의 뛰어난 영성을 과시한다. 그러나 자신을 과시하는 데 사용되는 방언은 성령이 교회의 덕을 위해 주신 성령의 은사일 수 없다(고전12:7 참고). 결국 이들의 방언은 인위적인 것으로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사람들의 귀만 따갑게 하는 무의미한 소음에 불과하다(고전13:1).

그런데 연약한 인간이 전능자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하면서 정작 비밀을 말하는 자신은 그 비밀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기막힌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는 이 말이 옳다. 왜냐하면 거짓방언자들은 사실상 알고 있는 비밀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직한 자기 고백이다. 바울은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0-11).

여기서 바울은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깊은 것(비밀)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성령)”이 아닌 “(사람의) 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깊은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다. 따라서 “(사람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 교회가 하고 있는 방언, 즉 “(사람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은 성령의 은사와는 무관한 거짓방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코미디가 현대 교회에서도 방언기도라는 이름으로 연출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의 수혜자가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방자한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오히려 하나님을 은사의 수혜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거짓방언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모르는 비밀을 알기 위해, 그리고 그 비밀을 사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인간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신 꼴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방언기도야말로 놀라운 은사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방언은 연약한 인간이 마귀로부터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호해 주며, 어리석은 인간이 전지하신 하나님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거짓방언자들의 이런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방언기도를 못하셔서 그만 마귀에게 비밀을 들켜 버려 가룟 유다의 무리에게 잡히셨으며, 그때 하나님은 그 상황을 잘 모르셔서 아들이 잡히는 것을 그냥 방치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서, 이제라도 마귀로부터 보안을 철통같이 하고, 자신의 무지를 방지하기 위하여 현대 교회에 방언의 은사를 마구 부어 주시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거짓방언자들의 하나님은, 방언을 듣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무지하고, 또 그것을 마귀에게 들키지 않아야 할 만큼 연약하기 짝이 없는 분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방언은 연약한 인간이 연약한 인간(외국인)에게 하나님의 비밀(복음)을 말하는 은사이다. 성령이 교회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비밀을, 교회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방언이 등장하는 사도행전의 기록들7)과 고린도전서의 기록들8)을 주의해서 살펴보라. 성경은 ‘방언으로 기도하다’로 표현하지 않고 언제나 ‘방언으로 말하다’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고린도전서 14장 14절과 15절에서 단 두 차례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방언기도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비판하기 위해 가정법을 동원한 표현들이다. 바울은 방언기도를 인정한 적도 없고, 방언으로 기도한 적은 더 더욱 없다. 왜냐하면 방언은 인간(외국인)에게 말하는 은사이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14:2의 방언 이야기는 절대로 바울의 의견일 수 없다. ‘비밀’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도 맞지 않고, 무엇보다도 “연약한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것은 신학적(성경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전14:2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고린도교회에서 거짓방언으로 으쓱대는 자들의 거짓말이며, 오늘날에도 그 후예들이 고전14:2을 가지고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방언기도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 하면서.........

 

--- 각주 ---

1) 윤석준, 101가지 성경 이야기 2(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p.356.
2) 리차드 개핀, 성령 은사론, 권성수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p.70.
3) 앞의 책, p.70.
4)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88.
5) 마헤쉬 차브다, 방언 체험, 배응준 옮김(서울: 규장, 2004), p.21.
6) 물론 믿을만한 사본에는 없지만, 방옹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막16:17에 나오는 ‘새 방언’도 그 대상은 역시 사람이다.
7) 행2:4, 행2:6, 행2:11, 행10:46, 행19:6 등에서 방언과 관련된 동사는 모두 다 ‘말하다’를 쓰고 있으며 그 대상은 사람이다. 그 외 막16:17에서도 ‘새 방언을 말하며~’로 묘사하고 있다. 막16:9-20까지는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것으로 여겨지나 그렇다 할지라도 당시 초대 교회의 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도 새 방언은 그 대상이 역시 사람이다.
8) 고전12:10, 고전12:30, 고전13:1, 고전14:2, 고전14:4, 고전14:5, 고전14:6, 고전14:13, 고전14:18, 고전14:19, 고전14:21, 고전14:23, 고전14:27, 고전14:3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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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