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0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만큼은 개인의 덕을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14:4).

오순절주의자들은 위의 본문을 근거로 방언기도는 ‘개인의 덕을 세우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다른 모든 성령의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의 은사만큼은 통역하면 교회를 위하는 은사가 되고, 통역 없이 개인적으로 기도하면 개인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익한 은사라는 것이다.1)

과연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외국어)과 함께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영음)도 있는가? 아니면 한 가지 방언(영음)으로 통역자가 있을 때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고, 통역자가 없을 때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개인의 덕을 세울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제대로 구하려면, 먼저 이 본문을 고전12장-13장과의 전후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방언을 바로 잡기 위해 고린도전서 14장을 썼는데, 어린아이 같은 수준의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전서 14장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앞서 쓴 것이 고린도전서 12-13장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의 은사의 전반적인 성격에 대한 설명이며, 고린도전서 13장은 은사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은사자의 마음(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쓰려고 하는 마음)인 사랑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설명한 성령의 은사와는 판이하게 다른 거짓 방언임을 설명하는 본론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바울은 성령이 교회에 은사를 주신 유일한 목적이 교회의 덕을 위해서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전서 14장 4절을 읽으면,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에는 개인용 방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에는 개인용 방언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고린도전서 전체 속에서 전후 문맥을 고려하며 살펴보자.

첫째,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은사에 대해 책망하고 있으며, 은사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파당 문제(고전1장)에서 부활 신앙의 문제(고전15장)까지 줄곧 고린도 교회의 영적 문제들을 지적하고 책망해 왔다. 그런데 유독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 와서 갑자기 책망을 멈추고, 성령의 은사(특히 방언)에 대해 강의하며 특히 개인용 방언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을 권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책망이라고는 겨우 “방언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마라. 방언할 때 순서에 따라 해라. 회중 앞에서 방언할 때는 통역해라. 만약 통역이 없으면 집에 가서 해라” 정도인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15장까지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한 어떤 책망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12-14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책망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다른 모든 문제들보다 방언 문제를 세 장(12-14장)에 걸쳐 가장 길게 다루고 있는 것은, 방언에 관한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두 종류의 방언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개인용 방언을 다루기 전에 틀림없이 12-13장에서 이 사실, 즉 방언의 은사만큼은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말했을 것이다.

만약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과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을 함께 언급한 것이 사실이라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다른 은사들과 달리 두 종류가 있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이 점은 방언을 설명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방언에 대한 중요한 사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방언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고린도전서 12-13장 어디에서든지 방언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두 종류의 방언이 있음에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교회의 덕을 위하는 방언만을 말하고, 개인용 방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14장에 와서 교회의 덕을 위하는 방언과 개인의 덕을 위하는 방언을 뒤죽박죽 섞어서 말하고 있다면, 바울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바울의 미숙한 설명으로 말미암아 고린도전서 14장을 읽는 독자들은 심각한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도면밀한 바울이 성령의 영감으로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이런 실수를 했을리가 없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말하기 전에 미리 개인용 방언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바울의 실수가 아니라 개인용 방언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에는 개인의 덕을 위할 수 있는 개인용 방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3장 어디에서도 개인용 방언의 존재를 암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이 고린도전서 14장 4절의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를 개인용 방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라고 믿는다면, 이들의 믿음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로 믿고 방언기도를 열심히 하고, 또 열심히 퍼뜨린다는 것은 사탄의 도구 노릇을 하며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용 방언을 주장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의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다음 예에서 확인하라.

비행 물체를 가르치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헬리콥터에 대해 강의했다고 가정하자. 만약 하늘만 날 수 다른 비행 물체들과는 달리 헬리콥터는 하늘뿐 아니라 물속에서도 날 수 있다면, 이 사실은 교수가 학생들에게 헬리콥터를 설명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지식이다. 그런데 만약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중요한 지식을 사전에 미리 말하지 않은 채,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에 대해 설명하다가 물속에 있는 헬리콥터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면 학생들은 물속에 있는 헬리콥터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른 비행 물체는 물속에서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들은 그 사진을 보고 다른 비행 물체는 그럴 수 없지만 헬리콥터만큼은 물속에서도 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닐 것이다. 학생들은 그 사진을, 헬리콥터를 타고 물속에 들어가면 이렇게 큰 일 난다는 교수의 경고로 받아드릴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헬리콥터만큼은 정말로 물속에서도 날 수 있는데, 교수가 헬리콥터를 설명하면서 그런 사실을 사전에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하늘의 헬리콥터와 물속의 헬리콥터를 번갈아 가며 이야기했다면 교수는 큰 실수를 한 것이 된다. 그러나 교수가 헬리콥터를 설명할 때 사전에 물속의 헬리콥터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물속을 나는 헬리콥터가 없기 때문이라면, 강의 중 물속의 헬리콥터가 있는 사진은 자연스럽게 비정상적인 헬리콥터, 즉 사고가 난 헬리콥터 이야기가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 강의를 들은 어떤 학생이 다른 비행 물체들과는 달리 헬리콥터만큼은 물속에서도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물속으로 들어간다면 그 학생은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에 대해서만 말하고, 개인용 방언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은, 개인용 방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마치 개인용 방언처럼 보이는 설명들은 물속에 빠진 헬리콥터처럼 사고 난 방언에 대한 설명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개인용 방언처럼 보이는 설명을 근거로, 방언기도를 하는 것은 헬리콥터를 타고 물속에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짓이다.

셋째, 고린도전서 12장은 간접적이기는 하나 개인용 방언을 부정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은사다’라는 주장)을 지원하고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12장에 바울은 철저하게 교회의 덕을 위한 은사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에는 개인용도로 쓸 수 있는 은사(방언기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장은 개인용 방언을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부정하고 있다.2)

--- 각주 ---

1)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50.
2) 바울은 고전13장에서도 사랑으로 은사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함으로 개인용 방언에 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김동수 교수도 “성령의 은사는 사랑의 길을 따라 추구되어야 한다. 사랑은 은사가 사용되는 가장 좋은 길이다”라고 말한다. 김동수, 방언은 하늘의 고귀한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68. 그렇다면 김동수 교수가 주장하는 개인용 방언은 어떤 사랑의 길을 따라 추구하는 은사인가? 혹시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심의 길을 따라 추구하는 은사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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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