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27:1)

큰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속에서 내공이 생겨야 한다. 차돌같이 그 믿음이 단단해져야 한다. 자기의 육체의 속성과 기질을 이기고 꾸준한 믿음의 모습과 패턴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는 내면의 힘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려면 절대적으로 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크고 귀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을 향하여 마귀는 쉬지 않고 화살을 보낸다. 예리한 비방과 조롱, 차가운 정죄, 비인간적인 모욕, 그리고 인격까지 망가뜨리는 가난에 직면하기도 하는 것은 역사속의 모든 큰 믿음의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이 모든 일들을 이기고 헤쳐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큰 믿음의 일꾼이 되기 위한 견고함이다. 바위처럼 견고하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크고 비범한 일을 감당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오늘 뜨거운 열정과 비범하게 헌신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큰일에 도전할지라도 내일을 장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큰일에 도전하였다 하여 즉시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시작되어 영웅적으로 과업을 완수하고 마치게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크고 귀중한 일에 도전하는 사람의 길은 엄청난 모험이다. 마치 생존이 걸린 정글의 써바이벌 게임(survival game)과 같다. 마귀에게 처철하게 KO 패 당하고 믿음이 파선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많다. 어디에서 말도 못할 정도로 원수에게 비참하게 농락당하고 이후 오랜 동안 침울한 영적인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이는 처량한 낙오자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순진한 오산이다.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큰일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으려면 그만큼 견고해야 한다. 견고해지지 못했으면 반드시 더 기다리고 준비해야 한다. 이것도 큰 믿음의 일꾼이 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한국에서 오지와 낙도에 청년들과 함께 잠시 동안 단기선교를 약 12회 정도 참여한 적이 있다. 교회가 없는 곳에서는 교회가 개척되도록 전도하는 일에 주력했고,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불신자 전도와 어린이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남해안의 여수라는 도시에서 배를 타고 약 3시간 행해하여 도착한 한 섬 마을에서 보았던 일이다. 그곳의 성도로부터 너무나도 안쓰럽고 가슴이 미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를 태우고 간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고, 짐을 챙겨들고서 좁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힘들게 올라갔다. 빽빽하게 자란 동백나무들이 울타리처럼 두르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교회당이 나타났다. 그 교회를 중심으로 주민들에게 전도하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쓰면서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에 교회당의 입구 우편에 무언가 새까맣게 탄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서 교회의 성도님에게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책을 태운 흔적이라고 했다. 이전에 그 교회를 담임하셨던 전도사님께서 목회와 관련된 자신의 서적들을 불태운 자리라고 했다. “다시는 목회를 하지 않으리라!” ... 결단을 내리고서 신학서적들을 불태웠다고 하였다. 

그 전도사님이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하였다. 고통을 당하고 당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자 설교 자료들과 신학서적들을 불태우며 마음을 정리하였던 흔적이었다. 참으로 듣기에도 민망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의 강남에 있는 한 교회의 부교역자였고, 그 전도사님이 그곳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겪으신 영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압박과 어려움과는 좀 떨어진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기껏 며칠 동안 머물면서 전도하고 떠날 사람이 그곳에서 벌어진 그 일에 대해서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조금도 그 목회자를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고 시달리고 괴로웠으면 그랬을까? 이해하고자 애썼다. 그도 한 때는 복음과 목양에 대한 열정이 가슴에 가득했던 젊음 목회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그 외딴 섬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부분을 생각하면 그도 칭찬받을 일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곳의 현실이 너무나 험하고 거칠었던 것이 문제이다. 그 섬의 한 사람의 주민이 되고, 또한 복음의 전파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하루하루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탄은 그의 사역과 교회를 넘어뜨리기 위해 외로움, 경제적 압박, 자녀들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 사탄에 충동되어 포악하게 목회를 방해하는 사람들의 포악한 행실 등으로 그를 공략했을 것이다. 그곳에 간지 하루 이틀 만에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좌절이 쌓이고, 아픔이 계속 농축되면서 지탱할 수 있는 영적인 한계선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결국 더 이상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목회와 관련된 서적들을 모아 불을 지르게 된 것이다.  

그가 나쁜 사람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하였을 뿐이다. 그 섬에서의 영적인 리더가 되기 위해서 그는 좀 더 견고하였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여 불행을 당한 것이다. 그 거칠고 험한 곳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해 그는 더욱 훈련되고 연마된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었어야 했다. 그렇게 되지 못한 체 그곳의 사역에 도전하였던 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고 목회자의 인생의 큰 장애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큰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앞에 이러한 위기가 있다. 그러므로 비범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려면 반드시 내면이 견고해야 한다. 유순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오기가 있어야 한다. 끈질김이 있어야 한다. 그저 아침저녁으로 기도나 하고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사뿐사뿐 걷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큰일에 도전할 수 없다. 누가 큰 목소리로 반대하면 가슴이 쿵쾅거리는 유약한 사람이라면 뭔 일을 해 보겠는가? 성깔도 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저 사람 건드리면 손해다!”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혈관을 피부 밖으로 툭툭 밀어내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서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성깔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관하여서는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성격 유형을 분석하는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네 가지 유형으로 사람의 유형을 분류하였는데, 바울을 가장 강인한 “상어유형”(shark style)이었다. 사도 바울은 성격과 행동이 강인했다. 그리고 목표를 향하여 공격적으로 추진하는 사람이었고 무한히 돌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이 설정한 목적을 위해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뛰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방해가 되는 악한 자들을 만나면 물어뜯어 치워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복음을 해치는 자들을 그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바울은 차돌같이 견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들이밀고 부딪히면 세상이 깨어지면서 복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견고하지 못하고 물렁했으면 어떻게 그런 위대한 인생을 살았겠는가? 그의 견고함이 그를 세계의 역사에 가장 강력한 임팩트(impact)를 남긴 믿음의 거장이 되게 하였다. 하나님을 향하여 견고해야 한다. 고매한 인격이 우선이 아니다. 너무 인격 좋아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성격이 좋아도 믿음이 견고하지 못하고 나약하여 진리의 싸움에서 쉽게 포기하면 무슨 소용인가? 한번 반대를 만났다고 낙심하면서 상처받았다며 훌쩍이면서 집에 가는 사람의 고매한 인격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사탄으로부터 지키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믿음과 행동과 의지와 추진력에 있어 견고해야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 있다. 진리를 위해 때로는 점잖하게 악다구니를 벌이고 끈질기게 오기를 부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자들과의 싸움을 감당할 수가 없다. 신문에 협박하는 댓글이 한두 번 올라온다고 싸움을 포기할 것인가? 설교를 못하게 째려보는 사람이 있다고 주눅이 들어 설교를 포기할 것인가? 

그래가지고 뭔 일을 하겠는가? 바위처럼 견고해야 한다. 왜 자신의 인기와 이미지와 인격을 돌보려하는가?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개(일꾼)가 되어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던가? 왜 남들에게는 그렇게 가르치면서 자신에게는 그렇게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인가? 왜 믿음의 견고함을 듣기 좋은 고상한 단어와 문장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가? 누가 아침에 예쁘게 큐티하고, 밤에 자기 전에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면 저절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고 가르쳤는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0)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성경은 도처에게 우리에게 싸우는 자가 되라고 하였다. 고생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군사”, “고난”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이제부터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군사는 싸우는 사람인데, 누구와 싸운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복음을 훼방하는 원수의 군대가 없다면 왜 그런 말을 수 없이 하겠는가? 원수의 군대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쳐들어오지만 않는다면 왜 싸울 일이 있겠는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때에 분노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 발악하면서 내 뱉은 침과 그들의 피가 우리의 옷과 얼굴에 묻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성경이 보장한 적이 없다. 더러운 것에 연관되지 않고 고상하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성경에 없다. 그저 자기 교회나 부흥시키는 것이 부흥이라고 말할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시절이 너무 악하다. 도리어 우리가 고난과 모욕을 당하고 큰 낭패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이 시대의 큰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야 할 참 믿음의 음의 길이 바로 이런 길이다. 외롭고 고독한 이 가시밭길을 가면서도 찬송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정도로 견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와 같은 견고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람의 작품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 영혼이 진리의 사랑을 입음으로 영혼의 뿌리가 하나님에 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혹을 받아도 허무하게 빠지지 않고, 원수의 공격을 받아도 넘어지지 않는다. 혹시 성품과 인격은 고상하지는 못할지라도 진리를 향한 자세가 강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는 큰 믿음의 사람의 견고함의 비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들의 사정은 다르다. 더 조신하고 신중하고 예의바르고 인내하고 고상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이 없다. 하나님의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나뭇잎과 같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10)

생각과 마음과 의지가 차돌같이 견고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범하게 사용되는 하나님의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단단한 작은 차돌믿음이 되자! 하나님이 원수들이 가장 싫어하고 회피하는 사람이 되자! 원수가 조롱, 멸시, 핍박, 비아냥의 화살들이 쏘아도 맞는 순간 튕겨나가는 차돌같은 영혼들이 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시하시면서 “나와 내 교회를 위해 저것을 사정없이 들이 받으라!” ... 하시면 어느 때든지 자신있게 파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단단한 차돌믿음이 되기 바란다. 원수의 큰 무더기들을 쉽게 허무는 작은 차돌들이 되기 바란다. 많은 마귀의 강력한 조직들과 견고한 진지들을 줄줄이 무너뜨리는 차돌믿음이 되어 오직 하나님께만 크게 영광돌리기 바란다. 우리 모두 견고한 차돌믿음이 되어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는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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