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운 목사의 <길잃은 한국교회>(2)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인간이 일생 동안 지하 동굴에 묶여 있어 어둠밖에 모른다고 상상한다. 사람들은 벽에 나타난 그림자들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만일 한 죄수가 동굴에서 풀려나와 햇빛 아래로 나온다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릴 거라 한다. 그는 강렬한 빛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저 익숙한 어둠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의 눈은 결국 빛에 적응한다. 그는 현실의 광대함, 혼란에 직면한다.

그러나 그는 동굴로 돌아가면 경멸당한다. 그는 예전과 달리 어둠 속에서 보지 못한다. 동굴 속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그처럼 장님이 되지 않기 위해 햇빛을 보지 않기로 다짐한다. 플라톤은 환락의 힘, 정신을 혼란시키는 감각의 힘, 이성을 말살하는 감정의 힘을 두려워했다. 개화된 자들이나 엘리트 계급이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홀린 사람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것과 유사하게 필자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무지의 신앙인으로 살다가 한줄기 빛을 발견하고 어찌할 수 없는 힘에 끌려 성경을 탐닉하고 보니 다시는 과거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필자를 이상한 목사로 보게 되었고 나와 같이 성경을 공부했다가는 자기들도 이상한 사람, 혹은 이단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며 조심하는 눈치이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이렇게 외친다.

“내가 만들어 낸 것은 하나도 없다. 500년 전부터 줄기차게 외쳐졌던 것을 소개한 것뿐이다. 기독교 역사상 초대교회 이후 찬란하게 빛났던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청교도 시대 등을 거치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종들의 글을 다시 퍼다 나르는 것뿐이다. 나는 그들의 나팔수일 뿐이다.”

지금 한국 교계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필요하다. 신학적 지식들은 신학적 엘리트 계층에서만 소통이 되고 평신도들과 현장에 있는 목사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국교회의 수적 증가를 주도했던 인물들로부터 신학 무용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학 무용론은 교회 내 반지성주의가 기존의 교회를 무너뜨릴 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공격용 무기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 단상에서 “신학교 교수들도 자식이 병들고 죽게 되면 기도원으로 달려가더군요!”라는 식의 말하면서 신학자와 신학을 조롱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신학은 위험하다는 말도 한다.

“신학교 들어갈 때는 가슴이 뜨거웠지만 3년 공부하고 나면 다 식어져 버리고 머리만 차갑게 되어 나온다”

“신대원 1학년 때는 불이지만, 3학년 때는 재가 돼서 나온다”

이런류의 말들을 그냥 웃고 넘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 많은 목사들로부터 더욱이 대형교회 목사들의 입에서 나온 이런 말들이 “신학은 참된 신앙과는 다르다”라는 개념을 은근히 주입하기 때문이다. D. L 무디의 이야기는 많은 설교자들의 입에서 회자되었다.

“하루는 무디의 설교를 들은 한 청중이 그의 문법 실력을 지적 하면서 청중 앞에서 설교하면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무디는 ‘저도 제 자신의 문법이 틀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받은 재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문법 실력을 갖추신 당신은 그 실력으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말했다는 무디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설교자들은 이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고, 무디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신학 또는 지식은 신앙 생활에 도움을 주지 않을뿐더러 방해까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는 도구가 되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 중심에서 뜨겁게 체험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머리로만 알 뿐 심령 깊숙이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성령 충만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교인들의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은 그다지 깊지가 않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성경을 많이 아는 것, 더욱이 신학을 깊이 아는 것은 성령 충만함 받기에 방해 요소가 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성령 충만함 받기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조용기 목사의 이야기들을 조금 더 들어보자.

“평신도들이 신학을 공부하여 믿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적 수준이 높은 분들도 많이 있지만, 신앙은 머리로 깨달아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험이 중요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조용기 목사)

계속적으로 노출되는 이런 이야기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 성경으로 달려가기 보다는 삼각산으로, 기도원으로, 들로, 부르짖을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목회를 하면서 절실히 체험한 것은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만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설교자는 신학적으로 교인들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설교는 어떤 사상이나 주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 현장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체험하고 전하는 것만이 최상의 방법이요, 지침입니다 ...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신학서적을 공부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생한 삶의 현장 가운데 서서 성경 말씀에 대한 강력한 믿음과 뜨거운 소원과 기도로 체험하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조용기 목사)

그의 말대로라면 신학자들의 말이 교회 강단에서 울려 퍼지지 않도록 단속해야 할 지경이다. 신학 교수들이나 학식이 많은 자들이 설교했다간 자칫 평신도의 순수한 신앙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도대체 신학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3년 동안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이유가 단지 목사가 되기 위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위한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일까?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토양을 갖추기 보다는 기도원에 들어가 뭔가를 체험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해 낸 신학적 이론을 근거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이고 오로지 성경책 한권으로 자기 스스로 깨우치는 것은 순수한 하나님의 음성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미국의 한 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나의 절친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많이 공부했고 또 신학적인 수련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 목사, 나는 여태까지 해마다 변천해 가는 새로운 신학 사조를 따라가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소. 그러는 동안에 나는 기도 생활과 성령 충만한 삶을 등한히 해 왔고, 이제 남은 것은 메마른 뼈다귀뿐이오. 이제 다시 한 번 분발하여 참된 신앙의 길과 목회 길로 돌아가려 하오. 물론 신학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도전을 서슴지 않는 타락한 신학의 노예가 되는 것은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조용기 목사)

현대 신학의 사조를 따르는 것에 지친 것을 보면 조용기 목사의 친구 목사는 정통 신학보다는 현대 신학 쪽에 관심을 가진 듯하다. 인본주의적 신학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조용기 목사는 이 모든 것을 ‘신학’이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도전을 서슴지 않는 타락한 신학의 노예’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경을 교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알고자 하는 정통 신학에 대해 이미 타락한 존재로 정죄해 버린다면 정당한 교리가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저자의 글을 보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신학적 관점과 신앙적 관점으로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 그러나 신학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바로 하나님을 인간 논리의 틀 속에 다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온 우주를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피조물의 지성과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결코 그분은 절대적인 주권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필요 없는 것인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고하며 얻었던 ‘지혜’와 ‘체계’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학문이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학이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신학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은 특별계시인 성경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바탕으로 신학을 배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예수 전도단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신’이 아니라 ‘신앙 ’으로 받아들여야만 이 표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문희곤 목사

문희곤 목사는 “신학이란 철학, 법학, 인문학, 자연과학과 같이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고하여 얻었던 ‘지혜’와 ‘체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학문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신학에 대해 주장한 바에서 세 가지를 볼 수 있다.

첫째, 신학이란 한 사람이 만들었으며

둘째, 우리는 그것에서 ‘지혜’와 ‘체계’를 배울 수 있으며

셋째, 학문이라는 점이다.

위의 세 가지는 “신학에서 파생한 교리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좋은 학문이기에 알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신앙인으로 살아가는데 그다지 큰 문제될 일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다른 영역에서 근무하는 사역자들이지만, 한국교회 대표적인 목사들의 입을 통해서 무차별적으로 신학과 교리의 무용론을 넘어서 교리에 빠지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가 한국교회 전반에 울려 퍼지고 있다. 아마 한 명의 성도가 한 명의 목사로부터가 아닌 몇 명의 유명 목사들의 설교에서 위와 같은 것을 수차례 듣고 난 후 ‘교리, 신학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아닌 머리를 강조한 죽은 신앙이야’라고 단정짓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신앙이 순수해지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오직 성경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이야기하듯 신학과 교리는 필요 없으며 위험하기까지 한 것일까? 마틴 루터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모두에게는 신이 있으며, 문제는 어느 신을 믿는가? 일 뿐이다.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모두들 독특한 자기들만의 신을 가지고 있다. 또한 자기들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들만의 이론이 연결되어 누구나 ‘신관’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신관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신학이 꼭 필요한 것이다. 누구나 신적 의식이 있지만 어떤 신을 믿느냐로 들어가면 곧 신학이 따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는다고 반문할 수 있지만, 또 성경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관점으로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도 동일한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십계명 중 제일계명이 우상숭배 금지에 대해서 나온다. 그만큼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두 번째 계명을 망각한다. 제일계명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이지만, 제이계명은 그 하나님을 올바른 방법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비록 제일계명을 잘 지켜서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방법이 성경에서 유례하지 않으면 우상 숭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성경은 물론이요 신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그렇지만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에겐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학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 한다면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진리를 듣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성령께서 사람들을 처리하시기까지는 그들은 절대로 신학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으며 또한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로이드 존스)

신학이 없는 신앙은 성경적 신앙이기 보다는 자기의 소신대로 하는 신앙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교리와 지성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은 장차 교회 전체를 파괴하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한 것이다. 외부의 객관화된 교리 기준이 와해되었을 때, 성경을 자기의 소견대로 해석하는 것은 한결 쉬워진다.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로 축소될 뿐이다. 자연스럽게 신앙이란 자아 몰입으로 빠지는 것쯤으로 여기게 된다. 외부의 권위적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지성이 교회에서 빠지게 되자 끝없는 거짓말이 쏟아지고, 뉴에이지, 신비주의, 심리학이 재료가 되어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내적 치유들이, 밀물처럼 들어와 교회를 덮어 벼렸다. 현대 문화가 들어온 교회는 현대 문화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현대 문화는 조작된 것, 연극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으며 현실은 빠른 속도로 환상으로 바뀌어 간다. 즉, 현대 문화는 “진리가 무엇이냐?”보다는 “어떤 이미지를 줄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역시 교회에서도 분위기로 조작된 성령을 체험하게 하고, 연극적인 예배 분위기로 지성이 마비된 교인들을 빠른 속도로 현실을 잊게 하고 환상 속으로 이끌어 간다.

한국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비전’을 이야기 했다. 교회에서 마음껏 비전을 품게 한다. 비전과 환상과 욕망의 차이가 무엇인가? 아름다운 비전과 환상을 품게 한다. 비록 그것이 달성되지 않아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단지 내가 덜 노력해서, 덜 부르짖어서, 수준 낮은 믿음이어서 그것을 차지하지 못할 뿐이다.

교리와 지성을 마비시키면 영적 전쟁에서 사용될 무기를 무장 해제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성도들의 분별의 능력을 빼앗아 버려 무차별적인 이단 사상을 주입하더라도 이미 무뎌진 더듬이로는 무엇이 왜곡된 것인지, 이단 사상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해버린 것이다. 분별력을 상실시키기 위해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약 4:1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이런 성경 구절 사용을 문맥적 해석도 하지 않은 채 금이야 옥이야 사용한다. 몇몇 비판하지 말라는 구절을 이야기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아무런 판단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검증하는 것, 바른 교리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전부 옳고 그름의 문제이므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곧 검증하는 것조차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면 되는 것이지 그런 검증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을 위해서는 반드시 판단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교리는 이미 순수성을 잃었다고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이다”라고 말한다. 교리가 아니라 오직 성경이라 목 놓아 부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성경적으로 틀림에 대한 면제권은 아니다. 성경과 자세히 비교해 보면 뭔가 다른 것이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단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존재하였는데 이들과의 싸움은 말씀과 말씀으로 진행되었다. 서로 성경에 나온 말씀을 가지고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이다. 성경과 이방 종교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체계, 즉, 신학과 교리가 필수적인 것이다. 역사상 교리는 이런 이단과의 싸움을 통해 형성되어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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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