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1회)

▲ 이창모 목사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5절을 근거로, 바울은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만큼은 너무 귀중한 은사이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이 다 말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1)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마추어적인 성경 해석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다.2) 왜냐하면 이들은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적이라고 할 수 전후 문맥도 고려하지 않은 채 본문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정말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했는지 전후 문맥을 통해 살펴보자.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5).

여기서 먼저 살필 것은, 본문에 언급된 ‘방언’이 2절과 4절의 ‘방언’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같은 것이라면 2절과 4절에 언급된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5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거짓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만약 서로 다른 것이라면, 오순절주의자들은 2절과 4절을 근거로 하는 자신들의 방언을 바울이 5절에서 인정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하기를 원했던 방언은 2절과 4절에 언급된 방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2절의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방언’이다. 그러므로 이 방언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언 말하기’가 아니라 사람들과는 소통되지 않는, ‘방언으로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 방언은 교회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4절의 방언도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이므로 교회의 유익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방언기도’이다.

그러나 5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방언으로 2절과 4절의 방언기도와는 다른 것이다. 바울은 5절에서, 2절과 4절에 언급된 거짓 방언의 폐해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왜 고린도교회가 특별히 예언을 해야 하는지를, 사람들과 소통되는 정상적인 방언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5a절의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에서의 ‘방언’이 어떤 방언인지 5b절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통역 가능한 소통되는 방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통역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운다.3)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 할지라도 통역되어야만 교회를 위할 수 있는 소통되는 방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렇게 정상적인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가지고 말하는 데는 의도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 할지라도 통역하지 않으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은 교회에 유익은커녕 도리어 큰 해가 됨을 효과적으로 경고하기 위함이다.

▲ 김동수 교수(평택대)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5절에 언급된 방언들 중에 전자는 개인용 방언을 말하고 후자는 교회용 방언을 말한다고 옹색하게 설명한다. 김동수 교수는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바울이 특별히 예언하라고 한 것은 개인용 방언과 비교하며 한 말이 아니라, 통역 없이 시행되는 교회용 방언을 두고 그것 보다는 특별히 예언을 더 하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4)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후 문맥도 염두에 두지 못하는 아마추어적인 성경 해석이 만들어낸 낭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문에서 두 종류의 방언을 암시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김동수 교수는 제멋대로 방언의 은사는 개인용 방언과 교회용 방언이 있다고 단정하고, 5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방언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김동수 교수의 주장대로 바울은 5절에서 개인용 방언을 권장하면서, 교회용 방언은 통역자가 없는 경우에는 의미가 없으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말하는 교회에서는 성령이 바보가 아니신 이상 통역의 은사자도 반드시 준비하시기 때문에, 통역자 없이 방언을 말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바울이 여기서 “통역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이라고 가정법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헬라어 문법에서 가정법은 일어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지만, 그래도 만약 정상적인 방언이라 할지라도 통역이 없어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것이 되는데, 하물며 아예 통역할 수 없는 거짓 방언은 두말할 것이 있겠느냐?”라고 고린도 교회에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말하기를 원했던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고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이 아니었다. 만약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바울이 원했던 것이 방언기도였다면 바울은 교회의 덕이나 통역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기도는 아예 교회의 유익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며, 방언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굳이 통역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사람들에게 말하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방언, 즉 통역되는 외국어 방언이다. 따라서 이 방언은, 외국인을 위한 것이지만 통역되면 현지인 신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으므로 교회에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자들은 본문 5절을 근거로 바울이 방언기도를 인정했다거나 모든 신자가 다 방언기도 하기를 원했다고 말하는 것은 바울을 빙자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라면 누구든지 다 방언을 해도 좋다고 보았는가? 5절에서 우리말로 “특별히”로 번역된 헬라어 ‘말론 데’(ma/llon de)에서 ‘말론’은 ‘더 많이’(more, rather)의 의미이며,5) 부정접속사 ‘데’(de)는 ‘그러나’(but)의 의미다. 따라서 ‘말론 데’(ma/llon de)는 '오히려 더 많이'(but rather)라는 의미가 된다. 이 의미를 염두에 두고 5a절을 다시 쓰면,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특별히 방언보다 오히려 더 많이 예언하기를 원한다”가 된다.

보통 ‘A 그러나 B’라는 말은 A를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A보다 B를 더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A 그러나 특별히 더 B’라는 말은 설령 문자적으로는 A를 부정하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A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6) 그러므로 ‘A 그러나 특별히 더 B’와 같은 문장 구조인 5절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방언 말하기를 원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유아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7) 바울이 5절에서 하고 싶은 몸통 말은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가 아니다. 이것은 몸통 말을 하기 위한 머리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가 아니라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부정접속사 ‘그러나’(de,,,,, 데)를 쓴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하고 싶은 몸통 말은 ‘그러나’ 뒤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전후 문맥의 범위를 좀 더 넓혀서 5절을 다시 살펴보자. 먼저 고린도전서 12장 11절을 보면 바울은 성령의 은사는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또 고린도전서 12장 17, 18절에서도 바울은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성령의 주권적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는 혹 바울의 개인적인 뜻일 수는 있으나 성령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원했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주권적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고린도교회에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바울이 말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몸의 지체가 여럿이듯이(고전12:14) 성령의 은사도 여러 가지며, 손과 발, 다리 등의 지체의 씀씀이가 다 다르듯이 은사들의 씀씀이도 다 다르다. 이것이 교회의 지체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면 안 되는 이유이다.

신유의 은사는 병자들을 위해 필요한 은사이며, 예언의 은사는 현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필요한 은사이며, 방언의 은사는 외국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필요한 은사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면, 병자는 누가 고칠 것이며 예언은 누가 한단 말인가?(고전12:29-30) .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0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다 방언 말하는 자이겠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은 성령의 주권대로 주시는 방언의 은사를 모든 사람이 다 받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설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지체들이 다 방언을 말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몸의 지체들이 다 손이거나 발이면 그 몸이 정상적일 수 없듯이 교회의 지체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면 그 교회는 결코 정상적인 교회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바울이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말한 것은 어린 영적 수준의 고린도교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방언을 반대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면서, 사실은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예언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어디에서도 진심으로 고린도교회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바울은 곳곳에서 간접적으로 방언을 반대하다가(고전12:10,17-19,29-30; 14:5-17) 급기야 고린도전서 14장 19, 23절에 와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방언을 반대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에서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는 말은 바울의 진심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현실이 된다면 고린도교회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시작하면서 작심하고 이들에게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령했으며, 5절에서 또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므로 거듭 예언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에 방언보다 예언을 더 많이 하기를 원했는가? 예언이 아무리 교회에 필요한 은사라 할지라도 고린도 교회의 지체들이 다 예언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교회가 다 방언을 말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이 가르친 대로 성령의 은사인 방언과 예언의 가치를 저울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방언 반대자들은 5절을 근거로 바울이 방언보다 예언의 가치를 훨씬 높게 여겼다고 하면서 ‘방언’을 열등한 은사로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방언과 예언의 가치를 단순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지금 예언보다 방언을 더 선호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현지인 신자들에게는 통역해야 그나마 유익이 되는 방언보다,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이 교회에 훨씬 더 유익하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바울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외국인에게 말하고 있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인에게는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예언보다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물론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예언이 이들의 언어로 통역된다면, 예언도 방언만큼 이들에게 유익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교회에서 방언을 말할 때 왜 통역해야 하는가? 그것은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외국인들만 있다면 방언을 말할 때 통역이 필요 없고,8) 또 현지인들만 있다면 아예 방언이 필요 없으므로 통역도 당연히 필요 없다. 그런데 현지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두 다 서로 소통되는 언어가 있다면, 그 언어를 두고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하고 또 그것을 소통되는 언어로 통역하는 짓은 기막힌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도록 외국인을 위해서는 방언의 은사를 주셨고, 현지인 신자들을 위해서는 통역의 번거로움 없는 예언의 은사를 주셨다. 그러므로 외국인 없이 현지인 신자들끼리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때 방언으로 말하고 다시 통역하는 코미디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14:31)

위 본문을 보면, 바울은 ‘예언’을 ‘모든 사람’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로 미루어 예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필요한 은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방언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이렇게 묘사된 곳이 없다. 그것은 방언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종종 고린도교회의 예배에 들어오는 소수의 외국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는 무분별하게 범람하는 방언 때문에 상대적으로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가 예언을 들을 수 없는 심각한 위기를 깨달을 수 있도록, 고린도 교회의 어린 신자들에게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는 과장된 말을 앞세워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예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주변의 다른 어떤 교회들보다도 유아적이고 육신에 속한 교회였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보다도 영적 성장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예언)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결코 육신적이고 유아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9)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예언에는 무관심한 반면에, 자신의 영성을 화려하게 들어낼 수 있는, 그러나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방언에는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깊은 관심만큼 방언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은사를 받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영역이므로, 이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린도교회는 육신에 속한 유치한 신앙 수준에 걸맞게 끝내 방언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거짓 방언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 예배에서 예언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구리와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거짓 방언이 예배의 안방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고려하면, 바울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는커녕 해를 주고 있는 거짓 방언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예언을 강조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바울은 사실 예언의 중요성을 고린도 교회가 깨달을 수 있도록 고린도전서 12장-14장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은 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의 지체의 비유를 그토록 길게 늘어놓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장황하게 사랑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가? 그것은 성령의 뜻대로 교회의 덕을 위해 은사를 쓰려면 먼저 교회의 지체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성령이 그의 뜻대로 주시는 각자의 은사들로 서로를 돌아보아야 하며(고전12장). 교회의 덕을 위해 은사를 쓰려면 교회(지체들)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고전13장). 그러므로 사랑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모한다면, 다른 교회는 몰라도 고린도교회에서는 그 은사가 무엇보다도 예언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다(고전14:1).

타락한 고린도교회가 회복되어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길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 이야기를 하고나서 바로 고린도전서 14장 1절과 5절에서 고린도 교회에 ‘예언하기’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린도전서 12-14장은 ‘방언장’보다는 ‘예언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방언이 아니라 오히려 예언하기를 고린도교회에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각주 ---

1) 김우현, 하늘의 언어(서울: 규장, 2007), p.75;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p.71, 72, 113 등 참고.

2) 김동수 교수는 옥성호 형제의 방언 이야기를,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자의 아마추어적인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111. 그러나 김동수 교수도 아마추어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3) 반면에 2절과 4절의 방언에 대해서는 바울이 통역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방언은 아예 통역할 수 없는 불소통의 거짓 방언이기 때문이다.

4)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 p.94.

5)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New Testament(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p.489.

6) 고전14:19에서 ‘다섯 마디 말(A)이 일만 마디 방언(B)보다 더 낫다.’는 말도 문자적으로는 B를 부정하지 않지만, 이 말은 단순히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방언이 쓸데없다고 부정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이 방언을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이유는 유아적인 신앙 수준의 고린도 교회가 혹시 상처라도 입을까봐 염려했기 때문이다.

7) 설령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들은 예언보다 방언에 더 집착하므로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다. 이들이 바울의 가르침대로 방언을 말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방언보다 예언을 ‘더 많이’ 말하려고 애써야 한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8) 사도행전의 방언이 통역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방언은 반드시 통역되어야 하고, 통역이 없으면 집에 가서 혼자 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도행전에서 사람들 앞에서 통역 없이 한 방언들은 다 잘못된 것이 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통역 없이 방언이 행해졌다. 왜냐하면 방언을 듣는 자들이 통역 없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9) 롬10:17; 딤후3:16-17; 히4:12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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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