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비범한 믿음의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명확한 증거는 무엇일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일까?

“에이고! ... 목사님! 그걸 어찌 알겠어요! 사람으로서는 모를 일이지요!” 

그렇지 않다. 큰 믿음이 달리 큰 믿음이겠는가? 허풍이나 빈말로 얼버무려 하나님을 위해 큰일 낼 사람이라는 말을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뚜렷한 흔적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동행하시고 그를 통하여 일하시는 증거가 나타나기 때문에 그가 큰 믿음을 가진 성도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 큰 믿음이 어떻고 ... 하면 한때 TV 게그 프로그램에서 크게 웃겨주었던 “무늬만”이라는 말이 다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보통으로는 생각도 못해 볼 하나님의 큰 일이 그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의 믿음이 '무늬만 믿음'이 아니라 진짜로 큰 믿음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역시나 기도의 응답이다.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하여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의 가장 크고 분명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와 친히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가까이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고, 또한 그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께로 조율(tune)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도의 응답이 나타날 수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가까이 동행하기를 마다하시면 그의 기도에 대해서 어찌 하나님이 응답하시겠는가? 그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되어 있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시고 싶으시겠는가?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중요한 사실의 반증이다. 변명이나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기도의 응답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으면 매우 작은 믿음이거나 '무늬만 믿음'이다. 

“에휴 ... 또 그러시네! 그렇지 말하지 말아요! 남의 신앙을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예요!” 

결코 이렇게 말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 큰 믿음으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일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크게 쓰신 사람들 중에 기도하지 않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를 위대하다고 한다. 그는 선지자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이고, 하나님의 크신 역사하심이 가장 크고 장엄하게 나타났던 위대한 선지자였다. 엘리야 그 시대의 권력과 인기를 다 누리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압살하고 있던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제사장 850명과 생사가 오고가는 영적대결을 펼쳤다. 그 때문에 그들을 후원했던 이세벨이라는 역사상 가장 큰 권세를 가진 사악한 여인(임금의 부인)의 지독한 미움도 받게 되었다.   

그는 아무도 자신과 함께 하지 못하는 곳에서 홀로 850명의 사탄의 종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싸움을 시작했다. 1대 850이었다. 그러니 엘리야보다 크고 비범한 믿음(extraordinary faith)을 가졌던 사람을 역사 속에서 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구약의 인물들에 대해서, 특히 엘리야 선지자에 대해서는 큰 믿음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느끼지 못한다. 대신 “불의 종”, “능력의 사자” ... 이러한 단어로 그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그러나 엘리야는 정녕 크고 위대한 성도들이 따라야 할 크고 위대한 믿음의 본이 되는 최고의 Sample이었다. 그는 비록 혼자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시도록, 온 세상을 뒤 덮고 있던 영적암흑을 걷어내고 장쾌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도록 쓰임 받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큰 믿음의 내용이 또 있겠는가?

▲ 갈멜산에 있는 엘리야 석상

제단에 불이 임하여 제물들을 사르시는 순간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그의 목숨이 걸린 기도에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하셨다. 그래서 시대를 속이고, 부지기수의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간 850명의 우상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제단의 제물을 사르는 하나님의 불이 내리지 않았다면 엘리야가 그가 도리어 우상의 제사장들에게 갈갈히 찢기었을 것이다.

혹시 그때 기도의 응답의 불이 내리지 않고서도 엘리야가 지금처럼 영웅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었을까? 그 가능성은 0%이다. 그랬다면 아마도 그는 “용기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정말 동행해야 합니다!” ...라고 설교할 때에 쓰여지는 좋은 예화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크고 귀한 일에 실질적으로 써 주시는 것, 당신이 하나님의 일에 도전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 그 일이 성취되기를 위해 당신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어려운 현실 속으로 나타나는 것, 바로 이것이 당신을 큰 믿음의 사람으로 끌어 올려주는 하늘의 손이다. 다른 것은 없다. 말로는 안 된다. 폼으로도 안 된다. 

“진정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기도의 자리를 찾으십시오!”


요즘 이런 말을 잘하는 좀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감성적 말장난으로 세월을 죽일 것인가? 언제까지나 그런 마약성 언어의 유희를 즐기면서 인생을 낭비할 것인가? 이런 말들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자주 말하는 사람들의 신앙의 이면을 보면 뭔가 좀 이상하다. 허황된 영적코드에 믿음이 조율되어 그릇된 자부심과 야리야리한 감성이 충만하다. 좀 심히 말하자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무익한 영적 아편의 늪에서 허우적이고 있다. 실상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통하여 일하시는 흔적과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은 눈을 씻고 찾아 보아고 없는데, 뭔가 크게 되고 있는 것처럼 혼자만 느끼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도구가 되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중요한 일을 위한 기도와 마음의 염원을 품고 살아가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손길이 미쳐 자신에게 그 일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기쁨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명확한 큰 믿음의 흔적이다. 

선명한 기도의 응답을 경험해 보지 못하였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하셔서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어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기도하지 않았거나,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도전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를 즐거워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당신을 통해 나타나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을 통하여 일하시는 흔적이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마도 당신은 하나님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기도제목을 붙들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저 당신의 바램과 욕망과 이익의 수준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겼을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혹시 이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보라! 어떤 교회에 매우 이기적인 청년이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만을 생각하고 타인과 교회의 형제들을 전혀 생각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지도하는 목사님께서 고심하다가 하루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권면하였다. 

“형제님! 형제님은 늘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 같아요! 남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을 배우시면 믿음이 더욱 깊어지시고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목사님은 그 청년이 기도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목사님은 그 청년의 기도의 지경이 교회와 다른 세계로 확장되었기를 기대하고 잠시 들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더욱 놀래서 자빠질 뻔 했다고 한다. 

“하나님 저의 하나뿐인 남자 동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제 동생에게 예쁜 형수를 보내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육적이고 이기적인 기도로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유형의 기도를 들으실 때에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일에 겁 없이 도전하여 승리를 경험하는 성도들은 기도가  다르다. 자기의 마음의 욕심을 채우는 기도가 아니다. 그렇게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큰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울리는 기도제목을 먼저 붙들었던 사람들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라고 하셨다. 그러면 그 외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알아서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바르게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쉬운 것들을 위해서 힘써 구한다. 더 많은 기도의 비중을 그쪽으로 쏟아 부어진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일을 조금 구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일하시는 그 엄청난 기쁨을 맛볼 수 있겠는가?  

▲ 존 낙스(1513-1572)

역사상 큰 믿음의 사람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를 보자. 괜히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크게 역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조국 스코틀랜드의 교회에 참 복음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그 마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마음을 울렸던 것이다. 자신의 어떤 일보다 참 복음이 조국의 동포들에게 전파되기를 소원했고, 오직 그 일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그의 기도가 벌써 달랐다. 

“주여!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게 죽음을 주소서!” 

죽어가는 조국 영국의 신앙을 새롭게 회복시킴으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이 영국에 뿌리 내리지 못하게 막아 인류의 역사를 지킨 존 웨슬리(John Wesley)도 하나님께 너무나도 크게 쓰임받았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도 하나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하나님! 온 세계를 저의 교구로 만들어 주소서!”

웨슬리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큰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가 다르다. 그들의 기도가 비범했던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언젠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가 달랐고, 또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 풍성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남으로 억지가 아니라 저절로 모두가 인정하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큰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들의 필요와 목적을 우선시하지 말고 하나님의 필요와 목적을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기 위해, 하나님을 더 경배하기 위해,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지옥 가는 영혼을 더 많이 구원하기 위해, 더 거룩한 삶을 살기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넘치도록 드러내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죠지 뮬러의 기도에 5만 번씩이나 응답하였겠는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사탄의 충복들과 담대하게 싸웠던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도 그런 원리가 작용했던 것이다. 엘리야가 타락한 이스라엘을 흔들어서 마귀와 우상으로부터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소원했기 때문이다. 그때고개를 무릎 속으로 파묻고 기도했던 엘리야의 마음에서는 일점의 불순함이나 세속성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이 땅에 큰 믿음이 사람이 많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을 기도 하더라도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기도를 드리기를 힘쓰면 큰 믿음의 길이 열릴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기도로 하나님과 잘 소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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