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양호 선교사(우간다)

약20년 전 선교사 초기에 남아공에서 예수영화를 통해 초중고 학교를 순회하며 약420여회 복음을 전하였다. 어느날 아침 이미 약속된 한 초등학교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출발을 하였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예고 없는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열악한 시골학교라 교실 칸막이를 뜯고, 책상을 모두 밖으로 들어내고 걸상을 다 채운 후, 까만 비닐로 유리창을 다 막고 스크린을 설치한다. 마지막으로 발전기를 돌려 영화를 상영하게 되는데 비가 계속 온다면 문제가 커진다. 차를 몰면서 좀 불평스런 말로 소리질러 기도했다.

“하나님! 오늘 이 학교는 특별히 믿음 좋은 교장이 학부형들까지 다 초대하여 멋진 복음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비가 오면 어떻해요?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셨지요? 이 정선교사가 엘리야만 못한 게 뭐가 있나요? 당장 비를 멈춰주세요!”

제정신이 아니지만 아주 건방지게 화를 내면서 기도하였다. 우리 차가 학교에 도착할 무렵 비가 멈췄고,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모두 예수 영화를 보고 복음을 듣고 결신하는 기쁨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억수 같은 소낙비는 계속 되었다. 즉시 현장에서 응답을 체험한 기도였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 성숙하지 못한 기도일지라도 우리 주님은 들어주실 때가 있는 것 같다. 요즘은 기도가 간단하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합력하여 선(좋은 것)으로 바꿔치기 해주실 줄 믿고 지혜주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나의 기도 스타일이다. 목사님은 영적 체험이 있으신가요? 라는 글을 쓰면서 기도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정리하였다.

I. 한국교회에 침투한 이방 영성의 기도 파편들

Babbling방언 기도(방언이 아님)가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직통하는 신비적인 효능(?)이 있다면 아마 우리 주님이 솔선수범하여 본(本)을 보여 주시면서, 또는 샘플을 주시면서, “너희들도 기도할 때 나 처럼 기도하라”고 했을 것이다. 십자가 수난을 앞 둔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1~42)라고 기도하셨다. 함께 동행 했던 제자들이 그들의 분명한 의사소통 언어(言語)로 알아들을 수 있었고 후에 복음서의 기록으로 선명하게 남길 수 있는 기도를 하였다.

미국 교회는 교단 별로 이 Babbling기도 방언에 모니터링를 하여 비성경적인 현상에 대해 공식적인 금지를 하는 등 그 문제점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P. Robertson, The Final Word ) 특히 보수계의 대표격인 죤 맥아더는 진즉부터 이 방언의 무용론을 외쳐왔다.

현재 한국교회나 신학교는 전체적으로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Babbling 방언기도 예찬론 또는 옹호 동조론이 절대 대세이다. 이에 반대하는 말을 하면 성령을 훼방 죄, 교만 죄, 방언의 은사를 주신 성령 무시 죄, 지식으로만 판단하려하는 율법주의 판단죄... 등등 여러 죄목으로 아예 이단의 굴레를 씌우려고 한다. 성령의 지혜주심과 귀를 열고 닫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방언 검증을 하라”고 하신 동일한 하나님 말씀 앞에 오늘도 Babbling 신비방언 기도자들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취사선택을 해야 함은 필할 수 없는 성령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Babbling 방언 기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인지, 사탄으로부터인지, 심리현상이나 습관적인 기도인지 고민하려고 하지 않으려는데 그 이유를 영적 병적 중독 현상으로 진단한다. 차제에 한국 기독교 안에 침투한 몇몇 이방 영성의 기도 파편들을 모아 보았다.

A. 영빨, 기도빨

“언니, 기도원에 다녀왔어.”
“그래 기도빨 잘 받았나?”
“내 기도 빨이 먹혀”
“그 목사님 영빨이 남달라”
“영빨 충만”

방금 한국에서 걸려온 카톡의 한 대화였다. 소위 영적 은사로 인해 일어나는 방언, 치유, 축사 같은 기적적 현상을 표현하는 완곡어법으로 받아 넘기기에는 너무 노골적이다. 기도에 대해 어떻게 배웠으면 저런 말이 술술 입에서 나오는지 기가차고 매가차고 순사가 칼을 찰지경이다. 영빨이니 기도 빨이 다 뭔가? 영력이 넘치니까 영빨(발)이고 약효가 빠른 보약과 같이 기도의 효험이 좋아 기도빨(발)이라고 말한다.

“그 스님의 영빨이 대단하셔”
“기도빨’
“영빨 타임”
“영빨산“
”영빨기도원“ 과 같은 말들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나 이방종교의 영향권에서 흔한 말이지만 결코 성경적인 말이 아니다. 이런 표현은 다 이방 종교인들의 표현법이요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저질스런 말들을 삼가해야한다.

B. “하나님이 나에게 말했다”는 직통계시화법(直通啓示話法)

작년 말 선교사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차안에서 잘 아는 교회의 부흥 강사로 왔었다는 분의 설교 테이프를 잠시 들었다. K간사라는 이분도 역시 말끝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했다“라고 특유의 직설 화법이 귀에 거슬렸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만 특별한 비밀 정보를 제공해줘서 그렇게 했더니 성공(成功)을 했다는 그런식이었다. "기도 해보고~" ... 기도가 무당 수준이다.

항간에 직통 계시를 말하는 ”예수전도단(YWAM) 선교사들의 특허품(特許品)” 으로 마치 신앙의 상대성이 적용되는 것처럼 말하고, 그의 말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럴듯하게 말한다. 만약 이에 문제점을 제시하려한다면 마치 하나님의 메시지의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문제 삼거나 하는 듯한 죄책감을 일으키게 하고, 나는 들었는데 상대방은 너는 왜 듣지 못하나 하는 우월감(優越感)을 은근히 과시한다. 하나님 말씀이 오늘 여기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는지 깨달음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그것이 마치 나에게만 직접 말하는 직접 계시인양 인상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 화법을 빙자하여 자기 의를 과시하는 허세(虛勢)의 한 수단일 수 있음에 경계해야 한다.

C. 선포기도

남아공 East London 시의 한 중심가 어느 가정 교회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특별 기도집회가 열렸다. 나이지리아에서 왔다는 흑인 목사는 “Satan! go out in the name of Jesus!”를 하루 종일 방언하듯 외치는 기도하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떠들었다. 두란노에서 발간한 “선포기도“라는 이책은 Steven Furtick이 쓴 책이다.

"기도의 무기력증을 걷어차고 대담하게 기도하라."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도록 기도하라"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참여하라. 불가능은 있다 그러나 불가능은 없다!"
"이 시대의 여호수아가 되라!"
“태양아 너는 기드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 10:12)라고 예시한다.

어떤 분은 선포기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은이 마음 움직일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관계가 온전케 될찌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관계가 온전케 회복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선포기도를 하루에 3~4번 정도 했습니다. 선포기도가 제게는 힘들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듣고 하루에 100번 이상 선포기도를 할 것입니다. 더 확신가운데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행하실 놀라운 이루심을 간증하러 다시 오겠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선포하라.“

이것은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에서도 이미 이야기한 바 있듯이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믿음의 언어인 4차원의 레마(Rhema)로 선포하면 그 믿음의 선포(宣布)가 꿈을 성취(成就)시켜준다고 믿는다.

한번은 ”축복 씨크릿“ (1. 선포의 법칙 2. 바라봄의 법칙 3.감동의 법칙)이라는 글을 계속 올리던 베트남의 K선교사와 한번 펫북 논쟁을 벌였었다. 이것은 나의 20대의 신앙생활을 통째로 사로 잡아먹어버렸던 변태 심리학 그 자체이다. 비성경적, 비윤리적, 비양심적, 비신앙적으로 흘러가면서도 세상적 욕망충족(慾望充足)이라는 실제 눈에 보이는 매력(魅力) 때문에 돌이키기 힘드는 중독성 마력(魔力)이 분명히 있다.

D. 주여 3연창 (連唱, 連呼)

오래 전부터 한국교회에 왜 큰 소리로 “만세 3창”처럼, “주여 3창”을 하고 통성기도를 들어가는 것이 보통 기도의 관례이다. 죠킹이지만 한번 부르면 별 효과가 없고 세 번이 효과적이라면 10번이고 100번이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항간에 혹자는 다니엘서 9장19절에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의 구절과 성부, 성자, 성령님의 3위 일체를 각위(各位)마다 지칭하여 부르는 것이라고 하는데 정당한 근거라기보다는 억지에 불과하다. 이것은 자칫 바알 선지자들이 발람을 부르거나 무당들이 펄펄뛰면서 신을 부르는 주문처럼 무속적 미신적(巫俗的,迷信的) 행위가 되어 소위 강신(降神)을 부르는 종교적 절규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왕상 18:26-29) “은밀한 중에 기도하면 은밀한 중에서 들으신다”는 주의 말씀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마 6:6-8)

E. 통성기도

아프리카 교회도 이 통성기도를 아주 좋아한다. 한번은 통성기도가 자칫 기도의 혼란을 준다고 판단하고 우리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서 통성 기도를 배제하였다. 그 대신 한꺼번에 3~4명을 지정하여 기도 제목을 각각 따로 주어 대표 기도를 하도록 하였는데 처음에는 통성기도에 익숙해졌던 분들 중에는 돌림 대표기도가 신이 덜 난다고 불평하는 교인들도 있는 것을 보았다. 1907년 길선주 목사의 평양 대부흥운동 때 시작됐다는 이 기도 스타일은 주여 3창 이후 바로 이어지는 기도 형태이다. 주로 저녁과 새벽 집회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기도 양식인데 " Korean prayer style, One cord prayer"라고도 한다.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이 명박 대통령이 무릎을 꿇고 통성기도에 참여하는 뉴스가 전파를 타고 구설수에 올랐던 기도이기도하다. 이곳에서 통성기도에 처음 참석한 한 초신자는 엠프의 큰 음악 속에 신자들이 손을 들고 큰소리로 울부짖는 기도에 쇼킹하여 다시는 그런 집회에 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다. 이 통성기도를 할 때 남의 기도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남보다 더 큰소리로 자기 소리만 들리게 해야 하는데 그럼 목소리가 적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남이 듣든 말든 자기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이기적(利己的)인 생각으로 뭉친 사람은 별문제 없겠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배려를 하는 사람이거나 남의 큰 목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 목소리가 아예 기어 들어가 버리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떠드는 데서 집중 기도 훈련을 하여 믿음이 강해져야 엑스터시에 빠지기도 하고, 방언기도도 받고 다른 은사도 받는다고들 하는데 성령님이 이렇게 요란한 것을 더 좋아하시는 분이신가? 나만의 생각일까?

II. 주님은 비디오를 주지 않고 책(written revelation)을 주셨다.

이 시대는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이다. 최근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The Boy Who Came Back From Heaven”)의 저자 알렉스 말라키(Alex Malarkey)가 “천국 얘기는 내가 만들어 낸 것” 양심선언을 하였다고 한다. 2004년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알렉스는 충돌시의 충격으로 전신마비가 되었다. 사고로 2개월간의 혼수상태에서 천국을 체험했던 경험을 담은 책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을 그의 아버지인 케빈 말라키와 공동저술 하여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었다. 알렉스 말라키는 “나는 죽지 않았었고, 천국에도 가지 않았다. 내가 천국에 갔었다고 말한 것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쓸 때 나는 성경을 한번도 읽어본 적 없다. 사람들이 거짓된 이야기로 이익(利益)을 얻었고 거짓이 계속되었다. 성경을 충분히 읽어야 한다. 성경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은 그 어떤 것도 무오할 수 없다. 이 책이 계속해서 판매되고 있는 것이 수수께끼 같고 괴롭다.”라고 뉴스를 탔다. 
(http://www.christiantoday.us/)

이 기사는 약 25 여년전 국내외에 “내가본 천국”이라는 간증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펄시 콜레(Percy Collett)를 떠올리게 하였다. 당시 펄시콜레를 초청하여 집회를 했던 그 교회는 그의 비성경적 황당한 내용 때문에 집회를 완전히 망쳤다는 소문이 떠돌았었다.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지도자들이 온갖 거짓으로 중상 모략하여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뒤흔들면서 그의 가르침과 리더십에 의문을 갖게 하여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 심각성이 이루말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철없는 어린애 같은 교인들을 위해, “무익하나마 (useless)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 하리라.” 라고 고린도교회의 영적 혼란을 수습의 일환으로 무려 14년간 꼬불쳐 숨겨두었던 영적 체험을 아주 조금 털어 놓는다. (고린도후서 12:1~5) 아마 하나님은 바울이 복음 때문에 받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에도 좌절하지 말고 그의 미션을 수행하라고 격려하기 위해 직접 하늘나라의 상급의 단편을 미리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 총신 교수였던 신성종 목사는 “내가 본 지옥과 천국”을 간증하고 다닌다. 꿈을 꾸는 중에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한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간증한다는 그의 태도에서 이미 사도 바울과 같은 지도자의 기본자세와 거리가 한참 멀다. “테레사 수녀가 천국에 있다.”는 그 한 마디만 봐도 그의 간증은 가짜배기이다.

공립학교 순회 예수 영화를 상영하면서 과연 이 사역을 주님이 받으시는지 궁금하였다. 학교를 컨택하고 날짜를 정하고 정규교과시간을 특별활동으로 할애 받아 복음을 전하는 역동적인 사역이지만 아무리 애쓴 다해도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전도를 마치고 시원한 나무 그늘에 차를 파킹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아주 부드럽고 감미로운 팔로 나를 번쩍 안고 하늘로 훨훨 올라갔다. 이 황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의 사역을 기뻐 받으신다는 확신을 더 갖게 되었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꿈을 원치 않았다. 주관적인 영적 체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여 받은 것임으로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신 방언 Babbling이라고 금이야 옥이야 붙잡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방 종교 영성에도 얼마든지 있다는데, 만약 그 Babbling이 사탄이 준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고 하였다.

여기는 시험하라는 말은 검증(檢證)하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방언 현상, Babbling이든 Languages이든 통역을 통해 모니터링을 함으로 철저히 검증하라고 명령한다. 항간에 방언Babbling 옹호자들 가운데 한결같이 이런저런 변명을 하면서 검증(檢證)하라는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거역하기도하고, 또 다른 편에서는 Babbling 무지로 속아 허비된 세월을 개탄하며 쓰레기처럼 버리는 두 반응이 보인다. 주관적으로 본 것, 체험한 것은 자신만의 어떤 확신도 줄 수 있지만 자칫 그 확신 때문에 말씀의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데 방해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비디오를 주지 않고 그 책을 주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III. 이른바 Babbling 신비방언기도, 이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해야 하는가?

나는 오래 전부터 방언의 해석이 여러가지 이유로 상당히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리할 기회가 없었다. 이른바 Babbling 신비방언기도, 이것을 방언이라고 해야 하는가? 은사라고 해야 하는가? 그 문제가 무엇인가? 붓 가는대로 쓰기 어려운 잇슈를 나름의 체험을 섞어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미 여러 목사님들의 각고와 영적 통찰력으로 많은 성경적인 자료와 임상 실험의 자료를 내놓았고 여러 바른 믿음을 탐구(探究)하는 선각자들의 용기있는 비판이 많이 있다. 이 자료들이 모두 완벽한 자료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현장 임상실험 연구는 박수 받을 만하다.

이제 한국 교회가 응답을 해야 할 차례이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그 교회 전통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현 한국 교회는 보수니 진보니, 개혁주의니 뭐니 할 것 없이 이 카리스마틱 파도 속에 휩쓸려 고린도교회의 침몰 직전의 안타까운 상황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 잇슈는 두 형태로 첫째로 언어(Languages)의 은사가 주님 재림하는 그날까지 성령의 직접 터칭이나 임파테이션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 그 하나이다. (고전13:12) 그런데 웬일인지 성경이 말하는 방언, 진짜 언어(방언, Original languages) 은사는 논외로 어디론가 아주 멀리 사라지고 언어가 아닌 옹알이 Babbling 기도 은사가 이 언어 (방언)의 은사를 대표하는 양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즉 계시적 표적이었던 방언이 (고전14:22)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반화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가끔 (신)사도 (New Apostles)아저씨들도 출현하여 사도들이 했던 것과 같이 동일한 이적, 표적의 역사가 나타나 사실 성경적 표준이나 마찬가지라고 큰소리를 치는 입장이다. 방언 예찬자들은, “보라, 세계 교회가 다 시들어 가는데 현재 양적으로 부흥하는 교회, 뜨거운 영적 역동적인 신자들, 교회들은 전 세계적으로 단연 카리스마틱 교회 뿐" 이라고 말하고 또 아무리 성경말씀만 강조해봤자 성경만 가지고는 안 되고 두날개, D(G)12, 셀, 알파코스 등 뭔가 직접 눈에 큰 그림으로 보이는 화끈한 것을 해야 생동감 있는 목회, 성공적인 목회를 유지하는 목회적현실(牧會的 現實)이라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 기록 계시, 정경(cannon)의 완성으로 그 절대성(絶對性). 충분성(充分性). 최종성(最終性)으로 문제의 표적 방언의 은사는 끝이 났다고(고전13:8) 주장하는 양측이 팽팽한 접전을 벌리고 있다. 외국어 방언 은사가 오순절 때처럼 갑자기 임하냐 아니면 교회 방언 학원이나 체면술사에게 공부해서 하면 안 되는가? 은사는 구해야 하지만 표적 은사를 구한다고 문제가 되는가? 어떤 표적이나 기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계시적인 정경을 대치해도 된다는 말인가? 성령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적으로 인도하시는가 아니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그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가? 바울은 방언 금지라고 푯말을 간단히 써 붙이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길게 설명했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이 멈출 줄 모른다.

성경은 분명하게 방언 언어(Languages)의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sign, 증명, 증거하는 도구나 수단)”적인 은사라고 깨끗하게 정의한다. (고전14:22) 당시 지중해 연안에 4000여 공용어 방언이 산재하는 미전도 종족을 향해 복음을 외치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때를 따라 입을 열어 역사하셨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 지금도 그런 역사가 있는가? 앞으로 어떤 성령의 특별 역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또는 구체적인 세계 선교계에 그런 정보나 통계를 찾기 힘들고, 선교사를 훈련할 때 성령의 직접적 터칭에 의한 언어 은사 체험이 아니라, 선교필드의 언어학교(Language School)에서 일정기간 기본 공용 언어 훈련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선교사 훈련의 기본 상식에 속한다. 결국 취사선택(取捨選擇)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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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호 선교사는 고신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았으며, 현재 KPM(고신총회세계선교회)와 NGO Good Partners(김인중 목사, 이사장)의 파송을 받아 우간다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천주교와 오순절 운동 신학 류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성경적 복음을 우간다의 원주민들에게 전하고자 애쓴다. 우간다의 낙후된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복음과 함께 의료 봉사로 영혼들을 섬기고 있고, 늘 기독교의 세계적 동향을 살피고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