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의 칭의와 성화 6

▲ 김세윤 교수

김세윤은 고린도전서에서 ‘의’(義, 1:30)라는 단어, 세례 때 의인으로 칭함 받음(6:11), 율법에 대한 부정이 두 번 등장한 것(9:19-23, 15:33-57)으로 제시했다(148쪽). 그리고 고린도후서에서 칭의론에 대한 가르침이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했다(148쪽). 모세를 통해서 준 옛 율법의 언약과 그리스도를 통해 준 새언약을 성령의 사역이 의를 주는 사역이라고 했다(148쪽).

김세윤은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가 모두의 대표/대신 죽은 것과 죄를 위한 속죄제사로 의인이 되는 사건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하나님 나라)로 회복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149쪽).

김세윤은 칭의 이해에서 바울 상태를 모범으로 제시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음으로 의인이 된 것으로 제시했다. 깨달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아담적 인간에서 새로운 인간 상태가 된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대속적 죽음의 의미를 알고 믿어 새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다(149쪽).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을 나타내는 ‘그림 언어’라고 했다(150쪽). 김세윤은 ‘그림언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림언어’는 metaphor로 은유법(隱喩法)이다. 그런데 ‘은유(隱喩)’라 하지 않고 ‘그림언어’라고 한다. 해석학에서 은유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매우 어렵다. 일반적 개념으로 은유는 보조관념을 사용하여 본래의미을 더 쉽고 명확하게 드러내는 문학기법이다.

김세윤에게 칭의와 성화는 그림언어이고, 본래 의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짐이다. 하나님과 관계라는 것이 매우 어렵거나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은유로 성경에서 칭의와 성화라는 단어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관계로 수 없이 강조하고 등장하고 있다. 김세윤의 이해를 따르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근본의미는 칭의, 성화, 의, 세례를 제외한 다른 성경 단어가 있다면 좀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칭외와 성화가 동의어인 것처럼, 의, 세례도 모두 동의어가 되기도 해야 한다. 김세윤 교수가 사용하는 독특한 언어 중 하나인 ‘그림언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은유’를 한글로 풀어 놓은 것이 불과하다. 일반 언어인 ‘은유’라고 했으면 훨씬 더 이해와 접근이 쉬었을 것이다.

김세윤은 죽음의 궁극적인 원인을 ‘사탄의 통치’라고 했다(153쪽). 사탄이 율법을 이용해서 죽음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근거한다고 했다(153쪽). 김세윤은 유대신학자였던 바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선언하였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세력을 무찌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제시했다(154쪽). 그리고 이 죽음은 마지막 날에 최종적으로 제거되고 영생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154쪽). 이렇게 사탄의 나라를 무찌르는 것은 묵시적 틀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154쪽). 예수가 사탄의 세력을 궤멸했기 때문에 아들의 복음이 칭의의 복음이라고 했다(155쪽).

그러나 성경에서 죄의 궁극적인 원인은 ‘아담의 범죄’, ‘인간의 범죄’이지 사탄에 게 원인이 있지 않다. 사탄은 종이기 때문에 원인과 결정을 할 수 없다. 죽음의 원인이 마지막 날에 제거된다면 지금 죽은 사람들의 죽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그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신학은 전체가 유기적으로 관련을 갖고 있지 파편으로 옳음을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김세윤은 죽음을 말하고, 마지막 심판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현재 죽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먼 뒤의 미래일도 중요하지만 현재 발생하는 죽음 상태에 대한 제시도 중요하다.

김세윤 교수에게 현재 죽음 상태에 대한 이해는 없다. 뒤에 등장하지만 신자의 ‘타락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경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김영한 교수도 그러한 견해를 반복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두 견해를 제시하는 혼란을 일으키는 말씀이 아니다. 김세윤 교수는 일관성의 원리(사본학이라고 하지만)를 갖고 성경 본문을 개인 자격으로 재단(裁斷)하여 여성 안수를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에 타락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두 견해가 공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학문에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다.

김세윤의 견해를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사탄의 세력을 궤멸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것은 선취적 사건이다. 그리고 구원은 마지막 날까지 유보되었고, 마지막 날에 십자가의 믿는 자들을 예수가 중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보의 범위와 중보의 결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포괄적 구원, 보편구원, 선택구원 등). 그리고 마지막이 되기 전에 죽은 사람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김세윤은 칭의론이 등장하는 범위를 브레데, 슈바이처(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와 다르게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 후서에 나타난다고 주장했다(155쪽). 새관점 학파는 슈바이처의 견해를 계승해서 바울 후기 서신에 칭의 논쟁이 형성한 것으로 제시했다(155-156쪽). 김세윤은 새관점 학파 견해를 수정하도록 제시했다(156쪽). 김세윤은 탁월한 유럽 신학자들에 대해서 탁월하게 자기 견해를 제시했지만 결국 그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고 더욱 공고하게 했다.

김세윤은 예수가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형성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칭의론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는 주권의 전이의 그림언어이다. 왜 더 쉬운 ‘주권 전이’라는 개념을 놓고 어려운 ‘칭의 개념’을 그림언어로 사용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칭의’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하나님 나라로 주권이 전이’ 되었다고 명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한 신학이 될 것이다. 독자들도 더 쉽게 김세윤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칭의와 성화를 그림언어로 사용해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주권 전이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십자가’도 결국은 종말에 일어날 심판에 대한 ‘모형적인 사건’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선취적 사건’이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선취는 미래 최종에 대한 시작이고, 현재는 선취와 미래 최종(종말) 사이에 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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