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 7

김세윤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정의했다(159쪽). 앞에서는 ‘깨닫는 것’이라고 제시했다(149쪽). ‘받아드리는 것’과 ‘깨닫는 것’은 동의어이고, 인간의 전적 자기능력이다. 깨달아야만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을 유입(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세윤에게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과 부활’인데, ‘이 내용’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불트만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159쪽).

그리스도의 대신적/대표적 죽음을 받아드리는 것, 내포된 안에서 연합이 실제로 발생한 것이다(159쪽, 참고,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두란노, 63-69). 김세윤은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은 “예수가 주이시다”고 고백한다고 한다(160쪽). 필자는 서철원 박사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것과 대조시켰다. 김세윤의 문장은 “예수가 주이시다”이다(160쪽).

두 신학자가 신앙고백에서 차이를 갖고 있는데, 믿음의 대상을 고백하는 것과 믿음의 내용을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 고백은 종교적으로 존재론적이고, 내용 고백은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이다.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김세윤은 명료하게 믿음의 대상은 제시하지 않는데, 내용전개를 보면 ‘일신론적 창조주 하나님’으로 볼 수 있다. 예수가 ‘일신론적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유일한(탁월한) 존재’로서 ‘주’라는 것이다.

김세윤의 사상은 유럽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수준이다. 기독교의 ‘주’는 70인역 ‘퀴리어스’를 고백하는 것이 전통인데, 김세윤은 간접기독론으로 사용한다. 간접기독론에서 예수는 실제 ‘주’가 아니었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자들의 고백에 의해서 상승된 수준으로 이해한다. 신학훈련에서 어휘사용은 명확하게 자기 개념을 정립해야 타인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김세윤은 세례 때부터 정식으로 믿는 자가 된다고 규정했다(160쪽). 세례에서 하나님 나라로 이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고백하여 극으로 표현하면, 의인으로 칭함을 받고(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사람), 의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으로 제시했다(161쪽).

김세윤은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법적 허구(legal fiction)’로 비판 받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한다(162쪽). 종교개혁 칭의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김세윤은 올바른 관계를 그리스도를(가르침)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했다(162쪽). 순종은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고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길을 가려는 삶의 지향성, 삶의 방식으로 제시했다(164쪽). 이러한 구체적인 모습은 노예해방, 양성평등 등으로 제시했다. 김세윤에게 순종은 외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만 제시할 뿐, 내면에 관해서는 제시하지 않는다.

김세윤이 제시한 세례 이해를 보면, 정작 본인이 어떤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실재 그리스도인은 자기 구원의 시작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세례는 믿는 자에게 주는 것이지 세례 받은 후에 믿는 자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세례 받은 후부터 믿음이 시작한다는 견해는 신자됨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세례는 실재 일어난 구원에 대해서 믿음 고백의 외적 고백 형식을 따라서 교회에서 행하는 예식이다.

그런데 김세윤은 세례를 ‘연극’으로 비유하며 제시한다. 세례는 ‘연극’이 아니라 ‘예식’이다. 연극은 픽션이고 가상 세계이지만, 예식은 실재 구주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다. 마치 결혼과 유사하다. 혼인은 약혼하고 혼인을 약속했어도 정식 부부 관계가 시작한 것은 아니다. 부부 관계는 혼인식이 뒤에 비로소 시작한 것이다. 혼인은 사전에 혼인 약속에 근거해서 형식적인 예식에서 서약한 뒤 부부 관계에 들어간다. 혼인식은 연극이 아니고 예식이다.

교회 목사의 위임식도 유사하다. 위임목사로 청빙이 되어 부임을 했어도 실제 위임목사의 효력은 위임식 후에 발생한다. 그때 위임식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예식이다. 혼인이나 위임은 법적 파기가 없다면 절대로 그 관계는 깨지지 않는다. 세례도 동일하다. 그런데 김세윤은 종교개혁의 칭의를 법적 허구로 제시하면서 세례를 제시했다. 허구, 연극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형식적인 절차 없이 깨질 수 있는 구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김세윤은 세례를 피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연극’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세례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됨이 시작한 것으로 제시했다. 형식적인 세례로 비형식체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으로 가입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며 세례로 가시적인 교회의 지체(회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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