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 왕 중 가장 극악한 왕이었던 아합은 바알 숭배자 시돈 사람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한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다(왕상16:29-33). 왕상18:19을 보면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이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다는 표현을 통하여 당시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국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세벨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국가 종교가 된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방해가 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없애버리는 일에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얼마나 극에 달했던지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아합의 선지자들과 대결하기 전 백성들에게 했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시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백성들가운데 누구도 엘리야와 함께 여호와의 편이라며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미 바알과 아세라 종교가 국가종교화 된 시점에 엘리야 편에 섰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로 그 때 아합의 궁내대신 오바댜가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자로서 여호와의 선지자 일백 인을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식량을 공급해주었다. 여호와신앙이 뿌리째 뽑혀 버릴 뻔 했지만 주께서는 이렇게 특별한 은혜로 자신의 백성들을 지켜주셨다. 이뿐 아니라 “나만 홀로 남았다.”고 절망가운데 하소연하던 엘리야에게 주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 맞추지 아니한 칠 천인을 남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그를 격려해주셨다.

그러나 한편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끊임없이 방해했던 대적들이 있었으니 바로 산발랏과 도비야였다. 이들은 온갖 음모와 중상모략으로 느혜미야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백성들 가운데 암몬 사람 도비야와 동맹한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때에 유다의 귀인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도비야의 편지도 저희에게 이르렀으니 도비야는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도비야의 아들 여호하난도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의 딸을 취하였으므로 유다에서 저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저희들이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또 나의 말도 저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항상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느6:17-19).”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의 삶을 위협하는 도비야에게 자신의 딸과 아들을 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유다의 귀인들, 지도자들이 도비야와 동맹하며 그의 선행을 느혜미야에게 말하고, 느혜미야의 말들을 그에게 전함으로 결국 느혜미야를 위협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이적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느혜미야 13장에는 더 기가 막힌 사건이 소개돼 있다. 느혜미야가 BC433년 아닥사스다 왕을 알현하러 간 사이에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큰 방을 하나 마련해주었다. 원래 그 방은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과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를 저장하는 공간이었다. 이 일을 느혜미야가 페르시아에서 돌아오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하나님의 전의 구별성을 지키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제사장이 어떻게 거룩한 성전에 이방인, 그냥 이방인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심각하게 위협했던 자를 위하여 성물들과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를 저장하던 공간을 내어줄 수 있었을까? 이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오늘날 교계뉴스를 보면 오바댜와 같이 자신의 지위 뿐 아니라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각오를 하고 헌신하는 일꾼들보다는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이 산발랏과 도비야와 동맹을 맺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성전의 방까지 내어주었던 일들이 교계의 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남을 너무 자주 보게 된다. 통합 측의 이단으로 규정했던 단체들을 해제하려는 시도, 합동 측에서 이단성을 확인했던 알파나 G12와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합동 측 뿐 아니라 합신 측에서도 옹호해주는 두 날개 운동, 춘천한마음교회의 부활교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수많은 양 떼들을 혼란케 함으로 무엇이 꼴이고 독초인지 분별치 못하게 하고 있다.

어느 때까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는가? 사단은 오늘날에도 세력을 규합하여 진리를 전하며 지키려는 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의 모습이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같고 로마제국 앞에 한량없이 작았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벌써 결론을 알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의 처형을 결의하고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던 산헤드린공회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협박 앞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며 당당히 맞섰다. 본래 학문 없는 줄 알았던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 앞에 그들은 백성이 두려워서 어찌하지 못하고 다만 위협한 뒤 석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대에 주께서 남겨 놓으신 칠 천인들이 분연히 일어나 진리를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견고한 진들을 훼파하고 모든 이방종교적인 것들, 잠시 우리에게 외적 부흥의 달콤함을 안겨 주었던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요소들인 기복신앙, 신성모독적인 CCM, 뉴에이지적인 내적치유, 결국 종교통합운동으로 귀착시키는 신오순절운동에서 비롯한 치유집회, 알파, G12, 두 날개운동, 이런 것들을 다 내어버림으로 썩은 물로 가득한 한국교회에 진리의 생수를 넣어주는 역할을 해주길 간절히 기도한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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