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17회)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한 의도

바울은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하면서 무엇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가? 앗수르 방언인가? 아니다. 바울의 관심은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예언으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앗수르를 보내어 심판하실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예언)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고린도전서 14장 21절에서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앗수르 방언1)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앗수르 방언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지라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선지자의 예언(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2)

만약 앗수르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데 있지 않고,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는 데 있었다면,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계속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로 이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앗수르 방언을 들려주시고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은 공의롭지 못하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라는 핑계거리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듣게 될 앗수르 방언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선지자의 예언)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의 표적이었다.

바울이 이사야서 28장 11절을 인용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고린도 교회에도 임할 것임을 경고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사야 28장 11절이 아니더라도 심판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을 설명할 수 있는 성경 본문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이 굳이 이 본문을 택한 것은 아마도 이사야 28장 11절에 나오는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의 유사성을 연결 고리로 삼아 고린도 교회의 위기 상황이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의 위기 상황과 흡사함을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

그러면 이사야 28장 11절의 배경이 되는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사28:1).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자기를 하나님처럼 높이는 “교만”과 세상 쾌락에 정신을 빼앗긴 “술 취함”의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하게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는 거짓 방언으로 자신의 교만한 면류관을 삼았으며,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방언기도로 ‘술 취함’과 같은 영적 쾌락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사28:7-8).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선지자가 술에 취해 하나님이 주신 환상(계시)을 잘못 해석하는 것과 제사장이 술에 취해 재판할 때 실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선지자는 백성의 술 취함을 재판하며 경고하기는커녕, 백성과 함께 술에 취함으로 이스라엘의 술 취함을 더욱 부채질 했다. 이런 이스라엘의 집단적 술 취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사28:9-10).

이사야가 주정뱅이로 고발한 제사장과 선지자는 자신들에게 경고하는 이사야에게 분노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이사야의 예언을 조롱했다. 이들은 이사야의 예언을 젖 뗀 어린아이에게나 맞는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며(9절), 뻔한 내용들뿐이라고 비꼬았다(10절). 이것이 이사야 당시 하나님의 말씀(예언)에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였다.3)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이스라엘에게 다음과 같이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사28:11-13).

하나님은 “전(前)에 그들에게”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히브리어)로 예언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다(12절).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는 자들(앗수르)을 도구로 삼아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11, 13절).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앗수르 방언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잡소리 정도로 여겼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앗수르 방언을 심판의 표적으로 삼으실 것이다. 이제 곧 이스라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앗수르가 쳐들어옴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앗수르 방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 방언 소리가 이들에게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의 노예가 되어서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 대신 알아들을 수 없는 앗수르 방언을 들을 것이며, 이들의 후손도 앗수르의 방언을 듣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짓 방언 전도사 빌 해몬은 고린도전서 14장 21절을 ‘방언이 주는 유익’으로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도 바울은 고전14:21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사야의 예언을 이용하였다.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사28:12). 방언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강으로 인도하며, 주님 안에서 새롭게 하고, 안식하게 한다(요7:37-39).”4)

리어든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방언이 주는 유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내가 피곤할 까닭이 없는데 왜 이토록 피곤한가?’라고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느낀 적이 있다면 당신은 방언으로 기도하여 영의 내부로부터 새 힘이 솟아오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피곤은 사라지고 활력이 넘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기도를 하면 피곤이 풀리고 새 힘이 솟아나고 즐겁고 행복해 진다. 날마다 방언기도를 하라. 그러면 신선함과 활력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5)

그런데 이들의 말은 마치 마피아의 보스가 필로폰을 팔아먹으려고, 열을 올리며 마약의 효능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사28:14).

이사야는 이스라엘(에브라임)과 마찬가지로 선지자의 예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예루살렘(유다)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함으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촉구한다. 본문에서 “오만한 자”는 ‘말만 앞세워 큰 소리 치는 자들’, ‘허풍을 떠는 자들’6), ‘조소하는 자들’7) 등을 의미한다. 이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지만, 선지자의 예언을 비웃으며 멸망의 길을 담대히 걸어가는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에게 적용된다.8)

이사야 당시 예루살렘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선지자의 예언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라도 이들이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외치는 선지자의 예언에 귀 기울인다면, 알아들을 수 없는 앗수르 방언을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친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28:23).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심판을 교훈 삼아 다시 선지자의 예언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원했다. 바울 역시 이사야의 심판의 메시지(사28:11)를 고린도교회에 들려줌으로 고린도교회도 거짓 방언을 버리고 예언에 다시 귀 기울임으로써, 거짓 방언이 표적이 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원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문제의 본문 22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고전14:22).

본문에서 “그러므로”는 앞의 21절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는 접속사다. 따라서 22절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나 예언을 설명하는 본문이 아니라 21절에 언급한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의 심판 원인을 분석한 본문이다. 여기서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소위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이사야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그의 백성에게 선지자를 통해 예언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예언을 멸시하고 거부함으로 사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사28:9-10). 예언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인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예언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는” 이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선지자의 예언을 멈추시고 알아들을 수 없는 앗수르 방언을 표적 삼아,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22절을 이해하기 쉽게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앗수르 방언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예언을 듣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예언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한 심판의 표적이다. 하지만 예언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예언을 듣지 아니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므로 예언을 듣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너희 이스라엘은 어찌하여 선지자의 예언을 듣지 않느냐? 너희가 끝내 예언을 듣지 않는다면 곧 너희는 앗수르 방언을 듣게 되는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앗수르 방언은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예언을 듣지 않으므로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었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예언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을 말한다. 그러므로 22절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배경으로, 23절과 24절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23절과 24절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불신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

바울은 이사야 당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과 방언(알아들을 수 없는 앗수르 방언)과의 상관관계를 통해 고린도교회의 예언(알아들을 수 있는 헬라어)과 방언(알아들을 수 없는 거짓 방언)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바울은 21-22절의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 심판의 정황을 배경으로, 23절 이하에서 예언은 없고 거짓 방언만 난무하는 고린도교회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앗수르 방언으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 방언이 이스라엘의 심판의 표적이 된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이 고린도교회를 심판하시는 표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14:23-25).

본문에서 “그러므로”는 앞의 22절과 관련 있음을 나타내는 접속사다. 바울은 22절에서 분석한 이스라엘의 심판의 원인을 교훈삼아 23절 이하에서 고린도 교회도 만약 예언을 듣지 않고 이대로 계속 거짓 방언에만 집착한다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어린아이 같은 고린도 교회에 심판의 심각성을 더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23절 이하에서 “다 방언으로 말하면”과 “다 예언을 하면”이라는 극단적인 가정으로, 거짓 방언의 심각성과 예언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여기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이라는 상황은 현실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그래서 가정법을 썼다). 왜냐하면 온 교회가 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12:17-18절과 29-30절을 참고하라).9)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예언보다 자신의 신령함을 드러내는 데 유리한 방언에 집착한 나머지 결국 성령이 주시는 방언과 다른 거짓 방언을 만들었고, 급기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거짓 방언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처럼 예언 부재의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이런 심각한 상태를 더욱 실감나게 설명하기 위해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이라고 가정함으로, 설령 그 방언이 외국인을 위한 참 방언이라 할지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에게 들려지면 어떤 피해가 있을지를 설명한다.

첫 번째 피해는, 교회에 들어온 자(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들에게 아무런 영적 유익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고린도 교회의 현지인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소리의 방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예언)을,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듣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온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소리만 듣는다면 이들은 교회를 향해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10) 현지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므로 어린아이 같은 육신적인 신앙 수준(고전3:1-3)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피해는, 교회에 들어온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교회를 이방 신전쯤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너희를 미쳤다”로 번역한 헬라어 ‘마이네스데’(mai,nesqe)는 일차적으로 ‘너희는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말이지만,11) 또 한 편으로는, ‘너희는 영감을 받았다’는 뜻으로 종교적인 열광과 열중의 상태12), 즉 황홀경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만약 교회에 들어온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방언을 듣고 “미쳤다”고 평가한 것이 종교적 황홀경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이들은 이미 그런 종류의 방언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신비한 소리를 내는 황홀경의 방언은 고린도의 이방 신전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방언을 듣고 “미쳤다”고 말한 것은 고린도 교회도 헬라의 신비종교에서와 똑같은 영적 세력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여겼음을 의미한다.13) 다시 말해서 교회에 들어온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듣고 미친 자들의 광란이나, 이방 신전에서와 같은 황홀경쯤으로 여겼다면, 이들은 고린도교회를 정신 병원(물론 당시에는 정신 병원이 없었겠지만)이나 이방 신전쯤으로 여겼을 것이다.14)

그러면 이들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것이며, 설령 만난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무당들의 왕쯤으로 여기는 심각한 지경에 놓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불신자들이 교회에 왔다가 교회를 무당이 굿하는 장소 정도로 인식한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일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반응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하는 황홀경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15) 만약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이었다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인들을 위해 당연히 통역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 교회에 들어온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현지인들은 통역을 듣고 “미쳤다”는 반응 대신에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했을 것이다. 아무튼 고린도 교회는 이사야 당시의 이스라엘처럼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했으며, 반면에 황홀경의 언어(거짓 방언)에 집착했다.

바울은 예언 부재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가장 절실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예언하는 것’임을 간파하고, 24절에서 다시 한 번 예언을 강조한다. 그런데 24절에서 “다 예언을 하면”이라는 것도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다 예언을 하면”이라는 극단적인 가정을 통해 어린 고린도교회에 왜 예언이 필요한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24-25절에 의하면, 예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과는 달리 교회에 들어온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게 하는 유익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의 신앙 성숙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소리의 방언이 아니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딤후3:16)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가능하며,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믿음도 신비한 소리의 방언이 아니라 “복음, 즉 하나님의 큰 일”을 들음으로 생기기 된다(롬10:17).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는 지금 당장 거짓 방언을 멈추고, 예언을 하며 그 예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어린아이 같은 유치함으로 인해 생긴 파당, 육적인 욕망으로 저지른 음행, 송사, 우상숭배 등 죽음에 이르는 영적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가 사랑했던 거짓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분명치 못한 나팔 소리와 같다(고전14:8). 이런 나팔을 멈추지 않고 계속 불어댄다면, 고린도 교회는 필연적으로 영적 전투에서 패하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반면에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나팔 소리와 같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가 거짓 방언을 멈추고 이 예언의 나팔을 불며 그 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예언을 듣지 않아 심판 당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을뿐더러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14:5), “예언을 사모하라”(고전14:39)고 반복해서 “예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앗수르 방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거짓 방언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 앗수르 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거짓 방언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앗수르 방언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었다. 고린도교회의 거짓 방언도 고린도 교회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거짓 방언도 현대 교회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적이 될 것이다.
 

--- 각 주 ---

1) 김동수 교수는 앗수르 방언을, 하나님이 다른 나라 언어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계시라고 본다.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73.

2) 김동수 교수는 이스라엘이 앗수르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동수,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서울: 이레서원, 2008), pp.34-35.

3) 이런 태도는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태도이기도 했다. 고린도 교회는 거짓 방언을 대단한 영적 경지로 숭상한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은, 바울이 예언을 몇 번이고 강조해야 했을 만큼 무시했다.

4) 빌 해몬, 방언을 해야 하는 70가지 이유, CI KOREA 옮김(서울: CI KOREA, 2011) p.16.

5)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p.73-77.

6) 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2]), p.58.

7) 존 D.W 외츠, 이사야 상, 강철성 옮김(서울: 솔로몬, 2006), p.605.

8) 톰슨성경1, 톰슨성경편찬위원회 옮김(서울: 기독지혜사, 1985), p.997.

9) 존 맥아더, 다른 불, 주계광 옮김(서울: 생명의말씀사, 2014), p.209.

10) 이런 일들은 방언이 범람하는 현대 교회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어떤 여성 신자가 남편을 천신만고 끝에 설득해서 교회에 함께 왔는데, 때마침(?) 부흥회가 열려 남편이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많은 사람들이 광란에 가까운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 후로 아내마저도 교회에 못 나가게 했다고 한다.

11) 강면광,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08.11[2]), p.54.

12) 빅터 C. 피츠너, 고린도전서, 이기문 옮김(서울: 컨콜디아사, 1990), p.276.

13) 데이비드 프라이어, 고린도전서 강해, 정옥배 옮김(서울: IVP, 1999), p.334.

14) 루크 티모시 존슨, 초기 기독교 신앙체험, 손혜숙 옮김(서울: CLC, 2010), pp.130, 135.

15) 김동수 교수는 스테판 체스터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들이 미쳤다’는 부정적인 언명이 아니라 그레꼬-로마 세계의 세계관에서 볼 때 오히려 ‘너희들은 영감을 받았다’는 뜻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이 불신자들에게 환호 받는 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은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22절의 언명과 모순이 없게 된다.” 김동수, 신약이 말하는 방언(서울: 킹덤북스, 2009), p.64. 놀랍게도 오늘날 오순절주의나 신사도주의는 비이성적인 황홀경을 신령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황홀경을 신령한 것, 즉 성령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나 백성들에게 계시를 전할 때는 언제나 맑은 정신 상태였다.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나 다른 사도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이성적인 황홀경에서 말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이방 신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비성경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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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