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운 목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를 강조하지만, 성경과는 다른 방향에서 강조한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하여 이방인과 같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뜻, 그의 이름을 위하여 간구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일용할 양식만 구하게 하심으로 탐심을 물리칠 것과 용서를 명령하실 뿐 아니라 용서를 기도 응답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하심으로 우리가 반드시 예수님처럼 원수를 용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기도 응답의 공식을 알려주셨다.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간구하도록 명령하심으로 결국 기도의 초점이 우리의 변화됨, 성화에 있음을 교훈해주셨다. 주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성경적 기도, 자신의 변화됨을 위한 기도보다는 자신의 문제 해결,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에 목을 매고 있을까? 새벽예배에 나와서 자신의 변화됨, 성화, 가진 것을 더 나누고 베풀고, 용서하고 희생하기 위하여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현실문제인 자녀들의 학업과 취업 문제, 남편의 승진과 성공을 위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 안타깝게도 후자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주권과 인도에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맡기지를 못하고 기도를 통하여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기도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바로 기존에 갖고 있던 토속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속신앙에서 기도는 치성, 정성을 쌓는 것으로 이해한다. 정성이 쌓이면 하늘을 감동시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런 개념으로 기도를 사용하니까, 기도의 분량, 기도의 제단이라는 이교도적 용어들이 난무하게 된 것이다.

토속 신앙의 영향으로 기도를 문제 해결의 열쇠로 이해함으로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염려하십니까”라는 문구가 유행하게 되었다. 그들의 기도에 대한 오해는 결국 하나님도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뿐 아니라 소원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램프의 요정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섬겨야 할 주님이고 왕이시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문제 해결보다는 주님의 뜻을 신뢰하고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 위한 수단, 그렇게 주님을 신뢰하며 따라가게 하는 교제의 수단이며 경건의 수단이어야 한다.

이런 기도에 대한 가장 좋은 실례가 고후12장의 바울의 기도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를 제거해달라는 간구는 거절됐다. 그러나 그는 이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더 크신 뜻을 깨달았고 그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기뻐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바울의 기도는 주님의 더 크신 뜻을 바라보고 더욱 주님을 신뢰하고 따르게 하는 경건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기도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기도였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의 자세다. 워렌위어스비 목사는 산상수훈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담을 나누었다.

"나는 더 기도할 수록 다른 사람을 덜 판단하게 됩니다. 나는 더 기도할 수록 분별력있게 행동합니다. 나는 더 기도할 수록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더 돕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닐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배울 때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흥사들과 특별한 경우를 일반화시키는 간증자들의 기도를 통해서 배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는 기도를 가장 많이 하지만 가장 이기적인 종교 집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약 5장을 통하여 기도의 능력에 대한 강한 확신을 품게 된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야고보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기도를 교훈하지 않는다. 사실 약 5장의 본문과 현재 우리와는 2,000년이라는 시간적 격차가 있다. 따라서 당시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되기 전이었으므로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같은 계시의 통로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고전12:9,10을 보시면,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 예언, 영분별,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이 은사로 주어졌던 시대였다.

이런 은사가 존재했기에 야고보는 이런 명령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은사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들로, 성경의 완성과 함께 사라진 것들이다.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고전13장을 통하여 이런 은사들이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역사를 통해서 살펴볼 때 이런 초자연적 은사, 계시적 성경을 띤 사도적 은사들은 성경이 완성된 후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고전13장의 ‘온전한 것’이란 파루시아(주님의 재림)가 아닌 완성된 계시인 성경임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던 사도 시대라고 해도 모든 기도가 응답되지는 않았다. 약 4:2,3을 보면, 기도하면 얻을 수 있지만 이기적인 기도는 응답받지 못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본문을 이해하려면 당시는 사도시대라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동시에 더 중요한 점은 야고보서가 기록된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통한 성화를 교훈하는 책이다. 야고보는 1장부터 주께서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며, 그 시련을 온전히 인내할 것을 명령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가 온전히 성화되기 위하여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 됨, 믿음과 행위의 일치, 반드시 어거해야 할 혀(언어), 정욕과 세속과 짝하지 않아야 함, 비방금지, 허탄한 자랑금지, 재물관에 대해서 차례로 교훈하였다. 그리고 바로 5장, 문제의 본문이 등장한다. 따라서 본문을 이러한 흐름가운데 접근하지 않으면 결국 오늘날처럼 성경을 오석하게 된다.

본문을 해석하는 열쇠는 바로 17,18절이다. 칼빈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가장 강조하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아합 왕에게 신중히 비를 약속한 후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마음 졸이며 기도했으며 사환을 보내 일곱 번이나 확인했는데(왕상 18:42), 이는 그가 자신의 예언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이 흐려지거나 나태해 지지 않도록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알리는 것을 의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엘리야의 기도는 주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기도였다. 왕상17:1을 보면, 주께서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보내서 앞으로 말씀이 있을 때까지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대언케 하셨다. 그러자 실지로 비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18:1을 보면,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라고 되어 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가서 주께서 주신 말씀 그대로 대언했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비가 내려야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기로 혈안이 된 아합 앞에서 엘리야의 기도는 주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아합의 죄가 극심함으로 비가 내리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혹독하게 혼났으니까 비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런 식의 기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는 단지 주의 말씀을 대언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전한 말씀대로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주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3년 6개월의 가뭄과 해갈은 엘리야의 기도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뿐이었다. 엘리야는 이렇게 그 약속을 신뢰하고 주의 말씀을 선포했으며, 그 신뢰가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했던 것이었다.

야고보는 주께서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시련을 허락하시니까 시련을 만날 때 기쁨으로 인내할 것(약1:2-4)을 교훈했다. 4장에서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를 정죄했다. 그랬던 사람이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기도해봐라,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았다가 다시 비가 오지 않았냐? 너도 기도의 능력을 믿고 시련을 피해보라는 모순된 가르침으로 야고보서를 마무리 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렇게 야고보서의 내용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야고보는 신앙인의 시련은 성화를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엘리야처럼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기 위한 기도여야 할 것이다.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할 때 주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생각나게 하시며, 그 약속가운데 주의 임재와 보호,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원수의 목전에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 이기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가 강조하는 기도의 능력이요 바울이 강조했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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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운 목사는 수원경성교회를 섬기고 있고 기독교진리수호연구협회 신학전문연구위원으로 활동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경대로 전하기 위해 늘 쉬지 않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