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철 목사

페이스 북상에서 어떤 분과 중보기도에 대한 토론이 길어졌다. 그 내용으로 인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중보기도 사상은 물론이고 그 용어까지도 배격하는데 동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중보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루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 주권을 펼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과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제 삼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예수 한 분뿐이지만 중보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기도해야하고 우리의 헌신으로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부담스러우면 개선하면 됩니다. 그런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요?”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고 말하시면서 그래도 우리가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뜻하시는 일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중보기도를 해야하고, 중보기도의 헌신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매우 비성경적인 말이다. 왜냐하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요청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섰고, 우리들도 살면서 신앙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실례를 하나 보자!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저주하였다는 점에서는 거의 동일한 죄악에 빠졌다. 그러나 그 이후 베드로의 인생은 유다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하셨기 때문이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베드로에게 사탄의 혹독한 시험이 닥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베드로를 위해 하나님께 중보자로서 중보기도를 드리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죄 값으로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는 중보자이므로 그의 요청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요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과 영혼을 보전하여 주셨고,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을지라도 베드로가 신앙을 회복하여 복음의 사도로 귀하게 쓰임을 받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에 가룟 유다와 비슷한 죄악에 빠졌을지라도 베드로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 것이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중보기도의 사례를 보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제자들을 떠나가시기 직전에 이와 같이 세상에 남아있을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올리셨다. 그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대신받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요청하신 기도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결코 외면할 수가 없으셨다.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응답으로서 이미 신앙을 버리고 제 길로 가 버린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제자들은 불과 같은 시험을 당하였으나 모두 신앙이 보존되었고, 이후 성령의 충만을 입어 사도로서의 예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게 되었다.

우리의 신앙과 모든 것이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효력의 열매이고, 우리의 영혼이 반석 위에 세워지게 되는 것도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이고, 우리가 앞으로 무슨 잘못이나 죄에 빠질지라도 영원한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도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이다. 우리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중보사역)로 구원받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

대체 이와 같은 중보자의 중보기도를 누가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중보자가 단 한 분이면,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분도 단 한 분이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중보자, 중보적, 중보기도, 중보적 기도 ... 이러한 것을 할 수가 없다.  

중보기도 운동은 신사도운동가들의 핵심사역이다. 70년대에 일어난 중보기도 운동의 능력자들이 결국 신사도 운동의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로 발전되었음이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다. 중보기도하다가 거짓 사도가 되고 거짓 선지자서 성장하게 된 이유는 자신들이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망상에 빠져서 되지도 않은 기도놀음을 즐겼기 때문이다. 사탄적인 이론으로 기도하다가 마귀의 큰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터 와그너, 신디 제이콥스, 더치 쉬츠 등의 우리가 잘 아는 중보기도의 거장들은 모두 자신들의 중보기도 은사가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서 집행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페이스 북에서 나와 토론하신 분처럼, 피터 와그너 등의 중보기도 거장들도 동일하게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지만, 자신들의 중보기도로 하나님이 뜻하신 일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게(집행되게)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집행되게 하려고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세를 발휘하는 선포기도, 대적기도, 동일시 회개기도... 등의 중보기도 영적전쟁의 기술을 고안하여서 펼쳤다. 

페이스 북 상에서 중보기도에 대해 나와 길게 토론하신 분도 거짓 사도들의 중보기도 이론과 거의 같은 말하면서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단지 조금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 주권을 펼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과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제 삼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예수 한 분뿐이지만 중보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보기도해야하고 우리의 헌신으로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지만, 우리들이 중보기도를 계속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실질적으로 피터 와그너, 신디 제이콥스, 더치 쉬츠 ... 등의 거짓 사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사상이 발견된다.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사소한 것 같으나, 그것을 쉽게 버리지 않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쟁쟁한 중보기도 거장들인 신사도 운동가들의 영향을 직접받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서 유래한 중보기도 사상에 오염된 다양한 것들을 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자신들은 절대로 신사도운동과 무관하다고 하고, 단지 남을 위해서 힘써 기도하는 것을 강조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역사를 돌아보아야 한다. 70년대부터 피터 와그너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그릇된 중보기도 운동이 전 세계 교회에 퍼지면서 중보기도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것이 우리나라에까지 퍼진 것이지 절대로 중보기도라는 용어와 사상이 우리 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결국 거짓 사도들의 대장이 된 피터 와그너 등이 중보기도 운동을 일으키기 전에는 중보기도라는 말도 유행하지 않았다. 단순할지라도 그들이 만들어 낸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계속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그 용어 속의 내용이 같기 때문이다. 

더 기도를 많이 하고 싶고,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먼저 연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육신과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기도할 내용과 기도의 자세와 정신을 가르치셨다. 주기도문이 우리의 기도의 메뉴얼이라는 것이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집요하게 좋아하고, 그 말 속의 사상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솔직히 약간 참람하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친히 말씀하시면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정신와 내용을 더 배워야 한다. 중보기도의 사상과 용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약간 참람하다는 말을 들어도 싸다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자신에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기도하는 특별성이 있다는 망상과 교만을 완전히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단지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성도일 뿐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조율하기 위해 끼어들어 갈 수는 없다. 

중보기도라는 말을 깔끔하게 포기하지 않으려는 분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의 기도는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서 구원받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은혜의 수단입니다. 기도를 많이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이며, 그것을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더 누리게되는 것이지, 우리의 기도로 말미암아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이 집행되어진다는 것은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과 이해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믿는 자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집행하시지 못하신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비성경적안 중보기도 사상가들의 이론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중보기도라는 사상은 물론이고 단순 용어 사용도 옳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바르게 일하고 봉사함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이 집행되기 위해서 우리들이 중보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길가의 보도블럭들이라도 일으켜 세워 쓰시면서 자기의 주권과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받은 우리는 영원히 감사드리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분별하여 온전하게 봉사하고 쓰임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 사상이 성경적인 신앙에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 신앙을 설립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교회와 부모형제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호대기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기도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영역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기도에 관한 거짓을 퍼뜨렸습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죄책과 죄의 오염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따를 수도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수단이지, 처음에 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드리는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더욱 하나님을 올 바르게 경외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해야합니다. 중보기도라는 용어와 개념 속에는 기도하면서 기독교를 파괴하는 마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경계해야합니다.”

중보기도 습관, 사상, 용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예수님이 친히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공부하기 바란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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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