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합신 총회에서 김성곤목사의 두날개운동에 대해서는 다루지로 않기로 했다. 9월 20일 헌의부는 두날개운동에 대한 신학위원회의 명확한 해석을 주문하는 등 4개의 헌의안 목록을 상정했지만 박영선 목사(남포교회)가 "두날개선교회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해 총회에서 결의했으며 서로 다르다고 정죄해서는 안된다"면서 기각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용주 목사가 "4개 노회나 헌의한 안건이니 이를 존중해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해서 총대들의 의견이 갈리자 투표를 실시, 105표대 34표로 기각을 선언하게 됐다고 한다. 참으로 비탄에 빠지게 하는 기사다. 이에 비해서 고신측에서는 인터콥을 불건전한 단체로 규정하여 참여 및 교류 금지 결정과 함께 인터콥에 참여하고 있는 교회나 목사는 속히 교류 관계를 정리하기로 총대들의 이견없이 통과시켰다고 한다. 인터콥이나 두날개나 그 근본을 이루는 신학은 거의 비슷하고 합신이나 고신 두 교단 다 개혁주의 신학을 주창하는 교단인데 한쪽은 총대들의 이견 없이 통과, 다른 한쪽은 목소리 큰 사람의 주장에 휩쓸려서 헌의안 자체를 기각시켜 버렸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한국교회는 조선선교 초기부터 이단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해 오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 이 글을 통하여 어떻게 이단에 대처해 왔는지 먼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처, 두번째로 신비주의 운동에 어떻게 대처하면서 신앙을 지켜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처

1916년 신원교회 김장호 목사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자 황해노회는 그의 총회 총대직을 정지시키고 권면위원을 선정하여 그를 교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노회의 결정에 불복함으로 결국 1918년 면직처리 되자 자신이 시무하던 신원교회 교인들과 함께 1918년 7월 16일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했다.

당시 황해노회는 어떻게든 김장호를 교정하려고 시도했던 사실이 당시 노회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장호 목사는 분명히 보수적인 평양신학교 출신이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게 되었을까 조사하던 중 그가 오랫동안 조사로 있던 교회의 선교사였던 윌리엄 커(유니온신학교 출신)에게서 그 사상이 나왔다는 것을 발견, 결국 자유주의를 가르친 선교사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렇게 당시 교회는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를 교정하려고 시도했을 뿐 아니라 교정을 거부하자 목사직 면직처분을 내렸을 뿐 아니라 이런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친 선교사까지 퇴출시키면서까지 진리의 왜곡을 막으려고 했다.

1935년에 감리교의 신학자들과 함께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친 일본청산학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3명의 장로교 목사들, 채필근, 김재준, 송창근과 한경직 목사가 주축이 돼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아빙돈단권 성경주석을 번역 출판, 불티나게 팔리자 장로교 총회는 아빙돈 주석을 이단적 문서로 규정, 번역에 참여한 장로교 측 목사들을 소환하여 심문, 사과문을 발표케 하였다.

김재준은 성경무오설에 대한 비판으로 면직시킴으로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설립되게 했다. 1958년에는 WCC문제로 결국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지게 된다. 보수적인 신학을 견지하는 자들은 결코 WCC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유주의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이후에 성경의 권위보다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주장들인 여성안수, 동성애인정, 칭의에 대한 새 관점이 등장하여 논란을 일으킬 때마다 보수교단들이 한 목소리로 대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신비주의에 대한 대처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뿐 아니라 신비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21년 황해노회가 김익두 목사의 치유기적을 근거로 제시하며 헌법 수정 헌의안을 올렸다. 당시 총회록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정치 제3장 1조 말단 괄회내에 「금일에는 이적행하는 권능이 정지 되었느니라」함을 개정하여 달라는 것은 신경과 성경진리에 위반되는 요건이 아닌즉 개정할 필요가 없음((각 노회에 수의하여 개정여부를 결정키로 함)", 당시의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보수적인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가진 목회자들이 다수였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총회의 분명한 신학적 입장 표명은 이어지는 이단 규정에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1927년부터 원산의 한 감리교회 여성도인 유명화가 방언과 예언, 거짓 계시를 남발했는데, 이용도, 이호빈, 평양신학교 졸업생 백남주가 이 여인의 신비주의 운동에 합류하자 모두 이단으로 규정해 버렸다. 유명화를 추종했던 이용도 목사는 1931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감리교 순회부흥사로 임명돼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회를 인도했었으나 1931년 8월 장로교 총회에서 금족령을 내려 부흥회 인도를 할 수가 없게 했으며, 1932년 22차 총회에서는 이단으로 정죄했다.

같은 해 4월 7일, 평안노회에서 타교파 강사 초청 시에 규정을 밟을 것과 조용히 기도하고 이용도에 의해서 설립된 평양기도단을 해산토록 하였다. 유명화를 추종했던 한준명은 당시 한남노회 전도사였지만, 유명화의 파송을 받고 평양에 가서 강신극과 거짓 예언운동을 주도하다가, 1932년 평양노회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백남주 목사(평양신학교 제25회(1930년) 졸업생)는 ‘원산 신학산’이라는 일종의 사설 신학교육원을 설립, 운영하였던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새 생명의 길」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신이 제시하는 완전한 계시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1932년 평양노회에서 한준명, 이용도와 함께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원산의 신비주의 사상을 그대로 후세에 전해준 이는 김백문(이스라엘 수도원)이다. 그는 해방 후 파주와 서울 상도동을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문선명과 박태선에게 신비주의 사상을 전수해준다. 문선명은 이런 신비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을 규합하여 통일교를 세운다. 그가 규합했던 신도들의 대부분이 하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몽시를 보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신비주의 신앙운동가들은 전부 다 장로회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55년 8월 신비주의 운동가들의 입신, 방언, 안찰, 병 치료, 감정적인 예배 분위기가 확산되어 가고 신종파가 조직적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특수부흥’에 대하여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정치, 교리, 예배모법, 신앙운동 영역에서 지침을 공표하였다.

신자 중에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탈선할 우려가 있으며 계시와 영감은 다르다는 것, 예배는 단정, 엄숙, 박수나 북을 치지 말고 경건하게 할 것, 피가름, 악취, 향기 등은 성경에 근거할 수 없다는 것, 신앙운동은 복음전파에 목적이 있으므로 헌금과 박수와 병 고치는데 치중하지 말 것 등이 중요한 지침이었다.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도 통일교와 전도관을 ‘사이비한 신앙운동’으로 규정하면서 사설과 이단설이 유포되고 도처에서 비정상적인 신앙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였다.

위의 총회의 결정에 의하면 성령체험과 방언, 신유를 강조할 뿐 아니라 기복주의를 강조하는 순복음교회에 대해서도 동일한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그러나 수많은 교회들이 총회의 결정을 따르기보다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목표를 둠으로서 교인들이 선호하는 열광적인 예배와 신비체험, 기복주의로 치우쳐 순복음 장로교회로 변질됨으로 조용기목사의 왜곡된 신학과 신앙을 배척할 수가 없었다.

물론 1983년 통합측에 의해서 조용기 목사가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곧 이단해제를 받음으로 마음껏 삼중축복과 오중복음, 4차원의 영성을 전파할 수 있었다. 총신대의 총장이었던 김의환 박사가 한국의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령론은 다른 복음임을 피력하였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신학자의 외침으로 그치고 말았다. 만일 당시에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보수교단들이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단호함으로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만을 가지고도 이단성 있는 집단으로 규정,교류금지 처분만 내렸어도 지금과 같은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신오순절주의자들의 성령론은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힘이나 활동력으로 이해한다. 이는 정통삼위일체교리에 상치된다.)

그러나 총회에서 엄히 경계했던 잘못된 신앙운동들을 이미 수용한 터라 확고부동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이후에 한국교회를 강타한 빈야드운동, 신사도 , YWAM, 인터콥, 관상기도, 알파, G12, 두 날개의 공세에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운동들의 이단성을 지적하며 참여 및 교류 금지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너무 늦은 결정들이었을 뿐 아니라 초기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단호했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일정도로 소극적이었으며 인터콥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YWAM이나 두 날개에 대해서는 손도 못대고 있지 않은가?

예방주사를 맞아야 할 골든타임을 놓쳐버림으로서 비성경적인 신오순절주의와 신사도운동이 마음껏 한국교회를 유린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주었던 것이다. 이런 부끄러운 개혁주의를 자처하는 총회의 기록들은 지금도 계속 쓰여지고 있다.
 

결  론

우리나라의 보수주의 교단들은 성경에서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하여 기독교를 해체한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단호하지만 성경 만으로는 부족하여 오늘날에도 계시가 주어진다며 계시를 계속하여 추가하는 신비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해져서 계속되는 혼란을 일축시키지 못하고 있다. 고신측에서 인터콥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듯이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모든 이단들에 대해서 친분이나 이권관계를 떠나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인지만을 논의하는 구별된 총회들이 되길 기도한다.

1643년 7월 1일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인 성직자들은 1649년 2월 22일까지 대략 7년간 1,163차례의 오랜 회의를 통해서 기독교의 순수성과 더 완전한 종교개혁을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내놓았다. 그토록 많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매번 모든 회원들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약속하고 맹세했다. "교리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일치한다고 믿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아니할 것이요 권징조례에 있어서도 가장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교회의 평화와 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서문.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바른믿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