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기독교인들이 되자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이 아닌 성경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주님은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빛과 소금이 제 역할을 하면 부패를 막을 뿐 아니라 어둠을 밝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부패를 막지 못할 뿐 아니라 어두움도 밝힐 수가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백성들의 죄악과 부패였지만, 성경은 아브라함과 주님의 대화를 통하여 결국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하게 되었음을 동일한 어조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제는 사교를 의지한 최고 통치자와 그 권위를 내세워 호가호위한 세력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의지하려는 권력의 높낮이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는 모두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조금만 힘과 권력이 주어지면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섬기기보다는 그 권력을 누리려는 죄악된 본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나보다 높은 사람에게 한없이 자신을 낮추지만 조금이라도 낮아 보이는 이들이 있으면 한없이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우리 역시 죄악된 본성을 따라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나라를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는 방법은 대통령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끌어 내리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서 방법만 다를 뿐 동일한 행태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입니다. 가장 더럽고 부패하고 못사는 나라였던 싱가폴을 일류국가로 만든 리콴유총리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든 야든, 상대방의 비리나 약점이 발견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서 애국자 코스프레를 하지만, 그들 역시 전부 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아닌가요? 기독교 정치인들, 기독교 공직자들, 기독교 언론인들, 기독교 사업가들, 기독교 근로자들, 기독교 학생들, 기독교 지도자들, 이들가운데 과연 몇 %가 빛과 소금된 삶을 살고 있는지요? 정말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면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모두 지금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얼마나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았는지를 점검하며 주 앞에서 통회자복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뛰어나가서 "이게 나라냐!!"고 외칠 때, 우리들은 주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악된 모습들, 주께서 우리를 두신 자리에서 빛과 소금처럼 복음을 위하여 철저히 낮아지고 양보하고 섬기며 희생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참회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이 우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개독교가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하도록 신자로서 빛과 소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양보하고 희생하는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 때, 우리 때문에 이 세상의 부패가 조금이라도 막아지지 않을까요?

부패한 권력에 기대지 않아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초석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직장에서는 아부와 뇌물보다 성실성과 진실함과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공직사회는 복지부동한 태도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듯 국민을 섬기는 풍토가 자리잡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인 사업가들은 자신의 이윤만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학교는 더 이상 왕따나 학교 폭력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속원리를 따라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설교, 신앙 생활 잘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면 이 세상에서 더욱 성공할 수 있다는 기복주의적 설교, 이기심을 부추기는 설교보다는 세속과 벗 되기를 택함으로 하나님의 원수된 자리에 서려고 하는 교인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세속적 부와 권력을 기준으로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기보다는 철저히 성경의 원리를 따라 신앙과 인격을 기준으로 선출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낸 헌금을 비성경적인 성전건축이란 헌금으로 낭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과 발이 돼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와 교회의 구별성을 회복하는 것이 소금과 빛으로서 이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을 살맛 나게 하며 빛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요 삶이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일에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일이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구원의 은혜를 아는 백성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구별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혁명보다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태도,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과 같은 자기 희생적 태도가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영적 예배요, 이 세상을 바꿔가는 그리스도인들만의 구별된 방법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잡아 죽이라고 외치던 폭도들을 그리스도 앞에 굴복시켰던 것은 혁명이 아닌 복음이었습니다. 미신과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던 에베소를 변화시켰던 것도 복음이었습니다. 중세 1000년 동안 진리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로마교황청을 향해 루터가 들었던 기는 "이게 기독교냐!"가 아닌 복음이었습니다. 부패한 영국사회를 개혁한 웨슬리와 휘트필드의 손에 들렸던 것도 피켓이 아닌 복음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복음으로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 이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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