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는 2016년 10월 1일(토)에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회장 김용국) 35차 학술대회에서 “트렌트공의회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 제목에 나오는 “해독문”은 독소를 해독(解毒)하는 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2016.10.2.)는 위 논문발표 내용을 “새 관점학파 칭의론, 로마가톨릭과 뭐가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 기사 제목은 최덕성의 논문과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를 대립시킨다. 그러나 논문은 김세윤 신학이나 새 관점학파의 신학의 칭의론을 가볍게 언급하고 있다. 언론보도문은 최덕성의 논문이 현재 한국 신학계에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길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최덕성은 <크리스천투데이>(2015.10.23.)에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이라는 글을 개제한 적이 있다. 간략한 신학 에세이였다. 김세윤 교수의 <칭의와 성화>(두란노, 2013)가 제시하는 칭의론은 ‘유보적 칭의론’이라고 명명했다. 이 글이 발표된 뒤로 한국교회는 김세윤의 칭의론에 대하여 설왕설래 하고 있다. 김세윤의 신학이 정통 기독교 신학과 구원 이해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견해와 한국 교회의 긍정적 대안으로 적당하다고 주장이 공존하고 있다. 김세윤의 신학과 새 관점학파의 신학이 혼재되어 알려져 있고, 새 관점학파가 신학이 다수 우위를 차지하는 것 같다.

신학적 이전투구 마당에 던져진 최덕성의 논문 “트렌트 공회의 칭의론과 칼빈의 해독문”는 종교개혁 전통에 충실한 신학적 가이드라인이다.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종교개혁운동의 문을 열었다. 루터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인 이신칭의를 확립했다. 루터와 칼빈의 칭의론 도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이신칭의에는 차이가 없다. 1999년 로마카톨릭과 루터교회가 칭의론에 합의를 했고, 2006년에 로마카톨릭교회와 감리교도 합의문서를 만들었다. 이는 개신교권에서 다양한 칭의 이해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장로교 권에서도 로마카톨릭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엿보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이 거의 정착될 무렵 로마 교황주의자들은 종교개혁운동 신학에 대항할 이론 수립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역사상 가장 긴 공회의를 열었다. 그것이 트렌트 회의(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이다. 최덕성은 1997년에 출간된 로마카톨릭교회의 <가톨릭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와 트렌트회의 문서에 포함된 칭의론 내용이 일치함을 먼저 확인한다. 트렌트회의는 정경 목록, 칭의, 성례 등 종교개혁운동의 주장들을 모두 부정하는 반(反)종교개혁신학을 확립했다.

트렌트회의는 1547년 1월에 칭의교리(의화교리)를 발표했다. 최덕성은 칭의교령 법규 9항 부분이 모든 개신교를 파문하고 저주(anathema)를 선언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 안에는 ‘천주교가 이단인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천주교가 개신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개신교회는 공적으로 천주교를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는다. 신앙고백서들은 불특정한 표현으로 천주교회를 ‘거짓교회’로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표지를 준수하지 않는 교회,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교회, 성례를 바르게 거행하지 않는 교회를 거짓교회라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덕성은 트렌트회의 칭의교령에서 개신교 전체를 저주받을 단체로 결정한 것을 밝혀낸다. 천주교는 개신교회를 이단으로 단정하면서도 그 이단과 교류하고 모두를 아우르는 가슴 큰 형님, 집나간 말썽꾸러기를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자랑한다.

트렌트회의의 문서가 발표되자마자 칼빈은 곧바로 반박문(anti-toxic)을 발표했다. 교회 안에 스며들 독(毒)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바울이 긴박감을 가지고 갈라디아서를 쓴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최덕성은 칼빈의 독소 제거 작업 내용을 우리에게 명료하게 풀어서 소개한다. 트렌트회의의 독을 방어하고 우리 안에 침투한 독을 해독시킬 수 있게 한다. 몇몇 연구자들이 트렌트회의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최덕성처럼 ‘트렌트 회의 법령(의화 부분)’ 원전과 ‘칼빈의 해독문’ 원전을 대조하면서 전개한 사람은 없었다.

트렌트회의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反)종교개혁 공의회이다. 종교개혁운동이 개혁한 중세교회 1천 년의 신학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재정립했다. 다시 말하면 트렌트 법령은 바르게 제시한 종교개혁 신학을 거꾸로 개혁한 회의였다. 결국 트렌트회의는 문제점으로 가득 찬 신학주제들을 교회의 권위로 체계화하고 공인했다.

최덕성 박사가 지적한 것 독특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트렌트회의는 물세례를 의화 곧 칭의의 도구인(道具因)으로 선언했지만, 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칭의의 수단이라고 했다. 트렌트회의가 물세례를 의화의 수단으로 제시한 반면에 칼빈은 세례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외형적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2) 칭의교령 7장은 칭의에 성화를 포함시키고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한 반면에 칼빈은 칭의를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주어진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으로 제시했다.
(3) 칭의교령 7장은 믿음에 행함을 첨가시키는 반면에 칼빈은 신인협력이론이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4) 칭의교령 9장은 구원의 탈락가능성을 제시하는 반면에 칼빈은 구원의 확신, 확증을 강조했다.

최덕성이 제시한 트렌트회의 논거들은 이상하게도 김세윤의 칭의론 요점들과 비슷하다. 새 관점학파의 견해와 유사하다. 최덕성은 김세윤의 사상 안에서 트렌트공의회 교령과 동일한 내용을 파악한 것 같다. 이를 입증하는 확고한 근거를 한국교회에 소개해 주었다. 최덕성은 논문 초두와 결론 부분에서 김세윤 교수와 새 관점학파에 대해서 간명히 언급한다. 김세윤과 새 관점학파의 주장이 반종교개혁 공의회인 트렌트회의의 칭의교령을 답습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최덕성의 논문은 칭의론 이해에 중요한 좌표를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종교개혁 칭의론과 트렌트회의 칭의론이 동일하지 않으며,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과 칼빈의 칭의론이 불일치함을 알려준다. 최덕성은 트렌트회의 칭의론에 대한 칼빈의 변호가 가장 명확한 대응이라고 설명한다. 서방교회가 신교와 구교로 나뉜 그 핵심에는 두 가지의 상이한 칭의론이 존재한다.

최덕성의 논문은 칭의론 그 자체를 논의한 것이 아니라 트렌트회의 칭의론과 칼빈의 칭의론을 역사신학적으로 대조하여 상호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복잡한 논리를 단순화시켜 제시한다. 트렌트회의 칭의교령도 복잡하고, 칼빈의 해독문도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최덕성의 ‘리딩 다이제스트’ 능력은 독자들로 하여금 두 신학 체계를 명료하게 이해하게 한다. 한국교회에 칭의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각을 제시해준다. 한국교회가 칭의론의 차이를 알지 못한 탓으로 실수를 했다는 핑계를 할 수 없게 한다.

최덕성은 트렌트회의의 결정이 현재까지 로마가톨릭교회 안에 유효한 교리로 수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개신교 진영에는 여러 종류의 칭의 이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세윤과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이 트렌트회의의 칭의교리와 궤를 같이한다. 종교개혁신학의 모토인 ‘솔리 피데,’ ‘솔라 그라치아’가 위협받는 시점에 있다.

한국교회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트렌트회의의 칭의 이해를 따르는 것인가, 루터와 칼빈이 바울의 가르침을 정립한 칭의 이해를 따를 것인가? 트렌트 회의의 칭의 이해와 이와 거의 다르지 않는 새 관점학파의 칭의론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종교개혁의 칭의 이해를 따를 것인가? 믿음과 인간의 행함을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칭의론을 따를 것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죄의 전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을 따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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