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삼송제일교회(정대운 목사 시무)에서 도르트신조 강해 세미나를 개최한다

대 그레고리로부터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방 교회는 신학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학적으로 유력했던 지방은 회교도들에게 정복을 당하였으며, 강력한 희랍 철학은 동방 민족의 세력에 밀려나게 되었다.

이제 신학은 교리적 배경이 없는 북쪽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신학이란 단지 과거의 유산 정도로만 여겨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국가뿐 아니라 교회도 지배하였다. 교회의 예배, 훈련뿐만 아니라 교리 문제 등까지 간섭하였다. 그의 판단은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이냐?가 기준이 되었다.

신학적 암흑의 시대에 교회는 어느새 반펠라기안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신학의 중요성을 모르고, 실천적인 것, 실용적인 것을 강조하는 환경은 반펠라기안이 성장하는 좋은 토양이다. 반펠라기안 저술은 중세에 큰 감화력을 끼쳤고 이 교리가 공교롭게도 ‘어거스틴의 교훈’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즉, 어거스틴의 가르침이라는 외침 속에서 반펠라기안이 가르쳐지고 있었다. 중세는 그레고리 정신과 교회의 실천적 필요성 때문에 반펠라기안적 경향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드디어 중세는 인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반펠라기안의 완벽한 승리로 점철된다.

수도사였던 고트샬크는 어거스틴주의의 가면을 쓴 반펠라기우스주의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그가 간파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교리와 실전에 대해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는데, 그러한 공격은 바로 종교개혁을 시도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1. 종교개혁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위클리프나 후스를 제외하면 교리에 대한 일관된 비판은 거의 없었다. 중세 후기의 개혁 운동은 성직자의 처신 문제, 교회 통치의 오류 등을 대상으로 삼았다. 루터도 처음부터 교리적인 문제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면서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붙임으로 시작되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 개혁은 점차적으로 교리적인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즉, 종교개혁의 관심은 교리적인 것이었다.

그중에서 특별히 구원론의 문제였다. 루터는 면죄부 매매와 관련한 회개의 개념에 반대하였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께만 죄를 고백할 의무를 가지며, 고해 성사 같은 것은 단지 인간적인 명령일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거스틴적이며 바울적이었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루터에게는 당연히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안주의가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펠라기안은 어거스틴과 바울과는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려고 하기 이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저 의롭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보고 있었다[...] 루터는 자신이 실천하고 있던 반펠라기안주의에서 어거스틴의 보다 오래된 견해에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1514년과 1515년 사이에 그가 써놓은 글들 가운데서 간파될 수 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신학적으로 의심하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결정적으로 루터는 교황에게 가장 민감한 돈에 관해 언급했으므로 교황과 등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거스틴 이후 1000년 이상을 반펠라기안으로 점철된 흑암의 세계에 루터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통해 바울을 보게 되었다. 루터가 만들어 놓은 작은 구멍으로 빛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흑암은 너무나 어두웠기에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던 빛은 삽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역시나 ‘어거스틴대 반펠라기안’ 교리 싸움이었다.
 

2. 칼빈주의 vs 알미니우스

종교개혁 2세대인 존 칼빈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예언자적 인물인 루터는 자기 사상 대부분을 체계화 시키지 못하고 그 몫은 후대로 넘겼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칼빈은 자기의 신학사상을 체계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칼빈은 독창적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도 루터와 어거스틴과 기타 여러 사람들의 것을 물려받았다. 그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새롭게 발견된 원리들을 체계화 하는데 그 누구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칼빈은 ‘이중적 예정론’을 가르쳤다. 어떤 이는 구원으로 어떤 이는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한 입장, 특히 신자들이 값없이 선택 된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반대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들을 구별하신다고 생각한다[...] 만일...그들이 거기서 불평등을 발견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예를 생각하고 두려워하여 이 숭고한 신비에 대해서 무책임한 지껄임을 그쳐야 한다[...] 인간은 모두 같은 운명으로 창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에, 어떤 이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가지 운명 가운데 어느 하나로 창조되어 있는 각 사람은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도 말씀을 들어 볼 기회가 없이 죽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칼빈에 의하면 선택되지 않는 자들은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거나, 들을 기회가 있어도 마음에 품지 않고 그냥 흘려 보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지만, 그러한 원인은 인간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3. 알미니우스(Jakob Arminius)

야곱 알미니우스는 1560년대 네덜란드 오우데봐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네바 대학에서 칼빈의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 아래에서 수학하였다. 그가 암스텔담으로 돌아와 목회하는 기간 중 1589년 쿠른헤르트의 논박에 대하여 칼빈의 예정론을 변호하도록 부탁 받았다. 상대의 논거를 신중히 살펴보던 알미니우스는 자신도 쿠른헤르트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알미니우스는 라이덴 대학의 교수가 되고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게 된다. 알미니우스는 그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데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정론에 관한 그의 입장을 1608 년에 출판된 <의견선언>에서 분명히 밝혔다. 그의 주장은 첫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임명하기로 작정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한 모든 자를 용납하시며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그리고 완고한 불신자를 거절하기로 작정하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회개하고 믿는 자를 위하여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개인들의 구원을 작정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저들이 끝까지 믿고 참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알미니우스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되어 있지만, 그 은혜란 그것에 대한 사람의 수락 여부에 따라 주어진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케 할 뿐이지, 결정적이게는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은혜의 시간에 마음 문을 열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마음 문을 열지 않으면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알미니우스는 어거스틴과 칼빈이 말한 하나님 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거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예견된 공로와 관계없이 구원을 위해 인간을 선택하셨다는 사상을 부정했다. 이에 비해 칼빈과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로 작정하시면 그것을 거절할 수 없다고 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로 작정 하시면 누구도 그 은혜를 받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그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쾌히 그 길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마음에 일어나는 사랑의 마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고, 그 반응은 기쁜 마음이며 사랑스러운 마음이다. 칼빈과 어기스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택한 것이고, 알미니우스는 하나님 이 은혜를 내릴 때 우리가 반응해야만 구원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곧 알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의 경계령이다. 즉, 정통주의와 알미니우스의 경제령은 ‘불가항력적 은혜’이다. 알미니우스는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다. 1610년에 46명의 알미니우스 목사들이 다섯가지의 ‘항론’이라는 신앙고백서를 제시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4. 알미니안 5대 교리

1)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관해 믿고 ‘끝까지 견디는’ 모든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 즉, 조건적 선택을 믿는다. 하나님은 개인의 신앙과 불신앙의 예지(누가 신앙을 가질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것이다. 즉, 시작이 인간이다)에 근거해 선택과 유기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믿는 자를 선택하신다.

2) 보편적 속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십자가 상에 죽으심으로 만인을 위한 사죄를 획득하셨으나, 단지 믿는 자들만이 거기에 참여한다.

3) 인간의 무능력을 믿는다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진실로 선한 것은 어느 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는 참으로 선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새롭게 출생될 필요가 있다.

4) 항력적 은혜
우리는 하나님의 선행(先行)하시는, 깨우치시는, 계속되는, 우리와 협력하시는,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어떤 선(善)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 즉,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

5)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가능성을 믿는다
참된 신자는 은혜로 끝까지 견딜 수 있게 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태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상실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이 은혜란 불확실한 것이다.
 

5. 도르트회의(1618~ 1619)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으로 네덜란드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고 전쟁의 위험까지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도르트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이 회의는 한 국가만의 회의가 아니였다. 대표단이 영국, 독일, 개혁파 지역, 스위스, 제네바(당시 스위스에 속하지 않았었다)에서 참석하러 왔다. 이 회의에서 ‘항론’(알미니안의 주장)은 만장일치로 기각 당하였고, 모든 회원은 도르트 신경에 서명하였다. 도로트 회의의 신경을 바탕으로 칼빈주의 5대 강령이 만들어졌다. 이를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TULIP라고 한다.

1) 전적부패 (T/ Total depravity)
사람이 더 이상 타락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부패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전적부패라는 표현은 사람의 모든 면이 타락으로 인해 영향 받았으며,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향하게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무조건적 선택(U/ 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택한다. 이는 어거스틴적 칼빈주의 전통과 알미니우스주의와의 논쟁에서 근본적인 분수령이다.

3) 제한속죄(L/ Limited Monement)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에 충분한 것이지만 그분이 오신 것은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허락하신 택함 받은 사람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I/ 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밖에 없도록 역사하신다. 이 은혜의 효과는 의지를 분쇄하는데 있지 않고, 기꺼이 응답하게 하도록 고무시키는데 있다.

5) 성도의 견인(P/ Persevernce of the saints)
진실로 회개한 자들은 분명히 구원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때에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내하시기 때문이다.
 

6. 조나단 에드워즈

18세기 미국 교회의 영적 상태는 청교도 선조들의 신앙 유산을 상실하고 점차적으로 인본주의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설교는 윤리적인 것이며, 형식적이며, 도덕적이며, 생명력이 없었다. 청교도의 유산은 사라지고 너무 오랫동안 개혁 교회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18세기 초의 영국과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칼빈주의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당하였다. 미국의 유능한 젊은이들은 많은 경우 펠라기우스를 따르는 듯하였다. 반(反)칼빈주의자이자 국교회 설교자인 존 틸롯슨의 말들을 지지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거듭남의 경험도 거의 사라지고, 심지어 거듭남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인가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마른 땅에 소나기를 내려줄 사람을 보내셨는데 그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는 철저히 칼빈 신학으로 무장하고 매우 분명하고 강렬한 성령님과의 만남을 체험한 신앙을 바탕으로 매마른 미국 교회에 단비를 쏟아 냈다. 에드워즈는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의 뒤를 이어 노스햄프턴에서 목사직을 맡게 된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 중생하였느냐하는 문제에 사로 잡혀 있었다. 에드워즈의 생각에는 이 중생의 문제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니 태어날 때부터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반역자적 기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 반역자의 기질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이 자신의 반역하는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반역자적 기질이 바뀌지 않는 이상 성도들은 자기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자기 기만적인 위선에 빠진 것인지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중생의 효과가 인간 편에서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알미니안적 생각들이 뉴잉글랜드에 편만하게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정통 신앙인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천명하였다. 그는 인간의 업적과 노력을 강조하는 알미니안 신학이 강단의 위기를 가져온다고 확신하였다. 1734년에 선포된 ‘이신칭의 설교’와 일련의 연속된 설교들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된 빛과 의도를 드러내고 무수한 영혼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였다. 이때 노스햄프턴 일대에 부흥이 일어났으며, 부흥의 원동력은 알미니안주의를 반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후 1738년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설교를 하였으며, 36세 되던 해의 1739년 3월부터 8월까지『구속 사역의 역사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을 연속 설교하였다. 철저히 개혁주의적 관점의 구원론적 설교로 진행되므로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의 주류를 이루었던 알미니안이나 이신론 등 불건전한 신앙에 도전하였다. 드디어 1740년 조지 휘필드가 뉴잉글랜드 지역에 순회설교를 하면서 에드워즈와 협력하였고 드디어 제1차 대각성운동이 시작되었다. 미국 교회의 대각성이 정통 신학으로 무장한 에드워즈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제1차 대각성운동은 짧은 시간에 뉴잉글랜드를 시작으로 동부의 13개 주를 휩쓸었다. 이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기독교계를 바꾼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설교로 심판의 두려움을 전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위험을 아십니까? 그것은 분노의 불길로 가득찬 분노의 용광로요, 밑바닥이 없는 지옥입니다!’ 그는 단호한 설교자로, ‘지옥불 설교자(hell-fire preacher)’ 혹은 ‘유황불 설교자(창 19:24, 계 19:20)’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믿었다. 에드워즈 목사는 빼어난 지성에 독창적인 사고를 가진 지식인이었지만, 언제나 영성으로 지성을 통제하게끔 했다. 그에게 있어 참된 경건과 거룩이란 머리(head)보다는 가슴(heart)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는 치밀한 이론과 뜨거운 가슴으로 무장된 것이었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불을 지폈으며 조지 휘필드가 가세함으로 활활 타올랐다.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맥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 산맥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시험을 받곤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에드워즈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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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운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중심으로 탁월하게 가르치는 뛰어난 교육목회 전문가이다. 정대운 목사는 “객관화(진리)의 주관화(신앙)를 추구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교육목회 철학을 표현하기 좋아한다. 세종대, 개신대학원대학교(M.Div),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에서 공부했고, 현재 계속해서 국제신학대학원대학(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원 교수(교회사)로 사역하고 있고, 고양시의 삼송제일교회의 담임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