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그리스도인도 ‘많은 기도 시간’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많은 말’이 기도 응답과 관계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중언부언’이라고 제시했다.

이방인이 하는 ‘중언부언’(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NIV)에는 ‘기도’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헬라어 ‘βατταλογήσητε’는 1회 등장하는 단어로, KJV는 ‘반복(repetition)’으로 제시했고, NIV는 ‘옹알이(babbling)’로 제시했다. 우리는 쉽게 ‘반복’하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NIV에서 ‘옹알이’라는 개념으로 번역했다. 필자는 ‘중언부언’을 ‘의미없는 소리의 반복’, ‘주문’으로 이해를 제시한다.

이방인의 ‘중언부언’에는 어떤 효과가 있다. 모든 종교는 ‘중언부언’하는 행동을 한다. 이슬람교의 ‘아잔’, 불교의 ‘염불’ 등이 있다. 그들의 독경 소리는 그들의 종교의 특징을 나타낼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남녀호랑개교(창가학회), 증산도(태을주) 등도 반복 주문 형태로 상당히 유명하다. 이들의 행동에서 이적(異蹟)이 발생한 보고는 상당히 많다. 이들의 주문의 특징은 매우 체계적이고 규칙적이고 필수적이고, 성공 사례도 많다.

우리도 ‘반복의 기적’을 사용하는데, 완전한 기독교 용어가 아니다. ‘반복’을 하면 반드시 어떤 변화가 발생한다. ‘반복’은 합당한 경건 훈련의 방식과 신비주의 영성 훈련 방식이 공존하는 영역이다. ‘경건’ 훈련과 ‘신비주의 영성’ 훈련의 차이점은 ‘인격적 훈련’과 ‘몰입을 통한 비인격적 훈련’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경건 훈련에서 인지하지 못한 현상을 경험했을 때에는 표현하지 않는다. 영혼에 유익이 되는 구체적인 복음 문장을 표현할 뿐이다.

기독교도 ‘방언’이라는 행동은 ‘반복’의 형태이고, 신기한 효과가 발생한다. 교회에서 반복하는 비언어적 행동으로 신기한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성령의 신비한 선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복에서는 모든 인간 육체에 신기한 현상이 발생하는 필수 기능일 뿐이다. 어느 누구든지 그러한 반복 행동을 하면 각자 이상한 반응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된 방식의 행동을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름’을 표준으로 삼으면 그것을 고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신천지에서 이탈한 신도들이 다시 신천지로 돌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다.

방언을 주장하는 방옹자들은 ‘많은 기도’가 방언이 주는 유익 중 하나로 제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매우 명료하게 ‘많은 양의 언어 반복’이 그르다고 확증했다. 많은 양의 기도를 해야 유익할 것이라는 것은 매우 명확하게 성경 이해가 아니다. 그런 생각을 성경은 이방인과 같은 태도라고 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를 ‘은밀한 기도’로 가르친다(마 6:1-20절). 외식하는 기도는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할 행동이고(1절), 이방인의 행동은 듣지 않으신다(7절). 골방에서 은밀하게 하는 기도를 은밀하게 보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갚아주신다(8절). 마태복음 6장은 외식하는 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동을 거부하고, 은밀한 구제, 기도, 금식을 가르치며,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시겠다고 반복해서 가르친다.

많은 기도를 가르치는 교사는 그 위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규칙적인 기도도 가르치지 않는다. 많은 횟수, 많은 양의 기도를 기독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매일 5회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도전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반복의 노예가 된 것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보다 더 바른 기도에 전력해야 한다.

바른 기도는 중보자 믿음에 근거해서(칼빈 <기독교강요 3권> 20장 17-18절) 은혜를 근거로 무한한 아버지의 자비를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선하신 아버지께 아들로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힘껏 구하는 것이다. 육신의 욕망을 제거, 제어하고 오직 마음을 다하셔 기도하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잠시 묵도(느 2:4)하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나아가 응답을 받았다.

모든 종교가 자기들이 만든 영성 체계를 갖고 있다. 그 영성 운동에는 신비적 현상이 반드시 동반한다. 제 종교의 영성 체계를 그리스도인이 답습하면서 얻은 신비적 현상을 기독교적 영성이라고 말하면 절대로 안 된다. 사람은 반복 훈련에서 반드시 어떤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지하지 못하는 비인격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지 않음을 명료하게 세웠다. 하나님의 뜻의 보고 ‘성경’으로 설교자의 복음 선포와 복음 들음으로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매우 겸손해야 하고 철저하게 자기부정을 할 수 밖에 없다. ‘바른 기도’가 쉽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바른 기도를 실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 기도자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많은 시간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이라는 착각만큼은 하지 말자.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에 있지, 인간이 자기 욕심으로 올리는 ‘풍성한 제물’이나 ‘반복하는 의미없는 소리’에 있지 않다. 많은 양의 기도에 힘쓰기 전, 바른 기도에 먼저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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