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모 목사의 <방언, 그 불편한 진실>(25회)

글을 열며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문제 삼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성령의 은사를 흉내 낸 거짓 방언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 2, 4절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 교회의 방언도 당연히 거짓 방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방언기도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꿈에도 해 보지 않았을 오순절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일 것이다. 특히 방언기도를 통해 여러 가지 영적 체험(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 체험은 영적 체험이 아니라 착각에 불과하다)을 한 사람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필자는 방언기도를 시작한 이래 수십 년 동안 방언기도가 주는 생생한 영적 체험들이 성령의 역사임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성경을 통해 방언기도가 거짓 은사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에도 설마 하면서 그 후로도 한참동안 방언기도를 포기하지 못했다. 물론 될 수 있으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으려고 애는 썼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고 마음이 답답할 때는 혹시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다시 방언으로 기도하곤 했다.

그러던 중 고린도전서 12-14장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거짓 은사임을 100% 확신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련 없이 방언기도를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방언기도를 버린 후유증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으며(나중에 좀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이 후유증은 중독으로 인한 영적 금단 현상이었다), 어쩌다가 시험에 들었을 때는 방언기도를 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고린도전서 12-14장을 통해 방언기도가 거짓 은사임을 분명히 확인했음에도 필자가 방언기도를 버리는데 엄청난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방언기도가 성령의 은사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오순절주의자들이라면, 더구나 방언기도를 통해 실제적인 영적 체험을 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방언기도는 처음부터 성령의 은사가 아니었다.”라는 필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방언기도를 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필자가 절친한 동료 목회자들에게 성경 본문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방언기도가 거짓 은사라고 설명을 했을 때, 방언기도를 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방언기도를 하는 친구들은 “성경에 방언기도가 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생한 방언 체험을 내세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도 있고,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 다른 오순절주의자들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방언을 설명할 때 그 근거로 성경 말씀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성경 말씀들은 안타깝게도 자신의 방언 체험에 어울리게 억지로 끼워 맞춘 오석들이다. 그럼에도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외 없이 성경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 더 의존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이 성경 말씀을 오석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래서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기도는 고귀한 하늘의 언어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1)

그러면 방언으로 인한 생생한 체험만 있으면 방언기도를 성령의 은사로 단정해도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 체험만 가지고 방언기도를 성령의 은사로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오순절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체험들은 다른 이방 종교에서는 물론이고 사이비 이단들에게서까지 흔하게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진위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은 주관적인 인간의 체험이 아니라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어떤 은사를 통해서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많이 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언기도를 해 온 사람들은 성경이 방언기도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고 해도, 필자가 그랬던 것처럼, 방언기도를 버리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이런 지체들을 돕기 위해 지금부터 현대 교회의 방언과 체험들, 그리고 방언 통역의 불편한 진실을 드려다 볼 것이다. 만약 오순절주의자들이 여기서 현대 교회의 방언의 불편한 진실과 대면할 수만 있다면, 필자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방언을 버릴 용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었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야지 그 지식을 기준 삼아 현대 교회의 방언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막연하기는 하지만, “성령의 은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다시 해야 한다. 물론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에 대해서도 그렇지만(이것이 조직 신학에서 신론, 기독론은 있지만 성령론이 없는 이유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속 시원히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대 교회가 성령의 은사들로 말미암아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과, 거짓 은사자들의 막힘없는 호황은 다 이 때문이라 여겨진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 충분히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당 부분은 추론에 의해 은사의 성격들을 규명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언급할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내용들은, 물론 성경을 근거로 하지만, 상당 부분은 어쩔 수 없이 필자의 추론에 의존한다. 그럼에도 필자의 추론은 방언기도가 성령의 은사인가, 또는 아닌가를 판단하는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

‘은사’로 번역된 헬라어 ‘카리스마’(ca,risma)는 ‘카리스’(ca,rij, 은혜)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동시대의 성경 밖의 다른 헬라어 문헌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2) 신약 성경에서는 베드로전서3)를 제외하고 바울 서신서에서만 볼 수 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카리스마’를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4)

그러나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여러 번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면서도 ‘은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껏해야 구약과 신약에 두루 언급된 예언과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길게 언급되는 방언의 은사와 통역의 은사 정도만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5) 그런데 이것마저도 바울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도 현대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거짓 방언의 범람과 이로 인한 부작용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 섰다. 따라서 이런 거짓 방언의 범람과 부작용을 해결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령의 은사의 특징적인 성격들

넓은 의미로서의 은사의 범위는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모든 능력(재능)이 다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 주신 성령의 은사들, 특히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은사들은 좀 더 범위를 좁혀야 하는 특별한 은사들이다.6)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은사라고 말하는 것들과 성령이 고린도 교회에 주신 은사들은 상당 부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경 지식이 많은 목회자를 가리켜 지식의 은사가 있다고 말한다. 또 성경을 잘 가르치는 목회자에게 지혜의 은사가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은사의 의미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은사의 의미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사람의 능력은 선천적으로 주어지기도 하지만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또 그것을 개발하고 훈련해서 더 큰 능력으로 향상시킬 수도 있다. 이런 능력은 자연적이고, 반영구적이며, 상시적이고, 인위적인 특징이 있다. 여기서 자연적인이라 함은 태어나면서부터, 또는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능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며, 반영구적이라 함은 사고를 당하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능력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는 뜻이다.

상시적이라 함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며, 인위적이라 함은 인간의 의지로 어떤 특정한 능력을 선택(예를 들면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하는 것 등) 하거나, 그 능력을 개발하고 훈련해서 향상시킬 수 있으며, 반대로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병이 들거나 노쇠해 지면 그 능력이 퇴보하거나 쓸모없게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초대 교회에 주어진 성령의 은사는 일반적인 인간의 능력과는 달리 초자연적이고 신적이며 비상시(非常時)적인 능력이다. 여기서 초자연적이라 함은 기적의 성격을 띠는 능력으로서, 예를 들면 전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갑자기 유창하게 구사한다든지 하는 능력을 뜻하며, 신적이라 함은 성령의 주권적 의지로 주어지는 능력이어서 받는 자가 임의로 어떤 특정한 은사를 선택할 수 없으며, 또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발전하거나 퇴보하는 능력이 아니며, 처음부터 완전하므로 어떤 목적을 수행할 때 그 목적을 100% 달성하게 하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신유의 능력이라면 어떤 질병이든지 100% 치료된다는 말이다. 또 비상시(非常時)적이라 함은 인간의 의지대로 언제든지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실 때만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런 조건에서 벗어나는 은사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짓 은사로서, 결코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수 없다(다음 편에서 성령의 은사의 특징들을 상술할 것이다).

 

-- 각 주 --

1) 로버츠 리어든, 방언기도는 즐겁다, 이용복 옮김(서울: 규장, 2009), pp.55-63.
2) 리차드 게핀, 성령 은사론, 권성수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p.55.
3) 벧전4:10 이하의 은사 목록에서 베드로는 아마도 바울의 전문 용어를 차용한 것 같다.
4) ‘은사’의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해서는 리차드 개핀의 ‘성령 은사론’ p.54를 참고하라.
5) 리차드 개핀도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예리하게 구분해 내는 데 성공한 주경학자가 있었던가(고전12:8)? 또한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행함을 예리하게 구분하기도 어렵다(고전12:9,10). 가르치는 일과 권위하는 일도 역시 구분하기 어렵다(롬12:7,8)”고 말했다. 리차드 게핀, 성령 은사론, 권성수 옮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p.59.
6) 아더 핑크, 성령론, 지상우 옮김(서울: 엠마오, 1988),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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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방언, 그 불편한 진실>(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