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 목사의 로이드존스 성령론 연구 1

20세기 복음주의(Evangelicalism)의 거장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1981)의 저작은 건강한 신앙을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기독교의 보석이다. 존 스토트와 함께 세계 복음주의를 지탱했던 수레바퀴였다고 평가되는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 사상과 개혁신학을 진술하는 탁월한 저술들을 많이 남겼다.

특히 로이드 존스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으로부터 크게 영향받아 성령의 역사하심과 부흥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다른 개혁신학자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성령이 주시는 놀라운 부흥에 대해 깊이 있는 탁월한 저술들을 남겼다.

그런데 현대 교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불건전한 성령운동가들이 로이드 존스의 글과 사상을 더불어서 즐거워하고 앞장서 나누고 있는 것도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시리고 아픈 현실이다. 사실 로이드 존스만큼 분명한 지식과 이론을 갖추어서 오순절 운동 신학에 근간을 두고 진행되는 성령운동과 은사주의를 배척하는데 크게 힘을 쏟은 사람도 없다. 로이든 존스는 교회 속에서 귀신의 역사가 많아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오순절 운동의 은사주의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음은 로이드 존스가 자신의 책 <Healing and the Scriptures>에서 교회 속에서 귀신의 역사가 많아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나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귀신 활동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목사와 상담을 위해 찾아오고, 이 보다 흔하지는 않지만, 여러분들(의사들)에게도 찾아오는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귀신의 활동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저는 그 주된 원인이 영성(당시에 ‘영성운동’의 위험성이 대두되지 않아 ‘경건’과 ‘영성’이라는 용어의 차이에 예민하지 않았음)의 감소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나라 전체가 경건을 잃었습니다. 대 영적부흥 후에는 항상 어떤 종류의 후광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부흥의 영향이 몇 세기는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18세기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자산으로 약 200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끝이 난 것 같습니다. 18세기 대부흥과 19세기의 더 작은 부흥들로 오랜동아 버티어 왔습니다. 이제 그 영향은 사라진것 같습니다. 경건은 사라지고, 대중의 마음속에 하나님 인식이 감소되어 갈 때, 증가하는 것은 악한 세력의 득세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마약입니다. 마약은 통제력과 분별력의 본부를 파괴해 버립니다. 우리 주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들을 악한 권세의 영향력에 제물에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또 다른 요소는 잡다한 사람들이 잡다한 밀교(신비종교)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이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말하는 최근 보고서들이 있습니다. 최근 런던 지역에서 이러한 현상의 증가가 계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는 히스테릭한 매개체에 의한 대중음악의 증가입니다. (이 당시에는 CCM이 크게 유행하지 않았음). 이러한 원시적 음악과 운율의 운동은 우리들의 저급한 본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런류의 음악은 우리의 높은 절제력을 약화시키고 무너뜨려버립니다. 이러한 음악은 그들 주위에 맴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들의 희생물이 되게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운동 자체보다는 그런 운동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가서 미친 짓들과 그릇된 유행에 항상 빠져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영을 시험’하기는커녕 새로운 경험이라면 무조건 몰입해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소리지르면서 특이한 체험을 불러드리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성’에 대한 반항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경건생활의 붕괴, 마약, 위험한 음악, 그리고 오순절 운동의 은사주의로 말미암아 귀신의 활동이 교회 속에서 급속하게 증가되었다고 진단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198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심각하게 교회의 음악이 위험스러운 대중음악의 영향을 심하게 받지 않았고, 오순절 운동 신학에 바탕을 두고서 성령의 나타남을 추구하는 은사주의자들의 행태도 지금의 신사도 운동 그룹들의 행동에 비하면 매우 약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이드 존스는 오순절 운동의 은사주의로 말미암아 교회 속에서 귀신의 활동이 급속하게 증가되고 있다고 보았다.

오순절 신학으로 무장된 은사주의와 성령운동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성령의 역사를 인위적으로 기획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성령의 역사를 기획하는 그들의 기술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령은 사람에 의해 조종되는 성령이 아니다. 창조주이시고 심판주이신 성령 하나님이 어찌 영원한 죽음에 처해지기에 합당한 죄인의 부림을 받거나 조종을 받으겠는가? 은사주의자들이 양복 상의를 벗어 휘저을 때 이는 바람을 따라 성령이 일하시고, 그들의 손짓과 목소리를 따라 성령이 일하시고, 정해진 각본과 순서를 따라 돌아가는 프로그램에 맞추어서 성령이 일하신다는 것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성령운도의 저질 행태를 철저하게 봉쇄해버린 사람도 바로 로이드 존스였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부흥을 일으킨다는 초기의 발상은 미국의 개혁신학 배경에서 나타난 ‘행위구원론자’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1792-1875)로부터 시작되었다. 원죄가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모든 믿는자에게 전가된다는 사실도 부정하였던 찰스 피니는 인간이 의지와 결단을 통해 성령이 일하실 여건을 무르익게하면 성령이 임재하신다고 가르쳤다. 찰스 피니에게 부흥은 성령이 일하실 여건과 상황을 인간이 마련하였을 때 의례히 나타나는 결과로 여겨졌다.

찰스 피니는 ‘성령의 두 번째 축복’을 믿었고, 거듭난 신자에게 또 다시 성령이 임한다는 개념의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여 오순절 운동과 성령운동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다. 찰스 피니의 성령의 역사를 기획하여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그릇된 사상은 이후 본격적으로 일어난 오순절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은사주의를 수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오늘 날 성령을 부리고 유도하고 조종하는 망령된 성령운동가들이 도처에서 영혼들을 도적질하여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인간이 주도하는 이런 성령운동의 망령된 행태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미 이것을 철저하게 봉쇄하였던 사람이다. 로이드 존스는 찰스 피니가 시작한 인간이 기획하여 성령의 부흥을 일으키려는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부흥이 일어나는 시기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흥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일어납니다. 다른 때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밝혔듯이 피니가 부흥에 대해서 강연하면서 범한 비극적인 실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일정한 일들을 하고 일정한 조건들을 맞추면 언제든지 원하는 때 부흥을 부흥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역사도 그의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 부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정하신 때에 따라 주십니다. 그래서 부흥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 오히려 부흥이 찾아옵니다.”

“부흥에 관한 한 여러분은 어떤 규칙도 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매번 새로운 요소가 생기고 변화가 생기며 상이한 점이 생기기 때문에 ‘알았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부흥을 일으시켜려고 했던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흥 이야기를 읽고 ‘아, 부흥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겠다! 한 사람이 먼저 기도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합세하는 구나! 또한 한 무리가 철야기도를 하면 그 다음에 부흥이 일어나는 구나!’라고 말합니다 ... 이런 식으로 부흥 때 있었던 일을 답습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사항들까지 따라했습니다. 또 부흥을 다룬 피니의 책이나 강연 기록을 읽고 그가 시키는 일들을 전부 실행에 옮겼습니다. 피니는 자신이 말한 대로만 하면 부흥이 일어난다고 장담했지만,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언제가 강조한 것은 ‘성령의 주권’이었다. 사람이 기획하고 의도하는 대로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주장은 로이드 존스에게서 조금도 용납되지 않았다. 오늘 날에는 안수기도가 너무도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대범하고 그럴싸하게 폼을 잡고 안수기도를 잘하면 영권이 있는 목사라고 한다.

특히 저질스러운 성령운동에 힘쓰고 있는 은사주의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달려들어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면서 괴이한 영들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 왜 안수기도를 해야 하는지? 에 대해서 성경적인 가르침이 절실한 때이다. 그럴싸하게 안수하면서 성령세례를 유도하고, 치유 이적과 다양한 성령의 역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듯이 ‘성령집회’, ‘치유집회’ 등의 명칭으로 사람들이 모이게 하여 또 안수하거나 몸을 툭툭 터치하면서 성령(?)을 부리는 현대교회의 ‘시몬’(행 8:18)들에게 로이드 존스의 가르침은 시원하게 찬물을 끼얹는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과 은사를 일으키겠다고 안수기도를 시행하는 행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안수함으로써 이것이 받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은사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안수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이제 사도가 그 선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고, 신약시대에 그것이 일부 사도들에게 국한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권위와 독특성에 대한 한 부분이었다 ... 만일 그런 일이 안수의 결과로 일어난 일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드물었다. 내가 인용했던 몇몇 퓨리탄들이나 웨슬레의 경우에 있어서 또는 그 밖의 다른 경우에 있어서 안수를 암시하는 경우는 한 경우도 없었다. 여기서 다시 심리적인 요소가 가미될 경향이 있다.”

이 외에도 그릇된 오순절 신학으로 무장되어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으면 깨닫고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게 될 귀중한 내용들이 참으로 많다. 로이드 존스가 부흥에 관하여 가장 강조했던 것은 ‘하나님의 거룩, 영광, 위엄’이었다. 성령의 부흥이 부흥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게 된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입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때 어떤 영향이 나타나는 지에 주목하여 성경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욥처럼 손으로 입을 막거나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5)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부흥의 때에는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전도운동을 벌일 때에는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 그러나 부흥의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오히려 두려움이 사로잡힙니다. 경외감과 거룩한 두려움을 느끼며, 위엄있고 영광스러우며 거룩하고 심히 순결하신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로이드 존스의 책 <부흥>의 한국어판 겉표지에 로이드 존스의 다음의 말이 크게 인쇄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지극히 거룩하심과 순결하심과 놀라운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것이 성령의 부흥이라고 가장 강조했다는 것이다.

“부흥이란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과 부흥에 대한 글을 자주 인용하는 현대의 은사주의자들의 상황은 과연 어떠할까? 과연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타나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삶과 믿음을 볼 때, 하나님을 지극히 두려워하고 복음을 경외하게 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가? 유명한 은사주의자들의 삶이 더욱 더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쓰러뜨리고 금이빨 만들어 내면서 이상한 일들을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교회에 과연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나타나고 있는가?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 정확한 대답을 다 알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에게 더 많은 비리와 스캔들이 있고, 그들이 인도하는 예배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무질서와 비인격성이 넘치고 있다. 대부분의 유명한 은사주의자들은 특히 인생의 마지막 때를 추악하게 드러나는 각종 비리들와 스캔들로 장식하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최대한의 똥칠을 하면서 인생을 지저분하게 마무리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그들이 이끌었던 교회들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훼손하는 다양한 거짓 복음이 다른 어떤 곳보다 더 많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과연 사실인지 굳이 확인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불건전한 성령운동 그룹들에게 가장 무섭고 껄끄럽고 위협적인 인물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그릇된 이론을 주장하고 전파하기 위해 감히 발칙하게 로이드 존스의 글을 아주 즐겁게 인용하는 일들이 많다. 왜 이런 이상한 일들이 나타나고 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로이드 존수의 성령사상의 강점과 약점을 바르게 파악하여 왜 불건전한 자들에게 로이드 존스의 이론이 이용되고 있는지? 진정으로 성령을 모욕하며 ‘성령훼방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은사주의자들이 로이드 존스의 어떤 약점을 파고들고 이용하고 있는지? 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오순절 신학으로 무장하고서 성령운동을 벌이는 불건전한 자들에게 만만히 여기지고 있는 가장 근분적인 이유는 중생한 신자들에게 능력과 부흥을 주시는 성령의 세례가 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아주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부흥을 성령의 부어짐, 즉 성령의 추가적인 강림이 곧 부흥이라고 설명하였고, 쓰러짐 등의 신체적인 반응이 성령의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고, 거짓 방언과 거짓 예언에 대해 길을 열어주는 모호한 노선을 취했고, 특히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을 자주 언급하고 강조하여 비성경적인 성령의 기름부음 사상을 핵심으로 삼고 등장한 빈야드-신사도 운동가들에게 크게 날개를 달아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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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