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는 교회에서 유일한 직분이다. 예수께서 직접 세운 특별임시 직분(the extraordinary office)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도’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추구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성경에 근거한 '사도'는' 계시 담지자(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고 '교회 설립의 원형'이다. 교회 설립의 방식과 내용(복음, 바른 교훈)을 사도가 결정했다.

사도 요한이 소천된 뒤에 사도의 후계자들을 ‘속사도(續使徒, Post-Apostolic, 100-200)’라고 부른다. 성경에 등장한 마가, 실라, 디도, 디모데 등은 계시 담지자이기도 하고, 사도의 직계 제자이기도 하다. 96년경에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문서가 있지만, 성경이 아닌 속사도 문헌으로 구분한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Polycarp, A. D. 80-165)은 교회 역사에서 등장하면서 ‘속사도’라고 했다. 사도의 직접 제자들 그리고 사도와 동시에 사역했던 사역자들에게, 그 당시나 지금도 ‘사도’라는 칭호를 부과하지 않는다.

속사도 시대 후 니케야 공회의에서부터 칼케돈 공회의까지 주도한 교회 사역자들을 ‘교부(敎父)’라고 한다(313-451년). 교부들은 교회의 바른 가르침인 정통 교리(the Orthodoxy of the doctrine)를 확립한 일을 했다. 교부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체(homoousion)인 것을 결정했고,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참 하나님과 참 사람)'를 결정했다. 교부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교회에 진리 체계를 세웠다. 교회의 교리를 세운 유일한 공로자들에게도 ‘사도’라는 칭호나 유사한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교부'는 교회의 정통 교리를 세운 가장 중요한 사역을 했지만, 사도로 칭하거나 칭함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중세 시대, 로마의 주교가 '세계 교회의 머리'라는 주장과 함께, ‘사도직 계승’을 주장하는 ‘교황주의(caesaropapism)’가 등장했다. 사도들의 수(首)사도를 베드로를 세우고 그 직무, 지위, 권한을 계승한다는 교황 수위권(Supremacy)을 주장했다. 사도 베드로가 혼인한 것과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은 배제했다.

교회의 장로와 감독은 사도의 가르침의 내용(sound doctrine)을 성경을 근거로 선포하고 수호해야 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베드로의 사도 직분만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교황을 계시의 담지자이고 교회의 설립자인 사도의 직분을 계승하는 것이고, 주교까지 영역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지상 교회를 엄격하게 둘로(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 구분했다.

이러한 왜곡된 교회 체계를 16세기 종교 개혁에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철저하게 개혁되고 정비했다. 칼빈파는 성경의 제시대로 '집사'를 교회 안 평신도에서 선출했고, '치리 장로'를 교회 안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해서 권징할 수 있도록 질서를 세웠다. 칼빈파는 종교 개혁에 이전에 없었던 ‘평신도 치리 장로 제도’를 신설했다.

칼빈파 지역에서 발생한 알미니우스의 제자들이 제기한 항론은 돌트 공회의에서 정죄되었다(TULIP, 1619년). 영국의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교황이 사도직을 계승한다는 주장을 엄격하게 배격했다. 그러나 사도들의 범교회성과 능력을 사모했다. 웨슬리는 알미니안, 모라비안, 스웨덴보르그(E. Swedenborg, 1688~1772)까지 결합한 체계를 구축했다. 웨슬리는 1738년 자신이 경험한 올더스게이트 사건(Oldersgate Street)을 계기로 ‘새로운 믿음 체계를(세례 후 제2체험)’ 구성했고, 감리교를 창설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제2체험’을 위한 ‘도식(methodist)’을 제시했다. 한국에서 부여된 ‘감리교(監理敎)’는 ‘감독 정치’라는 뜻이지, ‘methodist’에 대한 정확한 의미 전달은 없다. methodist(도식)는 2체험이 필수적이고, 그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일정의 과정(인간의 의도가 필요함)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1900년 미국 감리교 부흥사인 찰스 파함(Charles Parham, 1873-1929)은 토페카시에서 벧엘성경학교를 설립해서 40여명의 학생에게 ‘사도적 신앙(The Apostolic Faith)’으로 그리스도를 구주와 신유의 주님으로 가르쳤다. 파함은 사도적 신앙을 이루기 위해 성경 교육에서 사도행전을 강조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공부할 때 학생들에게 '성령세례에 대한 과제'를 부과했는데, 한 학생이 '방언'으로 제출했다. 이를 근거로 파함은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증거로 '방언'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표징으로 방언을 구했는데, 1901년 1월 1일 새벽에 여학생 오즈맨(Agnes Ozman)이 방언을 시작했다.

파함의 사상을 세이모어(W. Seymour, 1870-1922)가 전수받았고, 1906년 아주사 거리에서 세이모어가 주도한 공동체에서 늦은비 운동으로 부흥운동(Azusa Street revival)을 주도했다. 파함이 오순절주의의 아버지였다면, 흑인 출신의 세이모어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기폭자였다. 세이모어의 열성적인 집회와 함께 <사도적 믿음>이란 신문을 발행했다. 1914년 오순절 운동에서 12명의 실행위원으로 하나님의 총회(The Assemblies of God)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오순절주의에서 ‘사도적 신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사도적 신앙'은 '사도의 가르침'을 계승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 시대 성경에 기록된 '사도가 보인 현상'을 반복하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사도가 가르친 내용에는 관심이 없었고, 상관없는 사도적 신앙 회복 운동은 오히려 사도의 가르침을 거역한 것이다.

오순절주의는 ‘방언’을 근본으로 하는 ‘은사운동’이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1971년부터 풀러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 교수로 활동했다. 피터 와그너는 1990년대 신사도 운동을 체계화시켜 주도했다. 한국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신사도 운동을 거부했다. 고신은 신사도 운동을 2007년, 합신 2009년에 참여 및 교류를 금지, 미주한인장로교(KAPC) 2012년 교류및 참여 금지를 결정했다. 빈야드 운동에 대해서는 통합(1995년), 고신(1996년), 합동(1997년), 기성(1998년) 금지 결정을 했다.

그런데 신사도 운동은 오순절주의의 방언을 기본으로 기적, 신유, 예언(미래를 봄) 운동을 다각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지금 세계 교회와 한국 교회는 신사도 운동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신사도 운동은 ‘사도’가 계속된다는 주장과 함께 ‘계시’가 계속된다는 주장을 한다. 수 없는 많은 교단의 금지 결정에도 다른 이단 결정과 다르게 신사도 운동은 통제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두 세 요인을, 첫째, 성도에게 열심(인간의 자력을 강조함)과 헌신이 강조되는 것, 둘째, 방언을 강조하는 것, 셋째,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단정하는 교만 등으로 제시하고 싶다.

우리의 글은 ‘사도’가 예수의 12제자와 사도 바울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교회 역사에서 꾸준히 제기된 사도에 대해서 그릇된 사용을 밝혔다.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의 계승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릇된 사용은 사도의 직분을 계승하는 것(천주교), 사도의 시대의 행위(방언), 사도의 행위(기적과 예언)을 경우였다. 사도를 그릇되게 사용한 경우에 공통된 신학 이해는 ‘계시계속 사상’이었다.

‘사도’, 교회에 가르침, ‘복음의 내용’을 준 유일한 직분이다. 그 외에 다른 것으로 ‘사도’를 사모한다면, 복음의 내용은 왜곡될 것이고 교회는 부패할 것이다. 주 하나님의 피로 산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지, 직분의 권위나 기적의 현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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