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합동)에는 수 년전 총회에서 ‘천주교’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정작 천주교의 프로그램 ‘사순절’ 기간이 되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천주교의 사순절을 사모하고 맹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오순절주의에서 천주교에 ‘동일한 방언’ 현상이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평가하듯이, 동일한 사순절을 지키면 동일한 수준이 될 것이다. 합동 교단은 총회 결의로 사순절를 행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왜 사순절을 지키지 않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사순절은 무엇인가? ‘사순절(四旬節)’, ‘Lent’는 본래 Anglo Saxon어로 ‘spring(봄)’이란 말이다.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것이 3일이지만, 시간은 40시간이 되지 못한다. 고대 교회는 40시간의 신비를 묵상했는데,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731년 샤를마뉴(Charlemagne) 시대에 40일로 정착했다고 한다.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종려주일과 함께 고난주간’으로 한 주간을 묵상하는 과정을 지냈는데, 언제부터가 ‘사순절’로 대치되었다. 서방교회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면서 신비 묵상을 긴 날짜를 제정해서 종교심을 과시하려고 한 것인데, 어떤 날짜를 준수하여 외적으로 믿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신비를 묵상하는 것에서 종교심(자기 믿음)을 과시하는 형태로 왜곡한 것이다.

자기 믿음을 과시하는 형태는 전형적인 바리새적인 행동이다. 1세기 바리새파의 가르침을 사람들은 상을 줄만큼 사랑과 존경을 했지만, 주 예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순절, 왜 40일을 지켜야하는지 답을 해야 한다.” 혹 ‘40’이 신비의 숫자라고 하면서 들먹거린다면,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생각해 보자. 40의 마력에 한 때 한국 교회를 휩쓸었는데, 지금은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릭 워렌은 크리슬람(Chrislam)적인 발언을 했고, 2013년 그의 아들(27세)은 정신질환에 의해서 자살했다.

‘40’이란 숫자를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40’이란 숫자 배열을 해서 묵상하려한다면, 게마트리아(gematria)를 공부하라. 한국 철학에도 숫자 놀이는 충분히 많고 흥미롭고 신비롭다. 수학의 신비는 신비주의 원형인 피타고라스가 제시했다. ‘수학과 신비주의’가 얼마나 잘 맞는 짝꿍인지 알 수 있다.

서방 교회는 고행의 ‘사순절’ 전에 ‘사육제(謝肉祭, carnival)’를 제정해서, 더 세속화를 가열시켰다. 사육제는 사순절에 고행을 위해서 육식을 금지시키는 의식이다. 육식(肉食)을 금하기 전에 ‘육을 폭식’하는 절기이다. 육식을 금지하는 사순절이 오기 전 3-8일 동안 술과 고기를 먹으며 즐기는 축제이다. ‘사육제(카니발)’는 ‘브라질 리우의 카니발’을 보면 알 수 있다(Carnaval Brazil 2017, 2월 24(금)-28(화)). 브라질의 카니발과 사순절을 연결시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17년 사순절은 3월 1일(수)부터 시작했다. 브라질의 카니발을 기독교 축제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카니발은 사순절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카니발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까지 진행한 뒤, 사순절을 시작한다.

‘사순절과 카니발의 조합’은 무슬림의 ‘라마단(Ramadan)의 규례’와 유사하다. 라마단은 ‘더운 달’이란 뜻으로 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꾸란을 가르쳤다고 간주하는 기간으로 ‘일출에서 일몰까지 금식’하고 물도 마시지 않으며 5번 기도를 행한다. 그런데 밤이 되면 고행이 해제되어 음식을 먹는다. 저녁에 먹는 음식(Iftar, Buka puasa)이 규정되어 있다. 라마단이 끝나면 고생을 보상한다는 뜻으로 ‘이드 알 피트르(Eid-Al-Fitr)’ - 인도네시아에서는 르바란(Lebaran), 말레이시아에서는 ‘하리 라야’, 싱가포르에서는 하리 라야는 법정 공휴일-이란 연휴를 갖기도 한다. 인간의 종교심을 과시하려는 것과 탐욕이 적절하게 배합된 것이다.

사순절(四旬節, Lent, 국교회 大祭節)은 부활절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 기간이다. 반드시 수요일에 시작하는데,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 시작하고, 마지막 날은 부활 전 ‘금요일’이다. 금요일은 예수께서 죽으신 날로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금요일’을 ‘성 금요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금요일’은 해마다 ‘날짜’가 변경된다).

사순절 40일 동안 금식 등 교회 혹은 개인적으로 다양한 영성 훈련을 갖는다. 천주교는 사순절을 ‘빠스카(逾越節)’와 연결하는데, ‘빠스카는 유월절’이다. 천주교에서 ‘부활절’은 ‘빠스카의 신비’, ‘빠스카의 축제’가 있는 날이다. 천주교는 ‘빠스카’가 ‘지나간다’는 뜻이기 때문에 ‘과월절(過越節)’이라고 번역했다(peschach, passover, 逾越節, 過越節). 천주교에서 준수하는 '빠스카'의 신비에는, 부활절의 '부활의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빠스카의 신비'가 있다. ‘사순절’의 결국이 ‘빠스카의 신비’이다. ‘빠스카 양초’가 영성 훈련의 도구로 등장할지 모른다. 부활절 새벽에 왜 양초를 켜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순절의 시작 ‘재의 수요일’, 부활절의 시작 ‘빠스카 양초’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교회질서(절기)를 개혁했다. 사순절도 종교개혁 때에 개혁된 절기 중 하나다. 성탄절은 개혁하지 못했고, 결국 세계적인 축제의 날이 되었다. 그러나 사순절은 효과적으로 개혁했고 소수 브라질에 잔류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순절이 다시 살아났다. 역사는 반복됨의 원리를 따라서 사순절이 정착하면 자연스럽게 사육제도 발생할 것이다. 천주교가 강한 지역에서 사육제를 지역 축제로 정착시킬 창안할 수도 있다.

지금 미국의 할로윈(Halloween, 만성절, 萬聖節, All Saints'Day의 변형)이 우리 문화 속으로 들어왔다. 할로윈(Halloween, 10월 31일)은 All Hallows’ Evening 또는 All Hallow’s Eve의 준말로, ‘만성절 전야(前夜)’라는 뜻이다. 11월 1일은 만성절로, 11월 2일은 ‘위령의 날(All soul's day)’로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이다. 중세 시대 ‘만성절과 위령의 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할로윈데이는 세계적인 축제와 문화로 자리잡으려 하고 있다.

사순절은 ‘금식과 영성 훈련’이라는 미명 아래서 365일 동일한 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왜곡한다. 52주 거룩한 주일을 소홀하게 한다. 종교개혁가들은 1,000년 동안 지켜오던 생활체계를 왜 바꾸려고 했는가? 그것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않고, 종교 훈련으로 자기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자기만족을 추구하면, 지도자는 더 편하게 자기 배를 위해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다. ‘사순절’ 등 각종 고안된 종교 프로그램은 지도자가 제공하는 ‘우민화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중세 1,000년 동안 교회가 주는 가르침, 흑사병에 주술을 행했고, 관점을 돌리기 위해서 십자군 전쟁을 했고, 종교의 이름으로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했다. 종교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양식은 교회가 아닌 성령과 성경에서 나온다고 확증했다.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프로그램을 개혁해야 한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는 개혁교회 단독 표어가 아니다. 로마 교회에서도 사용한다. 로마 교회에서 개혁은 트렌트 회의(Trent, 1545-1564)였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하지 못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꾸준히 개혁해야 한다. 개혁한 과제를 다시 돌이키는 것은 로마 교회(천주교)의 개혁에 동조하는 것이다. 믿음의 경주에서 뒤로 물러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잠 26:11, 벧후 2:22).

사순절은 황제가 주는 우민화 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사회에서 우민화 프로그램은 ‘3S(Sex, Screen, Sport)’이지만, 당시에는 제정일치사회이기 때문에 종교로 우민화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이다. 경계병은 밤새워 경계하며 적을 방어하며, 새벽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빛이 오면 경계의 의무가 사라진다. 지금은 ‘참빛’이신 예수께서 오셨다. 참빛인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믿음의 도리를 확실하고 정확하게 알고 붙들 수 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주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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