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경건의 수단이다. 따라서 기도는 마땅히 경건의 척도로 여겨져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경건의 수단인 기도가 경건의 척도로는 사용할 수가 없다. 만일 한국교회에서도 기도가 경건의 척도로 사용할 수 있다면 특별새벽 기도회의 붐을 일으킨 사랑의 교회, 새벽기도로 유명한 명성교회, 기도를 강조하며 뜨겁게 기도하는 순복음교회는 가장 경건한 교회, 경건의 모양만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 함께 나타나는 교회여야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게 기도를 강조하며 뜨겁게 기도하지만 온갖 불법의 온상으로 전락해버리지 않았던가? 왜 이렇게 경건의 수단인 기도가 유독 한국교회에서는 경건의 척도로 통하지 않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더니 그 제단이 저로 범죄케 하는 것이 되었도다(호8:11)." 이 말씀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적용한다면 그렇게 강조하는 기도의 제단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이 되지는 않았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이제는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이교도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분명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며 그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지게 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이교도적 기도관을 버리지 않고 고수함으로 열심히 뜨겁게 장시간 기도하면 아주 신령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우러러 본다. 기도의 열심이 그 사람과 그 교회의 경건의 척도를 말해주지 않음에도 말이다. 어떤 은퇴목회자는 자신의 교회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는 가장 많이 말썽을 피운다고 말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기도의 내용과 목적이 주께서 가르쳐주신 정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주님은 말을 많이 하는 기도와 염려와 근심을 해결하기 위한 기도를 이방신전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규정, 금지하시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심을 믿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을 명령하셨다.

따라서 마땅히 한국교회는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는 이교도적 가르침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염려와 근심은 주께 맡기고, 선하신 주께서 어떤 길로 이끄시던지 그것은 최선의 결과로 인도될 것을 신뢰하고 우리의 관심을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일에 두고 기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철야를 하며 기도한다면 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만일 사랑의 교회나 명성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기도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내용에 충실한 기도로 변화된다면 그들은 당장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죄악된 길에서 돌이키기 위하여 몸부림 칠 것이다. 그 동안 한국교계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점을 사죄하고 삭개오의 회개처럼 교회 재산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의 기도라면 그들은 이번에도 기도로 이 난관을 타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주의 뜻을 벗어난 기도가 응답될 수 있을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많은 교회가 기도의 동기부여를 할 때 주로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이다. 그러나 믿고 구한다고 언제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3,4) 

정욕이 동기가 된 기도는 잘못 구한 것으로 주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적 간음이요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됨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어떻게 경건의 수단인 기도가 영적 간음과 하나님의 원수를 자처하는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이는 호세아가 지적한대로 가장 거룩한 제단이 이스라엘 백성을 범죄케 하는 소재가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리새인처럼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 경건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이 또 있었을까?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도를 보시고 감동하시고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선자요 회칠한 무덤이라고 정죄하셨다. 주님은 기도의 행위, 기도의 정성, 기도의 열심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와 내용을 보시기 때문이다. 세리처럼 자신의 죄악을 인하여 가슴을 치며 주님의 자비만을 간구하는가를 보신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기 위한 간구인지를 보신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살기가 등등한 산헤드린공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되지 않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힘을 간구하는가를 보신다. 결국 이 기도의 응답은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를 초토화시키는 대핍박이 일어나게 되지만 핍박을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난 제자들은 복음 때문에 피난길에 올랐으면서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며,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는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된다.

뜨거운 기도가 그 사람의 신앙의 뜨거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뜨거움은 그리스도와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주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섬기며 희생함이 그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변화됨이 없는 뜨거움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소재에 불과하다. 그런 뜨거운 기도는 살았다는 이름만 가졌지 주님 앞에서는 죽은 성도, 죽은 교회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라도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올바른 기도관을 정립하길 바란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자기 문제와 소원성취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은 다 선하신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길 바란다. 성도 개인과 교회의 운영에 있어서 세속을 따르기 보다는 주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기도, 주께서 명하신 기도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나라와 의를 간구하는 사람은 그 삶이 주님처럼 변화돼서 늘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삶을 살 것이다.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용서하신 주님처럼 자신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원수라도 용서하며 그를 위해서도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삶으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보여주신 삶을 오늘날 이 땅 위에 재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죄악된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의 왕되신 주님의 명령이기에 어떻게든 복종하기 위하여 자신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인하여 더 엎드리게 될 것이다.

또 주께서 가르쳐주신 내용대로 기도하는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서 거룩함과 구별됨을 갖고 세속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초대교회와 고대교회의 본을 따라 교회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임을 기억하고 무리한 교회건축과 성도들끼리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 하나님께 드려진 귀한 헌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루살렘의 감독이었던 키릴루스(313년~386년)는 예루살렘 지방에 기근이 들어서 다른 방도로는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자, 교회의 그릇들과 예복들을 팔아서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했다.

아미다의 감독 아카시우스(~425년)는 로마의 포로로 끌려온 7000여명의 사산조 페르시아인들이 자신의 교구 내에서 기근으로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에 성직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하나님은 잡수시거나 마시는 분이 아니시니 쟁반이나 잔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함으로서 교회의 그릇들을 녹여 7000명의 포로들의 몸값을 치루고 옷과 음식을 주며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당시 사산조페르시아의 왕이었던 바흐람5세에게 아카시우스의 선행을 보고함으로 당시 페르시아 제국내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 금지령을 내리게 한다. 이뿐 아니라 오랜 기간 전쟁을 통하여 축적된 동로마제국을 향한 페르시아인들의 적대감을 해소함으로 페르시아제국 내에 기독교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거룩하고 구별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최윤식 박사에 의하면 현재 한국교회의 부채가 4조 5천억이며, 년 이자만 2,250억에서 5,0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돈이 얼마나 큰 돈인가 하면 우리나라 인구 100만 정도의 도시 1년 예산이 약 2조 5천억 원 정도다. 십만 이하의 군소도시의 경우 3천억 원 이하의 예산으로 1년 살림을 꾸려 나간다. 만일 한국교회가 4조 5천억의 돈을 방만한 교회 운영과 건축을 위하여 빌린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하여 빌렸다면, 그리고 매년 이자로 지출되고 있는 5000억 원만이라도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랑의 교회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베이스캠프를 튼튼하게 짓기 위하여 3000억의 바벨탑을 쌓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서울시내의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 돈을 사용했다면 진짜 사랑의 교회, 진실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교회로 대대손손 칭찬받지 않았을까? 3000억이면 전세자금 1억 원씩 삼천명에게 나눠줄 수 있는 돈이 아닌가? 그들은 진정한 교회됨, 예수님의 제자됨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비용을 날린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몇 천억 짜리 교회 건물, 몇 백억 짜리 교육관, 몇 십억 짜리 교회당을 짓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죽음으로 완성돼 더 이상 쓸 수 없는 성전(건축)이라는 용어와 구약적 복을 남발하고 있다. 이런 무리한 교회 건축때문에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의 대부분이 은행 대출 빚과 이자 상환에 지출됨으로 결국 주님의 이름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복음을 전파하는 용도로는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5.18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반하여 낭비한 부분을 그리스도를 위한 비용으로 계산한 것은 헛된 일이다. --중략---미신으로 사람들을 속여서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해야 했을 부분을, 교회들을 세우고 조각상들을 세우고 성물들을 사고 성직자들의 예복을 마련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구제물들이 날마다 이런 깊고 깊은 심연 속으로 삼켜지고 있는 것이다."라며 당시 교회의 부당한 헌금 사용을 지적하였는데 어쩌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전의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까지 답습하고 있을까?

이러고도 한국교회는 기도의 열정이 뜨거운 살아 있는 교회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기도는 뜨거움이나 열정의 문제가 아니라 단 한 마디라도 주의 뜻에 부합하는 기도였나를 봐야 한다. 한국교회의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경건의 수단인 기도가 경건의 척도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기도의 열심과 열정이라는 잎만 무성할 뿐 정작 경건이라는 열매는 전혀 맺지 못하고 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사66:2-4)

주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들은 자신의 죄와 죄에 빠지게 하는 죄악된 본성을 인하여 심령의 가난함과 통회함으로 주 앞에 나올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욕과 세속적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기도의 뜨거움만 앞세우는 자들은 경건의 수단인 기도를 주님 앞에 살인함과 개의 목을 꺾음, 돼지의 피를 드림, 우상을 찬송하는 가증한 것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들은 주님이 회개를 위하여 불러도 자신은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까 문제 삼지 말라고 대답함으로 결국 유혹을 받아 주님의 심판의 대상을 자처하고 있다. 이 두려운 말씀 앞에 누가 떨며 나올 것인가? 우리의 기도는 과연 경건의 수단이요 척도가 되는가? 아니면 세속화와 미혹됨, 심판의 척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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