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중보기도 운동에 힘쓰는 예수전도단의 중보기도 집회 홍보포스터에서 발췌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날에 일어난 일과 유사한 일이 사도행전 4장에서 일어났다. 그리스도를 살해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끌려가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경고 받고 풀려난 사도들과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였다. 성령께서 제자들의 기도에 너무도 강하게 응답하시어 땅이 진동했다고 기록되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제 2의 오순절 사건이라고 한다. 앞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선봉부대’(?)가 이미 하늘에서 강림하셨는데, 이날 성령의 ‘후속부대’(?)가 하늘에서 또 강력하게 강림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그릇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지상강림이 역사상 단회적인 것이 아니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라고 한다.

사도행전 4장의 땅의 흔들림이 성령이 하늘로부터 또 지상으로 강림하였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이후 2,000년 동안 그 같은 일이 없었을까? 역사상 많은 성령의 부흥이 있었다. 1700년대 초반 영국에서 일어난 웨슬리의 부흥운동, 17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일어난 조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 1907년 평양에서 외극인 선교사들을 통하여 시작된 부흥운동에서 땅이 흔들리거나,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성령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셨다는 내용은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필자는 1906년의 웨일즈 부흥, 1907년의 아주사 부흥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부흥으로 보지 않는다.)

사도행전 4장의 땅의 진동은 절박한 위기에 처한 사도들과 제자들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비상한 역사하심이었다. 기독교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압살하기 위해 사도들을 위협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큰 권능을 입셨다.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다. 이날 큰 은혜를 입은 사도들과 제자들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1970년대부터 피터 와그너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보기도 운동은 일반 신자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의 권세와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중보기도를 이야기하므로 매우 비성경적이다. 그들은 일반 신자들과는 영적으로 다른 위치에서 기도하는 은사를 받은 중보자들을 찾아 훈련한다고 한다. 일반 사람보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서 기도하여 하나님이 일하시게 만드는 중보기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매우 비성경적이다. 

신학적으로 무지하여 여러 나쁜 사상들로부터 오염된 목사들의 교회들에 ‘중보기도팀’이라는 것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교회들의 중보기도팀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보면 이미 신앙의 토양이 변질되어 버린 약간의 무당끼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중보기도 사상은 성경적 신앙에서 벗어났고, 필연적으로 귀신의 역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한국의 어떤 이단들이 ‘천사동원권’, ‘기도응답권’이라는 것을 주장하다가 정죄받았다. ‘천사동원권’이란 하나님이 뜻하시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특정인들에게 천사를 동원시켜 일하게하는 기도의 권세가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기도응답권’이란 특정인들이 일반인들과 다른 영적인 위치에서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더욱 신속하게 응답해 주신다는 기도사상이다.

이것과 같은 비성경적인 기도 사상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70년대부터 피터 와그너와 신디 제이콥스 등이 중심되어 일어난 중보기도 사상이다. 용어와 모양은 다를지라도 전 세계의 중보기도 운동가들에게는 한국 이단들의 ‘천사동원권’ ,‘기도응답권’이라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 있어 보인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최근 이곳 미시간에서 그릇된 기도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JAMA 중보기도 컨퍼런스’라는 집회를 벌였다. JAMA 중보기도 컨퍼런스의 대표 강순용 목사는 이전의 JAMA 중보기도 집회에서 자신의 중보기도 사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중보(Intercession)란 between을 의미하는 inter와 go를 의미하는 라틴어 Cedere에서 파생한 cession이 합해진 말로 사이가 나쁜 사람을 서로 화해시키거나 어떤 약속을 확증(Confirm)시키기 위해 어떤 자격있는 자가 중간에 끼어드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중보기도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다.”(강순영 목사)

일반 신자들과는 중보기도자가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어가서 하나님의 계획을 확증시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으나게 만드는 것이 중보기도라고 강순영 목사도 말하고 있다. 이런 사상을 가지면 미혹의 영들에게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중보기도 운동과 깊이 연관된 모든 사람들은 이단의 길로 빠졌다.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의 논란이 있을 수 없다. 비성경적인 기도 운동에 오염된 사람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으로 거짓 방언기도 은사가 장착되어 있고, 조금 더 진보하면 귀신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예언, 환상, 음성 등의 거짓 계시들이 나타나다. 그러니 이단의 길로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4장에서 하나님은 땅이 흔들릴 정도로 사도들의 기도에 강하게 응답하셨다. 사도들이 중보기도회를 열었기 때문일까? 이날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회를 열었나? 그렇지 않았다. 이미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대표로 죽으시어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한 만족을 드렸고,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덧입게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 사도들은 중보기도회를 열지 않았고, 단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박한 위기에 처한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아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였을 뿐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기도에 관해 특별한 입장에 서 있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로 끼어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이 집행되게 하는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믿지도 않았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기도에 대해 배운적도 없었다. 단지 예수님께서 생전에 가르치신 대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믿고 간절하게 기도했을 뿐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만일 사도들이 내가 사는 미시간의 앤아버에 있는 한인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사도들이 요즘 유행하는 중보기도 사상을 가졌다면 어떻게 기도하였을까? 그들은 앤아버의 한인교회들과 하나님 사이로 들어가서(끼어들어가서) 기도하였을 것이다. 앤아버 한인교회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뜻과 계획이 ‘집행’되게 만들 수 있는 중보기도의 권세를 활용하였을 것이다.

만일 사도들이 중보기도 개념을 가지고 기도하였다면, 아마도 자신들의 손바닥을 미시간 주의 앤아버를 향하게 들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상하게도 중보기도의 권세를 가졌다는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경유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자세로 기도를 하다가 더 강한 중보기도의 '삘'(feel)이 오면 “~ 할 찌어다!” 모드로 들어가기도 한다.

“천사들은 미시간 주 앤아버로 집결하여 거룩한 전쟁을 시작할지어다!”
“대학가를 지배하는 거짓의 영, 음란의 영들은 결박될지어다!”

그 외에도 그들의 또 다른 특이한 장기가 또 나올 수 있다. 자신들이 주도하는 영적전쟁이 급박해지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대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을 향하여 예리한 중보기도의 창을 던지기도 한다. 더 많이 변질된 중보기도자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초정밀 타격 기도가 나타날 수도 있다.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000 목사는 잠잠할찌어다!” 또는 "000 목사를 결박하여 주옵시고 ..." 

다른 사람과 하나님 사이로 들어가는 중보기도 사상에 빠지면 필연적으로 이런 전쟁놀이에 몰입하게 된다. 자신에게 대단한 기도의 무기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그것을 쓰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중보기도의 권세와 은사을 주셨다는 비성경적인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 중보기도 신학의 필연적인 열매이다.

그러므로 중보기도 운동이 강해지면 기독교에서는 전쟁놀이가 뜨거워지게 된다. 기독교의 핵심이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인데, 중보기도 전쟁놀이가 뜨거워지면 기독교는 악한 사탄을 물리치고 정복하는데 특별한 강점을 가진 종교로 변신한다. 신디 제이콥스 등의 중보기도 운동가들의 책을 보면 무용담이 많다. 중보기도 무협지 같은 느낌이 든다. 하나님이 중보기도하도록 잠자는 중보기도자를 급히 깨우셨고, 중보기도를 시작하니 대단히 악한 영이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환상이 전개되고, 중보기도로 밤새도록 그것과 싸워서 결박해 놓았고 ... 이런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사도들에게는 이런 중보기도 사상이 전혀 없었다. 사도들이 미시간 주 앤아버의 한인교회들을 위해 기도했다면,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용서받은 죄인의 입장에서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앤아버의 한인교회들과 한인들에게 복음의 은혜를 주시고, 전도의 길을 열어주시고, 악한 마귀의 궤계를 이기도록 힘을 주시라고 단순하고 겸손하게 구하였을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듣고 응답하실 수 밖에 없는 중보기도의 권세를 가진 사람은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빨리 일하게 만들 중보기도의 권세를 가진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들은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더 친밀하게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외의 다른 기도 방식이나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에 대해 성경은 단지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더 들으시고 응답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 기도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사도행전 4장에서 하나님이 땅이 진동하도록 크게 역사하신 것은 사도들이 중보기도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도들은 중보기도회를 열지도 않았다. 사도들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합심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였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교회의 역사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힘쓰는 사람들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크게 역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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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거짓 신학의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기 위해 시작된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졸업),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Eqiuv.졸업),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 졸업),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 수학),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 수학), 남아공신학대학원(South African Theological Seminary, Ph.D)에서 연구하였고, 현재 University of Pretoria(Ph.D)에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Story」, 「한 눈에 들어오는 청교도 개혁운동」,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