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분명히 방언이 그치게 될 것을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라고 교훈했다. 특별히 “폐하고”, “그치고”, “폐하리라”는 표현들은 헬라어 원어에서 미래 수동태복수형( καταργηθησονται), 미래중간태복수(παυσονται), 미래수동태단수형(καταργηθησεται )으로 쓰였다.

따라서 성경이 완성되면 예언과 지식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치게 되고, 특별히 방언 같은 경우에는 주어의 역할을 강조하는 중간태로 쓰임으로서 성경의 완성과 함께 스스로 없어지게 될 것을 시사했다. 그러면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 고전 13장 9,10절을 보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되기 전이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고 종합적으로 알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대소요리문답에 나와 있듯이 구원과 신앙생활에 필요한 온전한 계시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됨으로서 어린아이의 일,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던 것들을 버리게 된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과 방언이 필요 없게 된다. 마치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전화번호 책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과 같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전화번호와 주소뿐 아니라 가는 길까지 알려주는 데 누가 두꺼운 전화번호책을 들여다 볼까?

그런데 고전13:12절이 약간 논란이 된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신오순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11절의 온전한 것은 주님의 재림이라고 주장한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때까지 방언과 예언이 계속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우리의 지식이 과연 주님처럼 모든 것을 알게 됨, 전지해질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셔도 우리는 여전히 피조물의 위치에 있을 뿐이다.

또한 성경에서 언급된 “주님의 재림”, “다시 오심”, “나타나심”이라는 단어들은 전부 다 여성형 명사들로 여성형 관사가 붙는다. 그러나 11절의 '온전한 것'은 중성으로 표시돼 있어서 이것이 재림이라는 신오순절주의자들의 억지 주장을 쉽게 일축할 수 있다. 온전한 것, 즉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당시의 거울이었던 청동거울이 희미하게 얼굴을 비춰준 것처럼 완전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되면 이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란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완성되면 방언, 예언, 지식과 같은 계시성을 띤 사도적 은사, 사도시대에만 나타났던 은사들은 다 스스로 그치게 될 것이지만 사랑, 믿음, 소망은 영원할 것이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함으로서 일시적인 은사보다는 영원히 있을 사랑을 추구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이런 논조가운데 14장으로 이어지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을 추구하는 은사활용인지 설명한 것이다.

방언의 그침에 대한 위대한 신앙의 스승들의 증언들이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이 대목 전체는 매우 애매모호하다. 그 이유는 성경에 언급된 사실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방언의 중단때문이다. 즉 방언은 과거에는 발생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2. 성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최초의 교회 시대에는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임했고, 믿는 자들은 방언으로 말했는데, '성령이 그들에게 할 말을 주셨을 때' 그 말은 믿는 자들이 전에 배운 적이 없는 말이었다. 이 은사는 그 시대에 맞춰진 표적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이 장차 모든 언어를 통해 온 땅에 퍼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모든 언어로 성령의 전조가 나타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하나의 전조로 성취된 이후 사라졌다.

3. 존 칼빈(John Calvin)의 (제네비교리문답 247번)
문: 그렇다면 방언으로(알지 못하는 말)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이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며 일종의 사악한 위선입니다."

4. 존 오웬(John Owen)
본질적으로 우리의 모든 능력을 능가하는 은사, 그런 성령의 섭리는 오래전에 중단되었고 오늘날 아무도 그런 은사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면 그것은 광신적인 기만으로 의심받아 마땅하다.

5. 메튜 헨리(Matthew Henry)
방언의 은사는 예언의 영의 한 새로운 산물이었고 유대인의 울타리가 무너져 모든 열방이 교회로 인도되게 하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런 은사들과 그 밖에 다른 예언의 은사들은 하나의 표적이므로 오래 전에 중단되어 폐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은사들이 부활하기를 기대할 아무런 동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을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 하늘의 음성보다 더 확실한 말씀이라고 일컬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주의를 기울이고 성경을 찾아보고 성경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6.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그는 성령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빈번한 설교 때문에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게 광신주의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이런 주장을 단호히 부정했다. "나는 결코 이런 특별한 기적의 역사를 일으키거나 방언을 말하는 척 한 적이 없다." 사우스캘롤라이나주의 회중교회 목사였던  존 스미스(Joseph Smith)는 "휫필드는 영감의 시대에 특별히 나타났다가 그 시대에 함께 사라진 사도 직분의 비상한 권능과 표적을 사칭하는 일체의 행위를 부정한다."라고 말했다.

7.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사도 시대의 교회에 주어진 많은 은사는 오늘날의 교회에는 쓸모가 없다."

 

방언이 이렇게 성경의 완성과 함께 그쳤음이 성경적으로 교회사적으로 명백히 입증될 수 있거든 어떻게 기도용 방언이나 선교 오지에서의 복음의 증거를 위한 방언이 있을 수 있을까? 설사 있다고한들 그것을 어떻게 성령의 역사로 인정할 수 있을까? 개혁주의 신학이 아니라면 당연히 그렇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중심의 신학인 개혁주의 신학의 테두리 안에서는 인간의 경험이 진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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